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5. 죄와 벌 (2)
* * *
여명에서 황혼으로.
뒤늦게 벌어진 일을 깨달은 도윤은 거듭 전율했다. 전지와 전능의 편린을 맛본 뒤 자신이 완전한 포로 신세임을 인정해야 했다. 히로인 컬렉션의 초현실적 능력을 접했을 때부터 짐작했던 거지만, 개화기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확실히 눈치는 빠르네. 보통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모를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지금 도윤 군에게 일어난 일이 무얼 시사하는지쯤은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 없겠지?」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낡고 헤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도윤은 문라이트의 홀로그램 속 개화기를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있을 수 없어…….」
「그런데 웬걸,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란 없거든.」
추측하기로 그녀는 제게 최면을 걸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조차 인지하지 못하도록 만든 뒤 제 인격을 대신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넌 본능에 충실한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었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경고라는 점이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암시이자 협박이란 것이다.
「한데, 이제 와서 발을 빼려 하다니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보다 더 뜻을 알기 쉬운 전언이 있을까. 개화기는 경우에 따라서 도윤의 심신을 제 뜻대로 다룰 것이라 일렀다. 나아가 사랑을 좇는답시고 히로인 컬렉션 앱을 포기하려 들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도 알려주었다.
「포식자는 결코 피식자를 사랑하지 않는 법이야. 순애에 대한 환상으로 탐닉의 본성을 외면하는 애송이에겐 다소 극약처방이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 모쪼록 앞으로도 그것을 좇겠답시고 까불 생각이라면 알아둬.」
어깨를 으쓱인 개화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동시에 도윤의 문라이트 홀로그램 속 화상은 그녀가 한 경고를 무시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보여주었다.
「이게 네 운명이 될 테니까.」
도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앞에 보인 광경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차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그리 쉽게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거니와, 중요한 거 이 여자 개화기가 결코 거슬러선 안 될 부류의 존재라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네 누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어?」
사랑한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개화기가 보여준 미래를 떠올린 도윤은 제 애정이 곧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여 진정으로 그녀를 위한다면 여기서 발끈해 그렇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곁을 떠나야 함을 인정했다.
「아니…….」
사실, 도윤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개화기의 말마따나 제 본성은 추악하다. 암만 외모와 재력이 뒷받쳐주더라도 그렇다. 탕아의 내면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타인을 짓밟고 망가트리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쓰레기였다.
「역시 그렇지?」
대저 인생이란 여행길에는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때때로 그것은 꿈이나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풍경을 만끽하는 일이다. 정처 없이 향하는 대로 순간을 즐기거나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도윤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꿈이 없었다. 목표도 없었다. 함께 걷고 싶은 사람은 있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곁에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자각했다. 그렇다고 제가 정처 없이 향하는 대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성격이었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줄곧, 마음속으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비관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개의친 마. 사람에겐 저마다 주어진 역할이라는 게 있는 거거든.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뭇 남성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우두머리 수컷의 삶이겠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어리석고 충동적인 그 순애만 빼면.」
채찍과 당근이었을까. 개화기가 짐짓 기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윤의 삶이 꼭 그렇다고 해서 비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그가 허무함을 달랠 수 있는 방법들을 예로 들었다. 같은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음란하고 또 퇴폐적이며 그릇된 욕망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세상은 넓으니까.」
이렇게나 드넓은 세계다.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야 차고 넘칠 수밖에 없다. 개화기는 그런 이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지 않겠느냐며 은근하게 종용했다. 확실히 도윤의 재력이나 외모라면 얼마든지 제 욕망을 싸지를 수 있을 테니까.
하물며 거기에 히로인 컬렉션까지.
「관심이 있다면 전용기로 세계 유람을 떠나봐. 각국에서 만나는 여인을 네 현지처로 만드는 거야. 처라는 표현이 그렇다면 심심풀이 좆물받이도 좋겠지. 그들의 눈부신 인생을 망가트린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짜릿하지 않아?」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절 기다리며 젊음을 낭비하도록 만드는 건 분명 짜릿했다.
「네겐 고작 하룻밤 끼고 잘 여자에 지나지 않는데, 상대는 그걸 알면서도 널 평생토록 지고지순하게 바라보며 기다리는 거야.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도윤 군에겐 아주 특효약일걸. 그러다 우연히 근처를 지날 때 생각나면 불러서 또 따먹는 맛이 있을 거고.」
텅 빈 마음은 결코 쾌락이나 열락 따위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개화기는 발상을 전환해 보라며 도윤을 충동질했다. 밑이 빠졌다면 그보다 더 압도적인 방수로 해결하면 그만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TV에서 눈여겨본 아이돌을 그룹째 네 노예로 만들 수도 있어. 오직 너만을 위하여 알몸인 채 안무를 추게 만들 수도 있지. 그 천박한 꼴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었다가 비밀스러운 SNS 계정에 옅은 모자이크만 하고 업로드해보는 건 어때?」
한계는 없다.
