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3. 「No.003 바리스타 최이나」 (完)
* * *
몽환적인 일몰이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첫 고백치고는 대단히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도윤은 지금이야말로 제 삶의 전환점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여자를 만나본 경험은 많았지만, 이런 연애라면 새싹을 틔우는 것조차 이나가 처음이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소중하다. 익숙지 않은 미지와의 조우는 여린 자신을 상처 입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도윤은 자신이 반한 여자가 그녀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는 이나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육욕만이 아닌,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감정 또한 공존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지?”
“아니란 거 알고 있잖아요.”
도윤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나는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가만히 선 채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나 누나.”
“……응.”
새까맣고 다소 정돈되지 않은 머리, 그리고 짙은 갈색에 낮게 묶은 머리.
깊고 진한 이목구비와 그럼에도 조화로운 얼굴, 그리고 부드러운 눈매와 연분홍 입술.
탄탄하니 군살 하나 없어 건장한 체격, 그리고 도담한 가슴을 위시로 뇌쇄적인 몸매.
애처로워 모성애를 자극하는 분위기, 그리고 수수함에 아껴주고 싶은 느낌.
“사랑해요.”
도윤이 말했다. 그에 덧붙일 말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문호의 미사여구조차 지금 고백에 있어선 화사첨족이었다.
‘귀하에겐 더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애슐리의 도발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었다. 이런 순간에조차 그 말이 떠오른다는 건 곧 그녀가 도윤의 본질을 짚었음을 의미했다. 대부호의 변호사에겐 진실로 사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상관없었다.
지금의 도윤에겐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랬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부터 계부와 얽힌 문제까지도 전부. 심지어는 재산의 상속 여부나 제 손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스마트폰까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 고백, 받아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얻고 싶다. 어릴 적부터 느꼈던 마음 속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다. 물론 이런 제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나라면 분명 믿을 수 있다고 여겼고, 괜찮으리라 싶었다.
“미안해.”
그래서 더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난생처음 마음을 연 상대에게 거절을 당한다는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다. 아마도 뒤따른 말이 아니었다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기 충분했을 것이다.
“네가 돌아오고 나서 줄곧 갈피를 잡지 못했어. 너에 대한 감정이 대체 뭘까 궁금했어. 그리고 이제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
이나가 도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널 사랑해.”
두 손을 붙잡고 그리하였다.
“우리가 서로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뻐.”
시선을 마주하며 그리하였다.
“하지만…….”
절실히 교감한 채 내뱉었다.
“나는 결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을 짊어주고 싶지 않아.”
그건 숭고한 희생정신이었다. 제 욕망과 바람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행동이었다. 이나는 지금 저를 둘러싼 문제가 도윤을 힘들게 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차라리 함께 지칠 바엔, 그를 보내주려 하고 있었다.
“지난 한 주 동안 줄곧 표정이 어두우셨죠. 누나답지 않았어요.”
“응…….”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게 말해줄 수 있나요?”
“이해해 줘. 너에게 내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
완강한 태도가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제 고백을 거절당한 이유에 대해서 납득한 도윤은 포기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알아낼 거예요.”
“도윤아, 안 돼.”
“저를 사랑한단 말은 진심이었나요?”
말할 것도 없이 진심이었다. 이나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야.”
이내 제 진심을 증명하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도윤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밀착된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젖히며 입을 맞췄다.
“날 원망하더라도, 널 향한 내 마음만큼은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누나를 의심한 적이 없어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도윤이 이나를 힘껏 안았다. 불편한 화제는 잠시 치우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며 본격적인 데이트를 시작했다.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고, 현실의 걱정을 잊으며, 미래의 기쁨을 나누자고 속삭였다.
“배고프죠? 식사부터 하러 가요.”
기억에 따르면 도보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양식 노포가 하나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발길을 재촉한 도윤이 이나와 함께 여느 길가로 들어섰다. 낡았지만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여기였구나.”
“기억나요?”
“가족들끼리 모일 때 곧잘 여기서 먹었잖아.”
식당은 여전했다. 내부는 몇 번인가 보수를 한 건지 달라진 점이 보였지만, 시대착오적인 인테리어는 그대로였다. 오랜 옛날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빵으로 하시겠어요, 밥으로 하시겠어요?”
