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기묘한 모험
* * *
"어서 오세요. 헤르메스 길드 노른지부 입니다."
여느 때처럼 사무적인 말투로 인사해주는 시롬.
"안녕하세요. 시롬씨."
파티원들을 앉아서 기다리게 하고 시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나눈뒤 골렘 사건의 배후에 있던 연금술사의 얘기를 꺼냈다. 데리고 오려고 했으나 사고로 그녀가 사망했다고 이야기했다.
시롬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 아이가 결국."
시롬은 아마 그녀와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눈치를 챈 나는 굳이 더 묻지 않고 화제를 넘기기로 했다. 시롬 또한 자세한 얘기를 더 묻지 않았고 현상금 30골드를 내어주었다.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습니다. 쓸만한 토벌 퀘스트가 있나요?"
실전 전투 경험과 장비를 사기 위해 골드가 필요하다.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아시다시피 노른은 비교적 평화로운 곳이어서 강한마물이 자주 나타나지는 않아요. 아."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멈추는 시롬.
"며칠 전에 수상한 일이 있어서 조사가 필요한 사건이 있긴 하네요. 골렘 때문에 마을이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일손도 바쁘고 아직 조사되지 않고 있어요."
기타 퀘스트 게시판 쪽으로 가보라며 손짓하는 시롬.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게시판을 읽어보는 기분이다.
처음 봤을 때 다소 충격적이었던 비밀 친구 게시판을 건너 토벌 게시판을 슬쩍 쳐다봤다. 등급이 높은 퀘스트가 없는 걸 확인한 후 가장 끝에 기타 퀘스트 게시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필요 모험가 등급 : 상관없음. 위험도 높음. 주의 바람.
모험가 여러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노른 평야 북쪽과 마녀의 숲 남쪽 사이를 지나가는 모험가들이 주로 사라졌으며 동행한 모험가 중 귀환자는 있으나 제정신이 아니라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합니다. 마물에 의한 사고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보상 : 40G ]
모험가들의 실종. 거기다가 자세한 정보가 없다라. 뭔가 냄새가 난다. 쉽지 않은 일의 느낌. 하지만 나는 어려울수록 더 불타오르는 남자다.
게다가 토벌도 아닌 조사일뿐인데 40G 라니 상당히 높은 보상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간단한 약도가 그려진 퀘스트 용지를 집었다.
그리고 탁자에 앉아서 파티원들과 퀘스트 용지를 같이 살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사만 하고 40골드면 엄청난 거 같은데?"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까 보수가 높은 거겠지. 누난 무서워~"
흥미 있어 보이는 에린델에 비해 조금 엄살을 부리는 비렌데.
"재밌는 일이면 좋겠다. 세키돌은 치고받고 싸우는 게 좋아!"
우리 인형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재미 없는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실전 전투경험이 필요하지만 너무 까다로운 일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대화해보니 비렌데도 하기 싫은 건 아니었고 그냥 조금 걱정될 뿐이라고 했다. 믿어 달라며 그녀를 설득하고 이 퀘스트를 수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탁자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골렘을 슬라임으로 만들어버리더니 순식간에 없앴다는 사람이 저 사람이야?"
"그래. 그전에 광장에서 선테인을 날려버린 것도 저 사람이야."
"선테인을 ? 대단하네.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강하지 않았나?"
최근에 이것저것 하고 다니는 것들이 이 작은 마을에선 꽤 눈에 튀는 행동이었나보다.
벌써 소문이 나서 다른 모험가들도 날 알아보기 시작했다.
신기한 기분이다. 이런 게 유명해진다는 건가?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아무튼 이 퀘스트를 하기로 결정했으니 미루지 않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퀘스트 용지에 나온 지도로 봤을 때 연금술사가 살던 산에 가던 거리보다 훨씬 멀었다. 걸어간다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
"비렌데 혹시 저번에 걸어줬던 마법 말고 걸음 자체가 빨라지는 마법도 가능해?"
"물론이지."
속도가 빨라지는 마법 정도는 나도 상상할 수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아끼기로 했다.
"헤이스트(Heist)"
비렌데가 우리 파티 모두에게 헤이스트를 시전했고 걸음걸이가 몇 배는 빨라졌다.
"오! 비렌데 언니 이거 신기해요!"
이동속도가 빨라져서 신난 세키돌이 이리저리 방방 뛰면서 좋아했다.
"나 저 언니라는 호칭이 적응이 안 돼."
