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4. 타락은 아직 이르다 (2)
* * *
자동문 너머로 들어선 오락실은 별세계 같았다.
휘황찬란한 아케이드 게임의 효과음이 실내를 쩌렁쩌렁 울렸고, 한쪽에선 에어 하키의 원반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으며, 또 다른 곳에선 코인노래방 칸에서 삐져나온 음색이 찌르르 퍼졌다.
“오락실은 오랜만인걸.”
“네, 그렇게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말이죠.”
“일에 바삐 치어 살아서 그런가 어느샌가 발길이 뚝 끊기지 뭐야.”
“그래도 여긴 아직 그대로네요.”
이나는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처럼 들뜬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락실은 말마따나 아직도 그대로였고, 인터넷에서 몇 번인가 검색을 해보니 이제는 지역에서 유일한 곳이 되어 일종의 데이트 명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컷 놀다가 가자고요.”
“괜히 애들 노는 곳에 끼어드는 거 아닐까?”
“또 그런다. 우리야말로 아직 어른인 척 하는 애들이거든요.”
도윤이 머뭇거리던 이나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넘버링만 바뀌었다 뿐이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는 유명 격투게임 앞으로 가 그녀를 앉혔다. 일찍이 지폐 교환기에서 바꾼 동전을 몇 개 쥐여주고, 자신은 또 맞은편에 앉아서 대전을 준비했다.
“한 판 해요.”
“나 이거 한 지 5년이나 지났어.”
“저도 엇비슷해요.”
졸지에 붙게 된 두 사람이 각자의 캐릭터를 골랐다. 이나는 큼직하니 귀엽게 생긴 곰이었고, 도윤은 도도하니 성깔 있게 생긴 여권사였다. 그대로 3선승을 향해 겨룬 양측이 5판 접전 끝에 한쪽의 승리로 끝맺었다.
“음, 다행히 콤보는 예전이랑 비슷하네.”
“아니! 저 분명히 막았거든요?”
“그래그래, 예나 지금이나 참 알기 쉽다니까.”
“……한 판 더 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처음 접전과 달리 점점 게임에 익숙해진 이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윤을 완전히 갖고 놀았다.
“또 빈틈이네? 10단 콤보 추가!”
“막았다니까!”
“위? 아래?”
“위! 위 맞잖아요! 막았다고요!”
열 판을 내리 지고 말았다. 어느샌가 모인 관중은 이나를 보고서 잘한다며 감탄했고, 도윤을 보고선 못한다고 비웃었다.
“왜 이렇게 잘해요, 누나…….”
재능의 차이였을까. 나중엔 아예 매치가 아니라 한 라운드를 이기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도윤이 넌 옛날에도 이 게임 되게 못했었지?”
“그냥 누나 실력이 미친 것 같은데요.”
복수전을 포기한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나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사내들 몇이 질세라 그녀에게 도전했다. 아무래도 이 오락실의 터줏대감들인 모양이었는데, 그마저도 추풍낙엽이었으니 과연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그만 일어나야겠다.”
“더 안 해요?”
“응, 재밌긴 한데 다른 것도 해보고 싶어.”
“그럼 저 총 쏘는 게임 해봐요.”
줄 선 도전자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이나가 가까운 부스로 들어섰다. 끔찍한 몰골의 좀비가 득시글거리는 게임은 두 사람이 한창 오락실을 드나들던 시절, 곧잘 플레이하곤 했던 시리즈의 최신작이었다.
“우와, 제법 으스스한데.”
“괜히 하자고 했나…….”
“표정이 왜 그래?”
“생각보다 그로테스크해서요.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긴 했나보네요.”
“맞다, 너 무서운 거 싫어했지?”
“좋아하진 않죠.”
“겁도 많긴! 누나만 믿고 따라와!”
동전을 넣은 두 사람이 모험을 시작했다. 모형으로 된 총을 든 이나는 겉모습과 달리 절제된 동작으로 스테이지를 하나씩 클리어해 나갔다. 둘이서 할 땐 적들의 체력이 더 많은 게임이었음에도 능숙한 것이 영락없는 프로게이머였다.
“짜잔, 클리어!”
“신기록이네요.”
“다시 하면 좀 더 단축할 수 있을걸?”
도윤이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피로감이 제법 되는 게임이었는지라 극구 사양이었다. 게다가 공백이 길었던 탓에 실력도 다 녹슬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나의 게임 본능은 여전히 굳건했다.
“웬만하면 다른 거 하죠…….”
“그래, 좋아!”
활짝 웃은 그녀가 다음 게임을 골랐다. 도윤은 진땀을 빼면서도 절 이끄는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걱정거리를 잊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이제야 비로소 제가 알던 최이나다웠다.
“도윤아, 우리 에어 하키 하자!”
“이건 진짜 저도 좀 하거든요?”
“흐응, 그럼 어디 한번 볼까?”
