〈 30화 〉 초읽기
* * *
"거대 샌드웜 좀 잡고 올게."
나는 마치 동네앞 고블린을 잡고 온다는 가벼운 말투로 얘기를 꺼냈다.
"뭐? 샌드웜?!"
샌드웜의 강함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에린델은 깜짝 놀라 동공이 커졌다.
"주인, 나갔다. 오더니 무슨 이상한 바람이 분 거야."
비렌데는 또 저런다는 듯이 체념한 눈빛을 보였다.
"샌드웜이 뭔데??"
세키돌은 평소와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그냥 지렁이야 좀 큰 지렁이."
"으엑, 세키돌은 지렁이 싫어. 징그러워."
징그럽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사실 샌드웜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은 잘 가지 않았다. 블랙 미스릴검이 너무 가지고 싶었기에, 시롬의 터질듯한 가슴을 만져보고 싶었기에 즉흥적으로 선택한 결정.
"강단백, 샌드웜을 잡는다는 거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야?"
"물론이지, 나 돈이 필요해. 좀 많이."
"얼마나 필요한데?"
"300골드."
"그렇게 큰돈이 왜 필요한 건데?"
"마음을 뺏겼어.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참겠어."
에린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뭐? 마음을 뺏겨? 그럼 여자 사려고 샌드웜에게 덤비는 위험한 짓을 하겠다는 거야?"
"마음을 뺏긴 건 맞는데 여자가 아니라 검이야."
"?"
"검은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미스릴 소드를 봤어. 지금 이 대륙에서는 쉽게 구할 수도 없대. 과거 엘프국에서만 나오던 거라나."
"블랙 미스릴."
블랙 미스릴 얘기가 나오자 에린델은 조금 아련한 얼굴이 되었다.
"블랙 미스릴은 확실히 우리 페르난에서만 구할 수 있었어. 지금도 페르난에 갈 수만 있다면 많이 매장되어 있겠지만."
지금페르난은 마왕군에 점령당했다. 수많은 엘프가 죽었고 노예로 부려지고 있는 곳.
"에린델은 블랙 미스릴 좋아해?"
"응, 좋아했지. 구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단단하고 예쁘고 완벽한 광물인걸."
"그래? 그럼 블랙 미스릴 잔뜩 구해다 줄게. 그걸로 반지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자."
"이젠 구할 수 없잖아. 페르난 근처에도 갈 수 없는걸."
"무슨 소리야? 내가 마왕을 잡을 건데. 몇 개월 뒤면 블랙 미스릴 풀세트를 입고 있을걸?"
"풋, 아무튼 말은 잘해요."
아무튼 그렇게 동료들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샌드웜을 잡는 건 위험한 일일테니 나 혼자 간다고 말을 했다. 그녀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위험하니까 쉬고 있으라고? 난 싫어. 만티코어때도 힘을 합쳐서 키메라들을 잘 잡았었잖아."
"나도 싫어 대장님. 따라갈래. 세키돌도 강해!"
"내가 없으면 다쳐도 의지할 게 물약밖에 없잖아? 괜찮겠어 주인?"
혼자 가서 최대한 강한 마법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지만, 그녀들의 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서 하는 수 없이 져주기로 했다. 솔직히 혼자 가는 건 조금 외롭기도 하고.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자. 이미 길드에서 퀘스트 용지는 가져왔어."
그렇게 갑작스럽게 거대 샌드웜 토벌 파티가 결성되었다.
****
퀘스트용지에 쓰인 위치로 이동하는데는 몇 시간 이상 걸렸다. 비렌데의 헤이스트를 걸고 달렸는데도 그랬다. 생각보다 라하사 사막은 먼 곳이었다.
퀘스트 용지에 의하면 샌드웜은 라하사 사막 전역에서 무작위로 출몰한다고 한다. 즉,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니 니들이 알아서 찾으라는 얘기였다.
한참을 사막을 해맸으나 역시 아무것도 만날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샌드웜을 만나야 할 텐데."
에린델의 말처럼 나 또한 해가 지는 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막지대이니만큼 해가 지면 기온도 많이 낮아지고, 랜턴을 켠다 한들 시야는 좁아진다.
"보고 싶다 샌드웜아! 빨리 나와줘!"
내 애절한 외침에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침묵뿐. 사막에서 한참을 헤매고 있었으나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상단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왜 우린 이렇게 만나기 힘든 거지?"
"어쩌면 최근에 많이 잡아먹어서 배가 부른 걸지도 모르지. 사실 이미 우리 발밑에 있는데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던가?"
"무서운 소리하지 마. 비렌데."
비렌데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발밑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괜히 모랫바닥을 세게 밟아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은 없다.
엘프의 감각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여태까지도 에린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느껴지는 기척은 없어?"
"글쎄, 이 근처는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없는걸? 조금 멀리에는 전갈 같은 게 지나다니는 거 같아."
"그래? 그럼 그쪽으로 가볼까."
그녀의 말을 믿고 전갈들이 기어 다닌다는 쪽으로 다 같이 이동했다. 하지만 그녀의 감이 이상해진 걸까. 막상 이동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갈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없는데?"
"이상하다. 분명히 느껴졌었는데."
여태까지 에린델의 감각이 틀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그래서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주변 생물들이 피하는 느낌. 기분탓이면 좋을 텐데.
하지만 여태까지 25년 인생을 살아온 결과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했었다. 꼭 아니었으면 하는 순간마다.
"느낌이 싸한데? 그냥 넘어가면 안될 거 같아. 모두들 잠시 나랑 떨어져 있어 봐."
나를 제외한 동료들이 나와 거리를 두고 멀찍히 섰다. 그걸 확인한 나는 바로 마법을 펼쳤다.