"그렇네. 세키돌은 만들어진 지 1년 정도니 이제 두 살? 완전 아가잖아. 그렇다면 이모라고 불러야 되는 게 맞 컥!"
비렌데를 놀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칼같은 반응속도의 엘보에 말을 끝까지 할 수도 없었다.
****
이동속도가 빨라진 덕에 거리에 비해 빠르게 목표 위치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평야를 한참동안이나 달려왔는데도 잡다한 마물이나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던 건 의아했다.
마을 근처에는 분명히 몬스터가 꽤 있었는데, 평야 북부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하리만치 아무것도 없었다.
"조심해.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불쾌한 감각이야."
기척에 예민한 에린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에린델의 말 때문에 더 조심스레 이동하기 시작했다. 듣고 보니 뭔가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창문을 열고 자려고 할 때 새어 들어오는 찬바람이 머릿속으로 직격하는 듯한 서늘한 느낌.
그 서늘한 느낌이 강렬해져서 머리가 시리다는 착각이 들 때, 모래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모래가 옅어지자 시야가 넓어지며 역겨운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단 같은 곳 위에서 사람이 사람의 팔과 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우욱."
비위가 약한 에린델은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나와 다른 파티원들도 끔찍한 광경에 굳어버렸다.
모래바람이 다 사라지고 자세히 보니 그것의 얼굴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었고 목도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게다가 몸뚱아리는 거대한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박쥐와 유사한 날개까지 달려있었다.
"만티코어 만티코어가 여기 왜."
비렌데가 경악했다.
만티코어(Manticore)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인육을 좋아하고 잔혹하며 식탐이 아주 강하다는 환상종.
하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내가 여태까지 매체에서 접했던 이미지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몬스터였다.
외관부터 혐오스러웠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소름 돋았다.
강한 적이라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마법으로 선제공격을 하면서 사용할 태그를 떠올렸다.
"파이어 버스트! (Fire Burst)"
그러나 만티코어는 바로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화염 폭발을 가볍게 피하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사라졌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 하지만 그것보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게 의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덮쳐올 법한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문은 금세 풀렸다.
만티코어의 괴상한 소리를 듣고 몰려든 건지 수많은 키메라(Chimera)들이 몰려와 우리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굳이 고생 안 하고 동료를 이용해 쉽게 잡겠다는 건가. 영리하군.'
사자의 머리에 염소의 몸통 그리고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전통적인 키메라에서 코뿔소의 뿔 같은 것을 달고 있는 키메라까지 다양한 모양의 키메라들이 있었다.
비렌데에게 빨려댄 덕분에 태그력은 꽤 있었으나 싸움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다.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 아니라면 최대한 태그를 덜 쓰면서 싸워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원형으로 둘러싸일 경우에 피해 없이 싸우기는 매우 어렵다. 나는 상황 판단을 마치자마자 주변의 큰 바위를 등지기로 했다.
헤이스트의 힘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은 뒤 파티원들에게 역할을 분배했다.
"긴장하지 말고 훈련했던 대로 가자. 비렌데는 지원. 에린델은 비렌데 옆에서 엄호 사격을 해주고 세키돌은 정면에서 닥치는 대로 날려버려 줘."
"알겠어."
"응.'
"나만 믿어. 대장님."
맨 앞이 세키돌, 가운데에 나와 에린델, 가장 후방이 비렌데가 위치한 형태의 진형으로 키메라들에게 맞서기로 했다.
세키돌이 든든하지만, 그녀가 탱커로서의 역할을 전부 수행하기에는 갑옷 같은 장비가 허술하다. 건틀릿이 크고 튼튼하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다.
"파이어 월 (Fire Wall)"
최근 마나 호흡법을 꽤 연습했다. 최대한 주변이 마나를 느끼며 그것들을 활용하려 노력했다. 덕분에 내 생각보다 더 큰 불의 장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키메라들은 세키돌을 공격하기 위해서 불에 온몸을 태우면서 들어와야 했다.
"하압!"
불의 장벽이 있는데도 상관없이 돌진하던 키메라가 세키돌의 주먹질에 나가떨어졌다. 역시 어마어마한 파괴력. 우리 파티에서 가장 조그마한 주제에 제일 듬직하다.
한 마리가 나가떨어지자 키메라들은 동시에 여러 마리가 달려들었다. 세키돌이 건틀릿으로 하나를 날려버리고 발차키로 하나를 넘어뜨렸지만, 남은 키메라가 나와 에린델을 노렸다.
"매직 스트레이프 (Magic Strafe)"
오랜만에 보는에린델의 활 기술. 마력이 집속된 화살을 여러 발 속사했다.
