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컬렉션-21화 (21/28)

〈 21화 〉 4. 타락은 아직 이르다 (1)

* * *

필연이었을까?

제 앞에 주어진 운명을 실감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의심하게끔 설계된 생물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도윤은 돌연 제 행복에 끼어든 것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본능에 충실한 순수한 삶을 살고 싶어.’

스티븐 모리스는 자본주의의 화신이었다. 그가 지닌 금권은 감히 누구도 거스를 생각을 할 수 없는 힘이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마음을 얻길 원해.’

자연히 의붓아들에 불과한 저 또한 하루아침에 황태자가 되었다. 수십억 인류에서 단 한 명만이 누릴 수 있는 인생역전을 체험했다.

하지만 도윤이 진정 거머쥐고 싶었던 건 그런 부유함이 아녔다.

젊은 패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남들과 달리 돈 아닌 사람에 좀 더 가치를 두었다. 공허한 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사랑, 그리고 우정 따위의 추상적 유대를 숭상했다.

‘……그래, 그건 분명 손에 넣을 수 없던 것이었지.’

진정한 사랑은 돈에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도윤은 제 부모에게서 그것을 똑똑히 배웠다. 병에 걸려 죽어가던 아버지는 저로 인해 가족이 힘들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가난에 찌든 어머니는 매일처럼 끼니를 굶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쾌락을 좇았다. 열락에 겨운 순간만큼은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높이 나는 만큼 그 추락도 처절하다. 그토록 헌신적인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마자 스티븐과 재혼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배신감은 아직도 도윤의 트라우마가 되어 저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즐거웠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반전되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정신이 딴 데 팔린 사람처럼 굴게 되었다. 오죽하면 제가 달라진 걸 눈치챈 이나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향할 정도였다.

“왜 그래, 괜찮아?”

“……네?”

“자, 장난이 너무 심했나?”

주눅 든 그녀의 안색이 무척 안쓰러웠다. 멍하니 앉아 홀로그램을 쳐다보고 있던 도윤이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럴 때 소심한 건 여전하시네요.”

“표정이 굳어있길래.”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누나가 대체 뭐 때문에 그리 곤란할까 싶어서요.”

“그랬구나…….”

그제야 이나가 안심한 듯 긴장한 표정을 풀었다. 아직도 제가 짊어진 짐을 같이 나눠들려는 태도에 대해선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 또한 절 향한 애정의 일환인 바 염려할지언정 부담스러워하진 않았다.

“분위기 망쳐서 미안해요.”

“으응, 아니야.”

“음료 한 잔 시킬까 하는데 마실래요?”

“사이다로 부탁할게.”

그렇게 주고받은 말을 끝으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약간의 어색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곧 아까처럼 왁자지껄 떠들며 웃을 수 있었다. 잠깐의 해프닝으로 여기게끔 하고 두루뭉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어렸을 때 말인데…….”

“푸흡,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이나가 여러 추억을 되새기며 기꺼워했다. 도윤은 맞장구를 치면서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티가 나지 않게끔 가면을 쓴 그의 눈빛은 다름 아닌 홀로그램을 향하고 있었다.

「히로인 No.003 ­ 최이나」

「나이 만 27세, 카페 시실리안느의 사장 겸 바리스타입니다.」

컬렉션은 은하나 애슐리를 히로인으로 삼았을 때와 달리 모든 기능이 해금돼있었다. 보는 눈이 많은 탓에 함부로 손을 놀릴 수 없었던 도윤은 일단 시야에 띈 것을 전부 읽기 시작했다.

「호감도 : 이 히로인은 현재 당신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믿었던 가족마저도 짐이 되어버린 지금, 그녀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당신입니다.」

「복종도 : 이 히로인은 매우 순종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성향은 내조와 헌신을 위시로 한 가부장적 여성상에 걸맞습니다. 만약 그녀에게서 절대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고 싶다면, 남존여비적 상하관계를 각인시키십시오.」

「성욕 : 이 히로인은 몹시 금욕적인 동시에 만성적인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내면 속 깊은 곳에는 당신에게 지배당하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하며, 그 기저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원초적 심리가 깔려있습니다.」

「속마음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이렇게나 즐거운 거구나. 지금이라도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뻐.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해.」

한 사람을 완전히 들여다본다는 게 이런 것일까. 접힌 항목을 제외해도 아래로 빼곡하게 많은 정보가 적혀있었다. 원래라면 옅은 모자이크가 되어있어야 할 화상도 시간대별로 마음에 드는 것을 열람할 수 있었다.