"어스 브레이크 (Earth Brake)"
땅을 폭발 시켜 뒤집어버리는 중급 마법. 어스 브레이크로 동료들과는 반대쪽 바닥을 갈라버린 후 이어서 연계로 마법을 펼쳤다.
"파이어 랜스 (Fire Lance)"
갈라진 바닥에 있는 힘껏 파이어 랜스를 박아넣었다. 바닥에 뭔가 있을 것만 같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에.
콰쾅!
갈라진 바닥의 틈에서 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파이어랜스가 무언가와 부딪혔다. 갈라진 바닥은 기껏해야 2~3m 남짓. 그냥 더 밑의 바닥과 파이어랜스가 만나 터진 것이길 바랬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이세계에서 처음 만나는 초대형 몬스터가 등장했다. 세 갈래로 갈라진 입. 입안에는 수많은 이빨이 나 있었고 아직 머리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인간의 수십 배 이상으로 컸다.
만날 걸 예상 하고 있었음에도 그 엄청난 위용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까 말한 계획대로 가자!"
다들 샌드웜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했으나, 내 말에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시작했다.
세키돌은 샌드웜의 몸통부분을 때리고 시선을 끌어 도망갔고, 에린델은 엄호사격을 하면서 샌드웜의 움직임을 최대한 늦추려 노력했다. 물론 비렌데의 신체능력 강화 버프들이 걸어진 후의 움직임이었다.
동료들이 벌어준 시간에 나도 집중을 시작한다. 강렬한 마나 아지랑이의 요동을 느끼고 고위급 마법을 시전했다.
"헬 플레어 (Hell Flare)"
마치 지옥의 불길을 가져온 듯한 검붉은 화염의 기둥이 샌드웜의 머리를 향해 발사됐다.
샌드웜의 속성은 당연하게도 대지일 것이고, 거기다 약점은 당연히 머리 부분이다. 몸통은 엄청나게 단단한 껍질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세키돌!"
세키돌이 내 말에 맞춰서 내 쪽으로 샌드웜의 머리를 돌렸다. 멈춰선 세키돌을 향해 입을 벌린 샌드웜.
타이밍은 정확했다. 헬 플레어의 불길이 정확히 샌드웜의 벌린 입을 향했다. 하지만 샌드웜은 벌렸던 입을 갑자기 닫고 머리를 돌렸다.
헬 플레어의 불길은 머리에는 명중했으나, 샌드웜의 단단한 껍질을 뚫지는 못했다. 그을린 상처 정도만 냈을 뿐.
"젠장! 갑자기 입을 닫는다고?"
샌드웜은 뜨거운 불길 때문에 화가 난 듯. 난폭하게 머리를 흔들어 세키돌에게 부딪혔고, 세키돌은 충격을 받고 크게 날아갔다.
"아윽!"
"세키돌!!"
태그를 사용하지 않고 속전속결을 보려 했으나 실패였다. 역시 바로 태그를 썼어야 했나. 후회가 들었지만 후회할 겨를도 없다. 태그력은 충분하다. 바로 태그를 쓴다.
"[tag : silme]"
어떤 형체를 가졌든 바로 슬라임으로 변하게 만드는 태그. 골렘을 상대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샌드웜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 태그력은 충분할 터. 급하게 상태창을 열어본다.
[상세설명
히토미 마스터 히토미에 존재하는 태그를 외치면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어 나타난다.
태그력 140/???]
남은 태그력은 분명히 140. 태그 한 번에 사용되는 태그력은 10이었다. 이곳에서 두 번째로 겪는 태그가 사용되지 않는 상황. 지금으로서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샌드웜은 흥분한 상태로 모래를 가르며 내게 돌진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프로즌 패터 (Frozen Fetter)"
급하게 얼음 족쇄 마법으로 샌드웜의 이동속도를 늦추려고 했다. 하지만 이 생각도 틀렸다. 약간의 느려짐은 있었으나 거대한 샌드웜의 이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디토네이션 (Detonation)"
당황한 나와 달리 에린델은 침착했다. 그녀가 발사한 화살은 샌드웜의 머리에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여러발의 폭탄을 터트린듯한 연쇄 폭발.
샌드웜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힌 것 같진 않지만, 충격은 있었는지 움직임이 멈췄다.
"강단백! 빨리 마무리해줘! 마나집속탄을 날릴 마나를 한 번에 끌어다 쓴거라 나도 더이상은 어려워."
에린델이 무리를해서 벌어준 시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태그가 먹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더 강한 화염 마법을 상상한다?
저 거대한 덩어리를 날려버릴 만한 마법은 뭐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태까지 봐온 판타지 소설과 만화가 한 트럭이다. 내 머릿속에 강한 마법이 없을 리가 없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다. 마치 격렬한 운동 직전의 준비운동처럼.
그래 화염이 안된다면 더 초고온을 꺼내면 되는 것이다. 해결법은 아주 단순했다. 화염보다 더 뜨거운 것이라면 뻔하다. 동료들에게 최대한 물러서라고 한 후 마법을 펼친다.
"볼케이노 (Volcano)"
샌드웜의 바로 아래 땅이 갈라지고 그곳에서 돌과 용암이 튀어나왔다.
용암의 온도는 1,000°C가 넘기도 한다. 쉽게 체감이 가지 않는 엄청난 온도. 바위도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여버리는 게 용암이다. 주변의 모래밭도 용암에 녹아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샌드웜은 곱게 용암에 녹아주지 않았다. 볼케이노가 시전된 직후에 튀어나온 용암에 몸의 일부분이 녹긴 했지만 곧바로 엄청난 속도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볼케이노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았고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샌드웜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샌드웜은 안전을 확보한 후 머리를 내밀어 내 위치를 확인하더니 곧장 내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 이거 좆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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