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멋진 사나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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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의 북부에 위치한 왕성. 미하일과 동행한 덕에 별다른 검문도 없이 쉽게 성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하일에게 경례하는 경비병들. 확실히 군사지부장의 위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왕성 안으로 들어가서 접견홀로 안내받았다. 고급진 가구들과 화려한 미술품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국왕 폐하께선 곧 오실 겁니다."
"알겠네."
안내를 마친 뒤 다시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경비병. 왕좌를 구경할 수 있나 했는데, 아쉽게도 여기서 왕과 만나게 될 모양이다.
"국왕님은 평소에 바쁘지 않으십니까? 저 같은 신참을 만나실 시간이 있는 게 의아하군요."
한참을 기다리다가 지루해져서 미하일에게 말을 걸었다.
"말했다시피 호기심이 강하신 분이지. 특이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에 자네가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아."
"사실 저는 타지에서 와서 국왕님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혹시 연세는 어떻게 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23살이야."
미하일 대신 낭랑한 목소리가 대답해주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윤기 나는 갈색 머리의 미청년에게 인사를 하는 미하일. 아무래도 그가 국왕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젊은 왕의 모습에 나는 내심 놀랐다.
"국왕 폐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강단백이라고 합니다."
나도 미하일을 따라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아. 얘기는 들었어. 고개는 들고.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욘 없어.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허물없는 스타일의 왕이다. 이런 프리한 스타일은 싫어하지 않는다. 첫인상부터 맘에 드는 왕이었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래서 독립된 부대로 활동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자유로운 영혼인지라 명령을 받고는 못살 것 같아서요."
"하하,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래서 목적은 뭐지?"
"마왕군의 패배. 그리고 마왕을 잡는 것 입니다."
내 말을 듣자 온화해 보이던 국왕의 눈빛이 변했다.
"마왕군은 자네의 생각보다 강해. 자네가 마왕을 물리칠 용사라도 된다는 건가?"
"뭐, 신탁을 받거나 한 건 아니지만, 용사가 되고 싶긴 합니다. 실제로 전 강하구요."
"웬만큼 강해선 안될 텐데?"
"옆에 계신 미하일 님도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왕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미하일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인가? 미하일?"
"전력을 다한 대결은 아니었지만, 공격을 한번 허용했습니다. 이상한 능력을 쓰더군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보이는 미하일. 감정표현이 적은 이 중년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보이니 꽤 재미있었다.
"미하일을 한대라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왕국을 통틀어서도 몇 없을 텐데 대단하군."
"확실히 강하셨습니다. 저도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겠죠."
"마법? 미하일에게 마법은 안 통할 텐데?"
아차, 말실수한 모양이다. 국왕은 미하일이 마법보호의 적성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태그의 존재를 쉽게 발설할 수는 없다. 최대한 숨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법은 아니지만, 마법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환술같은 겁니다. 마법 저항과는 상관이 없죠."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국왕이었으나 믿어주는 듯했다.
"그래서 마왕을 어떻게 잡는다는 거지? 그에게는 강력한 사천왕들도 있어."
"당장은 어렵겠죠. 하지만 왕국군에 입대하게 된다면 마족과의 전투 경험을 통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이길 방법을 연구할 겁니다."
"그게 단신으로 가능한가?"
"동료들이 세 명 더 있습니다."
"그들도 자네처럼 강력한가?"
"체술에 있어선 저보다 훨씬 강력한 동료도 있고 치유나 궁술 등 각자의 특기 분야가 있죠. 절 지원해주기에는 충분히 강한 친구들입니다."
국왕은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고민하는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독립적인 권한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사실 마왕군과의 싸움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일손이 모자란 상태지. 자의적으로 우리를 돕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다만, 자네가 성과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바로 해고해야겠지.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기회는 어느 정도 주실 수 있는 겁니까?"
"한번은 정이 없고, 두 번의 전투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바로 그만두는 거로 계약하는 게 어떻겠나? 특별한 대우를 받는 부대가 연패한다면 우리군의 사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이 갈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두 번의 기회면 충분합니다."
