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컬렉션-25화 (25/28)

〈 25화 〉 4. 타락은 아직 이르다 (完)

* * *

새벽이었다.

검푸른 달빛이 창가에 내걸린 시각이었다. 침대 옆 서랍장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돌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세기가 어찌나 심했는지, 간밤의 정사로 곤히 잠든 두 사람을 깨울 정도였다. 그것도 한 사람은 뒤척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눈을 뜨게 했을 만큼.

“우음, 도윤아……?”

이나가 잠결에 몸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러다 곧 비몽사몽한 신음과 함께 제 남자를 찾았다. 베개처럼 포근하니 절 감싼 도윤의 팔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려는 기색을 느꼈다.

“좀 더 자요, 누나.”

“무슨 전화야?”

“국제전화인 걸 보니 계부인 것 같아요.”

서울의 새벽은 곧 뉴욕의 낮이다. 시차가 무려 13시간이나 된단 점을 고려하면 이 시간에 전화가 오더라도 이상하진 않다. 더욱이 도윤의 말에 따르면 상대는 돈밖에 모르는 계부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배려를 기대하는 게 힘들 수도 있겠지. 그래서 어렵지 않게 상황을 납득한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옆에서 통화해도 돼.”

“그럴 순 없죠. 잠깐 베란다에 다녀올게요.”

나이는 한참 연하면서 듬직한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남자가 어디 있을까. 이나에게 있어 도윤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님이었다. 잘생긴 외모도 외모지만, 그 무엇보다 절 소중하게 여겨주니까.

“도윤아.”

“네, 누나.”

“사랑해…….”

낯간지럽던 사랑의 고백조차 이제는 별 부끄럼 없이 해낼 수 있었다. 거야의 관계 덕분이었으리라. 나눌수록 두터워지는 교분처럼 애정 또한 그러한 법이었으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진 이나가 손에 잡힌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걸로나마 연인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저도요.”

그리고 도윤은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고 푹 자요. 금방 돌아올게요.”

“응…….”

이나가 이내 새근새근 잠들었다. 과로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시달린 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본 도윤이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잽싸게 챙긴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아직도 그것이 진동하는 이유에 미간을 좁혔다.

「반갑습니다, 우도윤 님.」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 ‘Moonlight’입니다.」

이제야 밝히는 사실이지만 진동은 계부의 전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녔다. 제 스마트폰에 담긴 어떤 알고리즘 때문이었다.

「접선 요청 신호가 수신되었습니다.」

「본 신호는 연결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뜬 화면과 자판, 그러나 실행된 건 히로인 컬렉션 앱이 아니었다. 도윤이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어떤 양방향 통신 프로그램이었다. 짐작하건대 원래부터 내장되었거나, 아님 일전의 제 요청으로 설치된 것 같았다.

「연결하시겠습니까?」

베란다로 나온 도윤이 수락을 눌렀다. 굳이 멀쩡한 전화나 메신저를 두고 새 앱을 실행한 이유가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더는 이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에게 히로인 컬렉션이란 앱은 그저 미혹일 뿐이니까.

「연결 중입니다…….」

특정인에게만 보이는 홀로그램, 놀라울 정도의 지성을 갖춘 강인공지능,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는 정보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까지.

현대 기술로는 도저히 구현이 불가능한 물건을 만들어낸 제작자였다. 그럴 의향만 있다면 능히 세상을 쥐락펴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윤은 몹시 궁금했다. 그만한 인물이 왜 하필 저처럼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이 힘을 쥐여줬는지.

‘그러고 보니, 여성이라고 했던가.’

인종은 동양인이라고 했다. 연령은 일흔을 앞둔 스티븐보다도 많다고 했다. 노인은 보통 기계에 무지하단 인상이 있는데, 그녀는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종단 간 암호화 기술로 적용된 프로그램을 돌리는 것만 봐도 상당한 보안 전문가임이 분명하니까.

「연결되었습니다.」

「통신을 시작합니다.」

잠시 후, 프로그램 정중앙에서 어떤 영상이 떠올랐다. 호화로운 실내 속 의자에 관능적인 자태로 앉아있는 여성이었다. 복장은 감색 실크 네글리제였다. 한 손에는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자그마한 쿼티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얼굴은 교묘하게도 입술까지만을 비췄다. 머리는 염색인지 모를 금발이 풍성하게 늘어져 눈에 띄었다. 묘령이었다. 고화질로 된 송출 영상은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손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잘 관리한 여성의 미색은 중년까지도 간다지만, 아무리 봐도 모리스보다 연상은 아니었다.

「답변이 좀 늦었네.」

영상 속 제작자가 쿼티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드렸다. 그리고 잇따라 도윤의 스마트폰 홀로그램에선 글자가 떠올랐다. 고작 한 손 엄지만으로 친 타자인데 상당한 속도였다.

「접선을 요청했던데, 도윤 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히로인 컬렉션의 제작자는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야 이렇게나 상식을 초월한 물건의 제작자니까. 한낱 인공지능조차도 아는 이용자의 신상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불쾌한 건 불쾌한 거지…….’

도윤은 타인의 뜻대로 좌우되는 인생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유를 원했다. 제 마음이 향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을 꿈꿨다. 이나와의 사랑을 얻기 전, 쾌락을 추종하려 한 것 또한 그래서였다.

「당신이 제작자인가?」

허공의 자판을 두드린 도윤이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답변은 째깍 돌아왔다.

「덕분에 잠을 설쳤어.」

너에 대해선 뭐든 안다는 태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를 통한 기선제압의 의도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심기가 불편한 것만은 확실했다. 저도 모르게 쏘아붙이고 말았으니까.

