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5. 죄와 벌 (1)
* * *
인간은 누구나 경청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그것은 마치 성사와도 같았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개화기에게 도윤은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전부 내뱉었다. 한평생 누군가를 믿어본 적 없던 그는 이런 식의 고해에 익숙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스티븐이 나에게 그랬어.」
「……?」
「너는 내가 제 어머니를 빼앗은 악당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제 사랑을 쟁취한 주인공일 뿐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로한 부호는 그럼에도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어머니라도 세월을 피할 수는 없었으니, 그가 쫓은 것은 분명 젊음이나 미색이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도 추억이나 아집이었다.
「나는 그자가 어머니를 선택한 이유가 제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일이라 생각했었어. 과거에 실연당했던 여자로부터 다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제 삶과 자아를 완벽한 것으로 매듭짓고 싶은 욕망이 아닌가 싶었어.」
단순히 기분적인 문제를 넘어서 거부감을 드러냈던 건 그래서였다. 당시의 도윤은 아직 어린 나이였고, 가장 보살핌받아야 할 성장기를 괴롭게 보낸 소년이었다. 아버지의 병사나 어머니가 한 재혼 따위로 말이다.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그런데?」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 세상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꽃밭이 아니야. 시련이란 이름의 수풀이 뒤엉킨 정글이지.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에 필요한 건 꼭 사랑만이 아니야. 의리나 책임감이 될 수도 있어.」
아직도 그의 마음 한편에선 말한다. 대부호가 간직했을 순애를 믿고 싶지 않다고, 내 어머니는 그저 녀석에게 놀아났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바람일 뿐이다. 이상적인 가족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맘에 그들의 의지를 곡해하는 일일 뿐이다.
스티븐 모리스는 제 어머니에게 진심이었다. 거기에 사랑이란 이름을 덧붙이든, 의리나 책임감이란 이름을 덧붙이든 그랬다.
「개화기, 나도 너처럼 스티븐이 싫어. 말마따나 그는 단지 제 사랑을 쟁취했을 뿐인데도 그래. 하지만 사랑인지, 아니면 의리인지, 혹은 책임인지. 뭐가 됐든 어머니를 향한 그 마음만큼은 진실로 존경스러워.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닮고 싶어.」
물론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도윤은 이해하기에 용서한 게 아니었고, 용서하기에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성숙한 제 사고에 빗대어 부호의 진심을 느꼈고,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어 미워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네가 왜 이런 힘을 준 건지 나는 몰라. 하지만 스티븐조차도 떨칠 수 있었던 쾌락의 미혹이잖아. 나란다고 떨치지 못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건 필요 없어. 저 안에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론 그녀를 위해서 살아갈 거야.」
도윤이 사뭇 후련함을 느꼈다. 마치 알싸하고 향기로운 박하사탕을 머금은 것처럼, 그는 지금 이 순간 저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방랑을 끝내고 돌아온 탕아나 본능의 유혹을 물리치고 열반에 든 성인처럼 저 또한 그렇다고 느꼈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개화기는 웃었다.
「아, 진짜 간만에 크게 웃었네.」
진솔한 도윤의 고해가 무색하게도 그가 내뱉은 말을 무슨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로 받아들였다. 당혹한 그의 얼굴이 굳고, 머잖아 낯빛이 어두워졌는데도 개의치 않은 채 그렇게 한참을 깔깔거렸다.
「뭐가, 그리 웃기지?」
도윤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물었다. 어린 나이에 사회로 내던지면서 온갖 것을 경험한 그였지만, 이런 식으로 제 진심을 부정당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물며 생계를 위해 나간 술집의 서빙 일을 할 때 만난 진상조차 이렇진 않았다.
그만큼 지금 개화기의 태도는 서글서글하고 성격 좋은 그마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한 삶을 살고 싶다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마음을 얻길 바란다며? 반반한 스튜어디스 꼬셔서 따먹을 땐 언제고, 이젠 사랑을 좇겠답시고 그녀는 나 몰라라 하는 거야?」
「…….」
미소 어린 입가를 가린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잔의 샴페인은 넘실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굉소의 이유는 있었다.
「정말이지 이기적이군. 물론 그런 양아치 같은 남자 좋아해. 그런데 제가 뭔 대단한 유혹이라도 떨친 양 으쓱이는 꼴만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아니야! 내 말은 그저…….」
「최이나라고 했던가? 확실히 꼴리는 암컷이었지. 미용과 건강을 둘 다 놓치지 않고 관리하는 몸이니까. 얼굴은 뭐 남자들이 껌뻑 죽을 만큼 곱고.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먹음직스러운 년이라고 생각해.」
직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천박한 말을 입에 담은 그녀가 화제를 이었다.
「무엇보다, 밤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기만 하면 뭘 시키든 고분고분 따를 거라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야.」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런데 괜찮아? 간밤의 정사를 보니 영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던데. 체질에도 안 맞게 로맨스 흉내 내느라 피곤한 거 아니야? 자극적인 포르노가 취향인 주제에 간질간질한 짓이나 해대며 본성을 숨기니까 그렇지.」
「개화기!」
도윤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나 개화기는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오히려 똑똑히 알아두라는 듯 일갈했다. 소리 아닌 글자로 전달받았는데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위선에 진절머리를 내는 성격이었고, 자신은 역겨운 위선자로 그에 해당했다.