나는 이미 현자급의 마법조차 쓸 수 있다는걸 알았기에 전쟁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 내 머릿속엔 써보지 않은 광역마법들이 많다.
"그런데 걱정되는 부분이 있네. 자네가 독립적인 부대로 활동하는 건 좋네. 그런데 자네가 국왕군의 전투에 참여하다 보면 자네의 의도와는 다르게 싸워야 될 경우가 있을걸세. 쉽게 말해 지휘권을 가진 사령관과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그럴땐 어떻게 할 텐가? "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미하일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내 멋대로 싸운다고 해도 대규모의 전투일 경우 사령관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
"확실히 그럴 수 있겠군요. 역시 계급이 있어야 그런 문제가 해결될까요?"
"전투력이 강하다고 해서 갑자기 높은 계급을 줄 수는 없네. 반발도 심할 것이고."
"숨겨진 내 형제라고 하는 건 어떤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실 방탕하셨거든. 숨겨진 자식 하나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폐하,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 과하다고 생각됩니다. 왕실의 위엄에도 문제가"
"하하, 농담이야. 확실히 좀 과한 설정이군."
전쟁에 나서서 내 발언에 무게를 줄 수 있는 방법.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짧지 않았던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전생 자죠."
"뭐라고?"
"뭣이?!"
두 남자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생각보다 매우 놀라는 두 사람.
"어쩐지 기묘한 능력을 쓴다 했더니만."
"사실 과거에도 전생 자가 우리나라에 나타난 적이 있었다고 하지. 그때는 대륙의 정세가 혼란할 때였는데, 그가 라이오넬 왕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고 했어."
"그때는 마왕이 없었나 보군요?"
"몇백 년은 전의 일이고, 마왕은 봉인되어있던 시기였지. 나도 어릴 적 구전된 전설을 들었을 뿐이지만,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알고 있어."
왕의 눈에는 어린 시절 들었던 전설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강단백. 자네가 정말 전생 자가 맞는다면 우리나라를 구할 영웅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다면 제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전쟁에서 제 발언권이 올라갈 수 있겠군요?"
"그건 물론이지. 라이오넬 왕국의 국민이라면 그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램파르드 공국과 지네딘국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왕국 자체가 사라질 뻔했었지. 그런 위기에 전생자가 나타나 나라를 구했다고 해. 혼자서 수십만의 군대를 상대했다고 전해지지."
"그렇다면 제가 전생자인걸 밝혀 주십시오. 전생자의 부대라고 한다면, 여러모로 편해지겠군요."
마지막까지 남겨두고 싶던 카드. 굳이 정체를 밝히고 싶진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생길 문제들을 많이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니까.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럼 언제부터 전선에 나설 생각인가?"
"음,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여러모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악수나 한 번 하지. 전생자를 내 살아생전에 만날 수 있다니 신기하군."
악수를 하며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국왕. 전생자라고 밝히자마자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확실히 전생자는 이 나라에서 먹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루드 군로트 국왕폐하."
"준비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미하일에게 말하게."
그렇게 날 바라보는 눈길이 사뭇 달라진 국왕과 인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미하일도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달라진 게 내심 웃겼지만, 굳이 티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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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내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숙소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외쳤다.
"오오 신나보이네, 잘 된 거야?"
"대장님! 어서 와~"
"주인이 이렇게 텐션 높은 건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확실히 조금 신났다. 계획대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됐으니까. 정체를 밝히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오히려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오랜만에 무야호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야. 계획대로 잘 진행됐어."
"그 어감 이상한 말은 외치지말고 그럼 이제 우린 왕국군 소속이 된 거야?"
"그렇지. 아직 부대 이름은 안정했지만 말이야. 뭐로 하는 게 좋을까?"
"단백이 리더니까, 네가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린델의 말도 맞지만, 이렇다 할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팍하고 떠오르는 게 없네. 추천 좀 부탁해 모두들."