구태여 볼 것도 없는 완패였다. 명색이 일류 바리스타여서 그런지, 여린 팔로도 다양한 스냅을 선보인 이나가 시종일관 도윤에게 점수를 따냈다.
“정말 할 맛 안 나네…….”
“좀 봐줄까?”
“다른 걸로요.”
고전이면 그래도 실력의 격차가 좀 덜할까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어림도 없었다. 거품을 내뿜는 공룡이든, 눈덩이를 굴리는 형제든, 심지어는 런 앤 건이나 플라이트 슈팅 게임조차도 죄다 제 쪽이 얹혀만 갈 따름이었다.
“어째 안 좋은 기억이…….”
“쩔쩔매는 모습이 귀여운걸?”
“중학교 때 누나 한번 이겨보겠답시고 용돈 탈탈 털었던 기분이랑 똑같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윤도 즐겁긴 마찬가지였다. 겨우 몇만 원으로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기분이었다. 요 근래엔 억만장자의 후계자란 신분이나 계부가 억지로 떠넘기려 한 재산 탓인지 더더욱 새로웠다.
‘그래, 행복이란 건 이런 거지…….’
충족감을 느낀 도윤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즈음 야시시한 땅따먹기 게임을 가리켰던 이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등짝을 때렸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관계로 잘 알았지만, 은근히 밝히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휴, 엉큼하기는!”
“악! 네? 아니, 오햅니다!”
“그래? 그럼 저건 그냥 넘어가고 다른 거 할까?”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 악!”
마침 옆을 스치던 다른 한 쌍이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그러자 이나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투닥거렸다. 격의 없는 태도가 몹시 좋았지만, 한편으론 손이 제법 매운 탓에 힘들었다.
“끄악, 아파요.”
“창피하게!”
어쨌거나 결국엔 플레이한 게임이었다. 이나는 매 스테이지마다 90%씩 공헌을 하며 보상 일러스트를 얻었고, 도윤은 글래머한 미녀 일러스트가 보상으로 걸린 단계에서만 미칠듯한 실력을 보였다가 등짝을 얻어맞았다.
“이 녀석, 왜 란제리 미녀 스테이지에서만 이렇게 잘해?”
“제 생애 단 한점의 후회도 없습니, 악!”
“……진짜 못 말려.”
두어 시간쯤 되었을까. 거의 대부분의 게임을 섭렵하고 나니 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몰려든 손님으로 문전성시가 된 오락실은 그야말로 북적해서,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던 일정을 소화하기에 알맞았다.
“거기 사랑스러운 아가씨, 한 곡 추실까요?”
도윤이 사뭇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페달을 밟으며 춤을 추는 리듬 게임기 앞에서였다. 이나가 어렸을 적 유행한 그 게임은 당연하게도 그녀의 주특기여서, 하등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지나간 세월의 명곡이 선정되었다. 모두 하나같이 극악의 난이도를 지닌 노래였다. 채보 또한 어찌나 난해했는지 쉴 틈 없이 발을 놀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옛 기억을 되새긴 두 사람은 천천히 속도를 높였고, 그것이 진귀한 구경거리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페달을 밟았다.
“……짠!”
세 곡이 연주되었다. 놓친 노트는 단 하나도 없었다. 완벽한 커플 플레이를 마친 도윤과 이나가 숨을 돌리며 내려왔다. 그리고 어느덧 게임기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감탄을 연발했다.
“와아! 어떻게 하나도 안 틀릴 수가 있어요?”
“이 게임 많이 해봤어요?”
“둘이 커플인가?”
도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나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즉석 관중의 환호는 멈출 줄 몰랐고, 심지어는 기기를 정리하려 나온 아르바이트생조차 엄지를 척 추켜세워댔다.
“이건 진짜 부끄러운데요.”
“그러게, 얼른 도망치자.”
“좋은 생각이에요.”
결국 얼마 남지 않은 폐점을 앞두고 오락실을 빠져나온 둘이 먼 길가로 들어섰다.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허겁지겁 뛰었다. 그러다 숨이 차올라 멈췄을 즈음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푸훗……!”
정작 오락실에 들른 이유였던 코인노래방은 이용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외려 충족감을 느낀 도윤은 활짝 웃으며 내뱉었다.
“아, 간만에 제대로 놀았네요. 온종일 방방거려서 그런가 목이 다 말라요.”
“그러게. 이렇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시원한 아메리카노라도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
“그럼 만들어줄까? 여기선 가게보단 우리 집이 더 가까우니까 그리로…….”
미소와 함께 대꾸하던 이나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결코 그런 의도가 아녔음에도, 지금 제가 한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릴 수 있는지를 깨닫고 정정하려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네, 좋아요.”
그리고 실로 갑작스러운 와중에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도윤은 말했다.
“누나랑 함께 있고 싶어요.”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덥석 붙잡은 채 고백했다.
“누나를, 원해요.”
당신을 열렬히 바란다고.
……이렇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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