“둘 다 빵으로요.”
두 사람이 어렸을 적에도 이런 경양식 레스토랑은 사양세였다. 그러니 굳이 누군가의 추억이었느냐를 되짚는다면, 저희들보단 부모님 세대에 가까울 것이다.
“메뉴는요?”
“햄버그 스테이크로 할게요.”
“저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로.”
“네에, 금방 갖다드릴게요.”
주요리가 나오기까진 부식으로 제공된 빵을 먹었다. 식당은 그래도 예전엔 고급스러운 곳이었는지 다양한 종류의 잼과 버터가 있었다.
“엄마랑 아주머니가 맨날 여기 올 때면 이걸 뜯어먹으면서 수다를 떨었죠.”
“맞아, 아빠들끼리는 맥주 한 잔 곁들이면서 좋아하셨지.”
“누나가 핸드폰 생겼다고 해서 저한테 자랑했을 때 기억나요?”
“네가 그때 멋대로 게임 깔아서 같이 혼났잖아.”
“결국엔 재밌게 했으면서.”
수프를 받았을 땐 또 그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햄버그 스테이크와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나왔을 땐 접시를 중앙에 나란히 두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음식만 몰두하지 않고, 조금씩 덜어서 나눠먹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스마트폰으로도 나왔다던데요.”
“그 시리즈가?”
“달리 뭐겠어요.”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 게임은 여전히 컴퓨터나 오락기로 한다는 인식을 떨칠 수가 없네.”
“누나는 아직 젊어요.”
별것 아닌 소소한 식사인데 그 어떤 파인 다이닝에서의 한 끼보다 호화스럽게 느껴졌다. 만족스럽게 여겨졌다.
진정 호화롭고 만족스러운 식사란 그랬기 때문이다.
음식의 재료나 그것을 만드는데 쓰인 기술보다, 함께 식기를 들 상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좀 모르면 어때요. 함께 알아가면 되는 거지. 저도 애늙은이 소리 듣고 자라서 스마트폰 잘 못 다뤄요. 그걸로 게임하는 건 아직도 어색하고요.”
“정말? 괜히 위로해 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얼마든지 확인해보세요.”
도윤이 스마트폰을 선뜻 내밀었다. 이나는 히죽거리면서도 그것을 낚아챘다.
“야한 거 숨겨뒀나 찾아봐야겠는걸.”
한창일 수밖에 없는 나이다. 자연히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 몇 개쯤은 있겠지 싶었다. 액정 속에서 놀림감이 될 만한 것을 찾은 이나의 눈이 곧 동그랗게 되었다. 그래도 남자랍시고 조금은 나올 줄 알았는데, 메신저 앱 하나가 잠긴 것을 제외하면 깨끗했다.
“뭐야, 왜 이리 깨끗해?”
“폰으로 그런 거 잘 안 보거든요.”
사실이었다. 그나마 있는 거라곤 은하에게서 받은 사진이나 영상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열람을 위해선 잠긴 메신저 앱을 이용해야 했고, 이나의 짓궂은 장난은 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만큼 불쾌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요컨대 그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수상한데…….”
“저 의외로 성실한 남자거든요?”
“거짓말!”
능청스럽게 던진 말에 이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표정은 오간데 없이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게 내심 기쁘고 좋았던 도윤은 그녀를 따라서 씩 웃으며 생각했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 즈음, 별안간 나타난 소리와 글자는 그토록 꿈꾸던 행복에 젖어있던 사내를 화들짝 놀래며 깨워버렸다.
「자동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히로인 공략을 시작합니다.」
눈앞에 익숙한 프로그램 화면이 하나 떠올랐다. 제게만 들리는 소리와 제게만 보이는 글자로 주의를 끌었다.
「히로인 No.003 최이나」
「나이 만 27세, 카페 시실리안느의 사장 겸 바리스타입니다.」
「모든 정보를 해금합니다.」
히로인 컬렉션이었다. 뒷전으로 잠시 미뤄두었던 문라이트의 프로그램이 제멋대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여러 데이터에 진행 표시줄이 생기더니 곧 하나둘씩 그 결과를 나타내었다.
「호감도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복종도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성욕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속마음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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