조용히 있던 비렌데가 가장 먼저 아이디어를 냈다.
"어쨌든 마왕을 물리치는 게 목적이니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거잖아?"
"그렇지?"
"대륙평화지원단. 어때?"
"글쎄, 왠지 성녀들로만 구성된 힐러 모임 같은 이름이라 별론데."
마왕을 처치하기 위한 특별 부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 네이밍센스가 아쉽다.
"대장님. 그럼 우린 강하니까 강하단!"
"각하."
"후엥."
귀여웠지만 아쉬운 세키돌의 네이밍센스.
"에린델은 뭐 없어?"
"마왕 암살대?"
"."
확실히 우리 파티원들은 네이밍센스가 아쉬웠다.
"우, 우리한테만 뭐라하지말고 너도 말해봐!"
"음, 단백단. 단백단은 거꾸로 해도 단백단. 오 이거 좋은데?"
하지만 파티원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
그렇게 한참을 회의했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일단 이름을 정하는 건 미루기로 했다. 배가 고프다는 에린델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되어 그만둔 것도 있지만.
아무튼 점심을 먹고 나서 나른한 몸을 의자에 앉혔다.
"아 군대를 두 번 가기는 싫었는데, 또 군인이 돼버렸네."
"무슨말이야? 강단백 이곳에 오기 전에 군인이었어?"
에린델의 질문을 듣고 나니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파티원들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 멀리 동방의 나라에서 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중대 발표를 해도 될까?"
"중대 발표? 뭔데?"
조금 뜸을 들인 뒤, 태연하게 말했다.
"난 사실 다른 세계에서 왔어. 전생 자야."
"뭐?"
"?"
모두의 눈이 물음표 모양으로 변했다. 아침의 두 남자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세 여자.
"확실히 이상한 능력을 쓰긴 했지. 고위 마법을 쓰는 것도 이상했고."
"내 주인이 알고 보니 이세계에서 온 전생자? 저번에 서점에 갔을 때 본 삼류소설에도 안 나올 설정인데?"
"와 이곳 말고도 다른 세계가 있는 거구나, 신기해."
다채로운 반응들은 아주 흥미로웠다.
"놀라는 것도 이해해. 사실 나도 전생이라는 게 진짜 가능한지 몰랐거든. 게다가 나의 경우는 몸만 이동한 것에 가까워서 사실 전이했다는 느낌이고."
"혼란스럽네 . 이 대륙에는 전생자에 대한 전설이 있는 건 알아?"
확실히 오래 산 에린델은 전설에 대해 잘 아는 듯 했다.
"응, 아까 국왕을 만나고 왔을 때 들었어. 전생자라고 말하자마자 대우가 더 좋아지던데."
"그럴만해. 핌베르트 왕국은 과거에 나타났던 전생자덕에 살아남은 나라거든. 원래 같으면 멸망했을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 아무튼 전생자임을 밝히기로 했어. 그래야 내가 전쟁에 나섰을 때 내 말에 힘이 실릴 거 같았거든."
"밝혀서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다만 관심은 많이 받게 되어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인기인의 숙명? 그런 건 오히려 좋아."
"강단백의 성격이면 그것도 피곤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내가 전생자라는 것을 밝혀 다들 혼란스러워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잘됐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좀 과감했던 내 행동을 다들 존중해주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직 정식적으로 임명받진 않았지만, 오늘부터 우린 군인이야. 꼭 불러야 하는 노래가 있어. 날 따라 해줘."
"또 이상한 거 시키려고 그러지?"
"아니라니까. 믿고 따라 해."
에린델의 투덜거림을 받아주지 않고 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멋있는!"
"멋있는."
"사나이."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안 할래. 난 사나이 아니거든."
"주인이 원래 살던 세계의 노래야?"
"응. 거기선 군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강해져. 장거리 행군도 가능하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이라고."
"강해져? 그럼 난 부를래 대장님!"
그렇게 에린델과 비렌데에게는 외면받았지만, 세키돌과의 듀엣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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