빠른 속도로 키메라의 머리를 관통하는 화살들. 세키돌이 커버하지 못한 키메라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에린델. 오늘 멋있는데?"
"언제나 강단백만 고생할 순 없잖아. 나도 진심을 보여줄게."
저번의 전투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여서 신경 쓰였던지, 최근 많이 노력한듯했다. 원래도 잠재력은 높아 보였지만 방금의 기술은 깜짝 놀랐다.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사였으니까.
하지만 기뻐할 시간도 잠시. 뒤에 있던 키메라들이 우리가 등진 바위 위로 올라서서 화염을 뿜기 시작했다.
세키돌을 제외한 우리들은 피할 수 있었지만 세키돌은 앞에서 오는 키메라를 상대하느라 피하지 못했다.
"아윽 뜨거워."
키메라의 강렬한 화염에 고통스러워하는 세키돌.
"워터폴! (WaterFall)"
재빨리 물을 끼얹어서 그녀의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비렌데도 치료마법으로 세키돌을 도왔다.
"세키돌! 괜찮아?"
"응. 대장님. 좀 뜨거웠지만 괜찮아!"
에린델은 조금 화난 표정으로 키메라들에게 사정없이 화살을 날렸다.
키에엑
엄청난 속도와 정확성을 가진 화살의 비. 키메라들은 피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남은 키메라의 숫자는 다섯. 마침 모여있었고 이 정도 숫자면 내가 몰래 연습해온 공격 방식을 써보기에 적절하다. 머릿속에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를 그린다.
그리고 실행한다.
"프로즌 패터 (Frozen Fetter)"
키메라들에게 얼음 족쇄를 채워서 이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네 개의 다리가 전부 다 얼어붙은 키메라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샌드백과 마찬가지.
"매직 웨폰 : 소드 (Magic Weapon : sword)"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소환했다. 에린델과 처음 만났을 때 말했던 마검사에 대한 로망을 포기할 수 없어서 몰래 연습했다.
날이 빠진 롱소드를 아직 다른 검으로 바꾸지 않은 이유이다. 웬만한 검보다는 성능이 좋은 마력검을 만들 수 있었기에.
"하아압!"
기합을 넣고 뛰어올라 단숨에 다섯 마리를 크게 베어버린다. 비렌데의 신체 강화 마법이 있기에 가능한 움직임. 마력검은 내 상상대로 길이가 길어지며 한 번에 키메라 다섯 마리를 절단했다.
"대장님. 대단해!"
감탄하는 파티원들. 그녀들의 표정을 보니 몰래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뛰어난 마검사로의 한걸음이 이제 시작되었다. 한껏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키메라들을 많이 잡았는데 마석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메라는 원래 자연 발생하는 몬스터가 아니긴 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합성해내는 몬스터거든."
비렌데 선생님의 해박한 몬스터 지식. 역시 전 마왕군 출신 서큐버스시다. 자연 발생하는 몬스터에게만 마석이 떨어지기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럼 그 자연 발생하는 건 어떤 방식들이야?"
현생에서도 늘 궁금한 부분이긴 했다. 게임이건 소설이건 갑자기 어디서 몬스터들이 생기는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작품은 거의 없었으니까. 나름의 특별한 방식을 가진 소설들도 있었지만.
"몬스터끼리도 번식하는 개체가 있고 마족들이 차원 문으로 소환하는 경우. 이 두 가지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야."
"차원 문으로 소환하는 건 어디에 있던 몬스터를 소환하는 거지?"
"마물들만 서식하는 마계가 있다고 해.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인간에서 서큐버스가 됐던 비렌데기에 마계에 가본 적은 없는듯하다. 아쉬웠다. 마계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싶었는데.
그렇게 전투의 기쁨을 즐기며 잡담을 한 후 휴식하기로 했다. 나는 다친 곳이 없었지만 세키돌이 조금 상처를 입었다. 세키돌이 회복을 받게 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갑자기 키메라들을 부르고 사라졌지만, 만티코어가 언제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경계했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오래 있을 이유는 없다. 목적은 조사였고 굳이 하지 않아야 할 싸움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갑자기 에린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단백. 잠깐만 이리로 와봐."
"무슨 일이야 에린델? 이제 돌아가려고 했었는데."
"잠깐이면 돼. 이쪽으로 와봐. 우리 둘만 좋은 거 하자."
좋은 거라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에린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지만, 몸은 정직했기에 은근히 기대하면서 목소리가 들린 바위 뒤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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