「우도윤, 넌 그냥 잘생기고 능력 있는 강간범일 뿐이야. 타인의 불행으로 쾌감을 느끼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너는 사디스트이자 도미넌트이며 디그레이더야. 그러니까 사랑 같은 헛소리는 제발 집어치워.」
「웃기지 마.」
「내가 왜 널 골랐는 줄 알아? 이걸 가장 재밌게 사용할 사람이 바로 너였기 때문이야.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곪은 그런 남자. 애정결핍에 시달리다 끝내는 이상한 쪽으로 뒤틀릴 운명인 녀석. 진짜 자극적인 포르노란 그러한 군상에게서 비롯되는 법이거든.」
화면 속의 개화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도윤의 스마트폰에서 어떤 프로그램 하나가 실행됐다. 오라클 일루전이란 이름의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지금껏 그가 봐왔던 홀로그램과 달리 실재하지 않는 환상을 마치 현실처럼 겪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오라클 일루전은 네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새벽녘의 베란다에서 뜻하지 않은 환상이 눈앞에 일렁거렸다. 홀로그램 속 글자가 전하는 말에 따라 생생히, 그 자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가 들리고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봐, 그 홍은하란 여자 말이야.」
처음에는 은하였다. 스타게이트 사의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 승무원이었다. 단정한 머리와 제복 차림을 갖춘 그녀는 발군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녀를 불문하고 선망할 외모의 첫 번째 히로인을 도윤은 원했다.
「발칙할 정도로 큰 엉덩이를 잡고 신나게 뒤치기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 도도한 년 자궁에 무책임하게 싸지르는 건 남자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환희 중 하나잖아. 단정한 제복을 더럽히고 깨닫게 해주는 거야. 네 커리어는 어디까지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개화기가 한 그 말처럼, 욕망을 쏟아내고픈 충동을 느꼈다.
「애슐리 이브? 유부녀라는 단어가 주는 마력은 언제나 훌륭하지. 다 큰 딸을 둔 여자를 꼴사납게 임신시키는 것도 재밌을 거야. 건방진 암컷에게 주제를 깨닫게 하고, 심심할 때마다 불러서 따먹는 거 진짜 꼴리지 않아?」
다음으론 애슐리였다. 스티븐의 직속 변호사 겸 모리스 컴퍼니 법무팀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개화기는 이런 쪽의 미학에 밝은 듯, 우아한 그녀의 미색을 천박한 정욕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어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게 벗겨놓고, 제 위치도 망각한 채 주인을 도발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 뺨을 때리고 목을 졸라도 맛있게 따먹어주세요, 하고 비는 마조히스트로 만들어줘. 종국에는 제 딸까지도 넙죽 바치게 말이야.」
도윤이 제 앞에서 아른거리는 환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오라클 일루전이 보여주는 환상이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곳에는 윤리나 도덕 같은 굴레가 없었다. 오로지 비열한 능욕의 쾌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종적 모멸감을 주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야. 금발에 벽안을 가진 백인 상류층 여성이 동양인 남성 발아래에서 깔개나 좆집 취급받는 것도 동하는 구석이 있거든.」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야. 성욕에 얽매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삶이야.」
「봐, 그런 게 꼴린다는 걸 부정하진 않잖아.」
부정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개화기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으니까. 도윤은 제 자극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의 비극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껏 그 사실을 부정하긴 했어도, 그러한 성향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널 택한 이유야. 너의 가엾고 음습한 상상력이 빚어낼 순간이 나에겐 훌륭한 포르노가 되니까.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내가 모리스의 끄나풀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도 있지. 암만 계부라지만 세상의 어떤 아비가 제 자식을 그런 처지로 전락하게 놔두겠어?」
끝내는 드러나게끔 되어있는 본색이었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정신 차려. 위선은 그만 떨고 그냥 스스로를 받아들여. 네가 가진 외모와 재력만으로도 누릴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내 힘까지 더해줬잖아. 판을 깔아줬으니 감사한 줄 알아야지.」
퍽! 격노한 도윤이 손에 쥔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고도 부서지거나 파편이 튀기는커녕,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그것을 격정적으로 짓밟았다. 그런 뒤에도 멀쩡한 문라이트의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나도 알아! 네가 준 앱을 쓰면서부터 나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지났단 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답이 있는데 계속 돌아가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난 이나 누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러니까 그녀와 함께 늙으며 살아갈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네가 준 것 따윈 얼마든지 이렇게 버릴 수 있어!”
빽빽한 베란다의 창문을 힘껏 열었다. 저 바깥에 차들이 지나는 도로로 스마트폰 문라이트를 힘껏 던졌다. 뒤늦게 방에서 잠들었을 이나가 깰까 싶어 감정을 추슬렀고, 눈을 감은 채 미간을 몇 번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개안했을 땐, 일몰이었다.
“……?”
장소도 어느덧 이나의 아파트에서 제집으로 바뀌어있었다. 복장은 아까와 달리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분명히 내동댕이쳤던 스마트폰 문라이트가 쥐어져 있었다. 또한 그로부터 비롯된 홀로그램 속에는 최면이나 세뇌 따위의 이름이 붙은 앱이 실행되는 중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배경, 다른 복장을 한 저 개화기의 모습과 함께.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당황한 도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밖에 저물어가는 해와 스마트폰 속 디지털시계,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단서를 종합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다다라 몸을 떨었다.
「안타깝게도, 도윤 군.」
「……최면?」
「넌 벗어날 수 없어.」
그리고 개화기는 씩 미소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