「아나운서인 암컷을 길들이는 것도 좋지. 매일 아침마다 네게 야한 말을 속삭이면서 모닝콜을 하게끔 시키는 거야. 유선상으로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출근시키는 걸 테고. 당사자 입장에서야 굉장히 번거롭겠지만 네 알 바는 아니니까. 깨는 순간 곧바로 머리채를 붙잡고 볼일도 볼 수 있잖아.」
개화기는 그런 아이돌과 아나운서를 두고 몇 종류의 음담패설을 더 늘어놓았다. 암캐처럼 목줄을 채우고 알몸으로 거리를 배회하게 만드는 산책에 대해서도 논했다.
「길을 걷다 눈에 띈 신도시의 새댁을 그날 밤 바로 따먹을 수도 있어. 가끔 배덕적인 즐거움이 그리우면 부르는 거지. 남편에겐 동창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온 년을 우악스럽게 범하는 거야.」
한편으론 무책임한 사정의 기쁨과 그로부터 비롯될 탁란이 주는 만족감도 이야기했다.
「채널을 돌리다 나온 여배우가 마음에 든다면 말만 해. 그날부터 바로 네 좆집이 될 테니까. 화장한 얼굴 위로 진한 좆물을 싸지르고 펴바르게 해서 일정을 소화하게 하는 것도 좋겠지. 감히 억만장자의 좆집에게 토를 달겠어?」
셀럽과 인플루언서의 뒷배가 되어주며 받는 성상납. 모델인 여성에게 가구 역할을 맡겨서 집안을 살아있는 가구로 장식하는 취미. 뺨을 때리거나 걷어차면서 화풀이 용도로 행사하는 폭력의 개운함.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그런 걸 올려도 재밌을 거야. 따먹은 년마다 신분증 따윌 곁들여 사진을 찍는 거지. 일상에서의 모습도 첨부해서 대비한다면 금상첨화겠어. 그걸로 명예의 전당이라던가 순위를 세워도 재밌을 거고.」
마치 도착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듯.
「그걸로 도윤 군만의 암컷, 좆집, 그리고 좆물받이 서열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참고가 될진 모르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입에 좆물을 잔뜩 싸질러놓고 온종일 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게 좋더라.」
오히려 갈수록 흥분한 듯 폭주했다.
「게다가 넌 자지도 크니까 포르노처럼 질펀하게 노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아마 다섯 명이서 다 함께 달라붙어도 충분히 빨 수 있을 걸?」
반복하면 지루할 수 있으니 뒤에서 핥아줄 년도 잊지 말라고 덧붙였다.
「매너리즘을 경계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 원한다면 이런 힘도 네게 줄 수 있단 걸 기억해.」
그런 뒤엔 문라이트, 그 스마트폰에 히로인 컬렉션 앱을 빼고도 얼마나 많은 애플리케이션이 담길 수 있는지도 보여주었다.
당장 개화기가 절 협박하는데 썼던 최면용 마인드 컨트롤 앱.
그와 함께 병용하여 상승효과를 내는 세뇌용 브레인 워셔 앱.
타인을 잠식하듯 점진적으로 조교하는데 쓰는 예속용 서브미시브 앱.
마음에 드는 상대를 제 취향껏 꾸며서 갖고 놀 수 있는 피그말리온 앱.
비슷한 용도로 쓰이지만 보다 천박하고 음란한 방향으로 차별화된 슬럿 메이커 앱.
현실을 떠나 꿈속에서의 신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인큐버스 앱.
「또 성별을 바꿀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앱이라던가, 누군가의 연인을 빼앗는 것에 좀 더 특화된 앱도 있지. 근데 이건 아직 개발 중이라 이름을 못 정했네. 나중에 출시하면 알려줄게.」
수많은 성벽만큼이나 그것을 충족시킬 앱이 존재했다. 도윤은 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목록에 말없이 전율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연출이 자신에게 간택 받은 것은 축복이며, 그런 만큼 대드는 일이 없길 바란단 개화기의 함의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당신이 말하고 싶은 건 이건가?」
고고하고 아리따운 스튜어디스 홍은하를 길들여라.
냉담하고 도도한 변호사 애슐리 이브를 짓밟아라.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바리스타 최이나를 유린해라.
그리고 또 그 밖에 많은 여인들을 모욕하고 업신여겨라. 그리하여 스스로가 구제불능의 탕아이자 쓰레기임을 인정하고 쾌락으로 점철된 삶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라.
「하지만 개화기, 설령 네 말대로 내가 쓰레기라곤 해도 바보는 아니야.」
「ㅋㅋ?」
「다른 앱 같은 건 필요 없어. 실수를 범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까. 그러니 네가 바라던 것처럼 히로인 컬렉션을 짊어지겠다. 말마따나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얼마든지 이 추악한 본성쯤은 긍정해 주겠어.」
도윤이 천천히 제 눈을 감았다. 계속 이렇게 뜨고 있다간 어쩐지 눈가가 그렁그렁해질 것 같아서였다.
「대신에,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들어보고 결정하지.」
한순간의 충동이었으며 실수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나의 잘못, 우리의 계약, 그리고 네가 관여한 그 모든 앱에서 한 사람만큼은 예외야.」
이것은 죄였다. 어리석은 방탕자의 그릇된 욕망이 불러온 참사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나 누나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래서 도윤은 허무하게만 느껴졌던 인생 속 한줄기 서광, 그 따스한 빛줄기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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