과거 어울려 다니던 시절의 교복 차림, 카페를 운영할 때면 보였던 활기찬 모습, 호기심에 무턱대고 한 야한 속옷 따위를 몸에 걸치던 순간까지.

도윤이 침음을 삼켰다. 히로인 컬렉션의 기능은 단순한 통찰 수준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인지를 초월한 물건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체모의 색. 눈동자의 모양과 빛깔.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의 둘레. 질 속의 직경과 넓이. 시력과 청력이 포함된 여러 운동능력. 인종적 구분에 도덕적 성향. 자위 및 성행위 등의 경험 여부와 횟수. 그 밖에도 특기할만한 다른 사항들까지.

밥이 제대로 입에 들어가고는 있는 건가 싶었다. 사방팔방 어지러운 홀로그램 화상과 효과음이 도윤을 어지럽게 했다. 그러고도 이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평정을 가장했고, 식사를 끝마칠 무렵에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공략 진척도는 100%입니다.」

「함락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움말 : 기존에 등록되지 않은 히로인이라도 공략 진척도 100%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자동으로 등록 처리됩니다. 이 경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종래의 함락과 같이 취급되어 모든 기능이 해금됩니다.」

의도치 않았던 등록엔 그런 비사가 존재했다. 또한 컬렉션의 기능은 영구적으로 해금된 것이 아닌, 오로지 함락된 히로인에게만 작용한다고도 적혀있었다.

「공략 포인트 : 최이나 히로인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녀와 당신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주 사소한 시련뿐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함락시키십시오.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그녀를 길들이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손에 넣으십시오.」

「도움말 : 어떤 히로인은 공략 진척도가 100%에 달했음에도 함락 아닌 진행 표시가 뜹니다. 이와 같은 경우엔 특별한 이벤트를 통해 공략을 완료하십시오. 애정 고백을 받을 경우엔 연인 히로인으로 거듭나고, 복종 맹세를 받을 경우엔 노예 히로인으로 귀속될 것입니다.」

히로인의 종류는 무궁무진했다. 그 속성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윤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나는 저에 대한 사랑이 증명된 히로인으로서, 원치 않았음에도 그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후아, 맛있었다.”

커피잔 모양의 배지가 어느샌가 그녀의 아이콘이 되어 컬렉션 안에 자리 잡았다.

“괜찮았어요?”

“응, 너는?”

“저도 좋았어요.”

“이제 우리 어디로 갈 거야?”

도윤이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컬렉션 프로필은 말 그대로 이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저에 대한 애정처럼 감정적인 부분부터, 경험 없는 처녀란 사실처럼 적나라한 사실도, 그토록 굳세던 그녀가 어떤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지까지도 모두 알려주었다.

“노래방 가요.”

“좋아, 그런데 예전에 우리가 다니던 노래방은 없어졌어.”

“하지만 오락실은 아직 그대로 있던걸요.”

“……정말 멋있어졌다니까.”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어느덧 해가 저물어있었다. 어슴푸레한 느낌이 짙게 드리운 것이 영락없는 밤이었다.

검푸른 하늘에 휘영청 뜬 별과 달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나는 도윤의 어깨에 몸을 살짝 기대며 걸었다. 더없이 행복한 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를 황홀케 했다.

그러나 도윤은 그런 그녀를 지탱하면서도 여전히 제 신경을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 쏟았다.

‘누나를 함락시키라고? 길들이고, 손에 넣으라고?’

쾌락을 추종한다면 옳은 선택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나는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이제야 사랑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감잡고 있었다.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지.’

억만금을 손에 넣어도 무덤덤하였다. 도도한 스튜어디스를 제 밑에 깔아뭉갤 땐 잠시나마 즐거웠으나, 그마저도 잠깐에 불과했다.

텅 빈 마음은 결코 쾌락과 열락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쾌락이라면 모를까, 사랑을 거머쥐는 것만은 내 방식대로 하겠어.’

느긋한 발길 속에 초조함이 깃든 도윤이 괜스레 다짐했다. 컬렉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랑 하나쯤은 쟁취할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겠노라고. 제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극복하고, 이나와 서로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사이가 되겠노라고.

……나는 아직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노라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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