「이거 미안한걸? 도윤 군의 체력을 생각하면 이 시간까지도 깨어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지?」

「있잖아, 굳이 힘들게 타자 두드릴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냥 편히 말로 해. 그렇게 해도 글자로 치환되게 만들어놨으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이나 양이 보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거 아냐.」

제작자가 샴페인 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기품 어린 몸짓이 몹시 우아했다. 졸부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여유가 엿보였다. 재벌보다도 더 귀족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아무튼 태생부터 기득권에 몸담은 자 같았다.

「없는 기능이 없군.」

도윤이 말했다. 그러자 홀로그램 속 화면에 제가 내뱉은 말이 고스란히 글자로 적혀 나왔다. 기계 학습 따위가 대세인 요즘에는 놀랄 것도 없는 기술이지만,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발음에서 나오는 오인이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물건이 상용화됐다는 얘기는 추호도 들어본 적이 없어.」

이런 자그마한 부분에서조차 온갖 기업이 탐을 낼 기술력이 드러냈다. 도윤이 새삼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스티븐 모리스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뜰 것이다. 그와 연관이 없다는 여기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는다면 말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지?」

「글쎄, 참으로 많은 걸 함축한 물음이네.」

「……?」

「궁금한 게 많은 거 이해해. 그러니 가능하면 하나씩 차근차근 답해줄게. 보시다시피 난 착하고 친절한 여자거든.」

우습지도 않은 헛소리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느 정도 반발심 어린 선입견을 지우는 효과도 있었다. 지금에야 제게 필요 없는 앱이라지만, 은하와의 인연은 분명 히로인 컬렉션 없인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처음엔 절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여서 언짢았지만, 이어진 살가운 태도는 도윤의 차가운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참고로, 아까 체력 운운한 건 그거야. 이나 양과 밤새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일찍 잠든 걸 보면 아무래도 궁합이 잘 안 맞았나 보네. 하긴 뭐, 숫처녀가 밤일에 능숙하면 일단 거짓말은 아닌지부터 의심하고 봐야겠지만.」

「내 여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역시, 수컷은 그런 맛이 있어야지. 나도 그런 남자 아주 좋아해.」

정말이지 넉살스러운 태도였다. 도윤으로선 더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 질문은?」

「이름이 뭐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돼?」

「그냥 제작자라고 불러도 돼.」

「문라이트는 당신을 스티븐 모리스보다 더 연상인 동양인 여성이라고 표기했어. 그런데 여기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정반대고, 나이는커녕 인종조차도 다른 것 같아. 이런 마당에 호칭까지 숨기는 당신을 내가 뭘 믿고 물어보란 말이야?」

제작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곰곰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이내 다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난 별명이 많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 친구들은 개화기라고 불러.」

「개화기?」

「정확하게는 그와 비슷한 말인데, 뭐…….」

말끝을 흐리는 태도가 분명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려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기만이나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라기보단, 정말 귀찮아하는 기색이 강했다. 또는 익명성을 유지해야만 흥이 깨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겨우 내 이름이나 묻자고 부른 건 아니잖아?」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날 만나자고 한 건 너야. 어설픈 거짓말을 할 바엔 그냥 접선에 응하지 않았겠지. 그 편이 더 속이기엔 쉬울 테니까. 하지만 난 네 부름에 응해주었어. 그러니 믿을지 말지를 내게 묻지는 마. 그건 온전히 네가 선택해야 하는 문제니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개화기의 말마따나 그녀는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사실을 가지고 속였다고 표현하는 것도 우스웠고 말이다.

「좋아,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얼마든지.」

「당신 몇 살이야?」

「숙녀의 나이를 함부로 묻다니.」

「정말 동양인인가?」

「동양인 맞아. 머리는 염색한 거야. 남편이 금발을 좋아하거든. 연애할 때 머리색이어서 그런 건지.」

「…….」

「나이는 좀 헷갈리네. 백세 넘고 나선 안 세봤어. 이만하면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까?」

글엔 말이 주는 어감이 없다. 짧은 글줄로 상대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도윤은 개화기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늘어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종국에는 이해를 포기했다.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녔으니까.

「개화기라고 했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당신이 무언가를 증명해줬으면 해.」

「으흠?」

「자칭 백세인 당신이 모리스의 끄나풀이 아니란 증거를 내게 보여줘.」

화면 속 개화기가 씩 웃었다. 샴페인을 가볍게 한 모금 꼴깍이더니, 어김없이 타자로 답했다.

「대충 알겠네. 행여나 그 부호가 네 삶을 돕는답시고 원치 않는 짓거리를 벌이는 게 아닐까 신경 쓰이나 본데.」

「그래, 난 내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걸 원하지 않아.」

「스티븐 모리스와 난 서로를 싫어해. 원한다면 얼마든지 증명해 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전에 우리 도윤 군의 질문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부터 들어야겠어. 이 답을 내어주고 나면 그 뒤의 대화가 조금 곤란해질 것 같거든.」

본래라면 이외에 다른 질문은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앱을 마음껏 쓸 요량이었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이나와 재회한 뒤, 도윤은 바뀌었다.

그는 제 마음속 텅 빈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감정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쾌락이 아니라 사랑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지, 더 있긴 해.」

「뭔데?」

그리하여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방랑을 끝내고자 했다.

「히로인 컬렉션 앱을 삭제하고 싶어.」

「그건 왜?」

타락하더라도 즐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혈육 하나 없이 남겨진 마당에 달리 가릴 게 또 무얼까 싶었으니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여기며 실수했던 것처럼, 도윤은 아직 빈털터리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도 분명 지킬 건 남아있었다. 그리고 저 침실에 곤히 잠든 연인처럼, 그런 소중한 것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러하리라.

우리를 소중히 만드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다만 아직 느끼지 못했을 뿐이니까.

「타락은 아직 이르니까…….」

그래서 타락은 아직 이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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