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3. 「No.003 바리스타 최이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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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시실리안느, 가게의 문이 닫혔다.
외투를 걸치고 난 도윤은 이나의 손을 성큼 붙잡았다. 꿀이 떨어질 만큼 가까운 연인 사이라도 쉽게 하기 힘든 행동이었는데, 이 맹랑한 연하는 그녀가 마치 제 연인이라도 되는 양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누나 손, 따뜻해서 좋네요.”
가볍고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한편으론 그래서 발칙했고 뿌리쳐도 할 말이 없을 태도였다. 그러나 이나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이리 자신감 넘치는 도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요 근래 제게 치근덕거리던 건물주와는 전혀 상반된 느낌이었다.
“그냥 네 손이 차가운 건 아니고?”
“음,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이런 거짓말쟁이.”
소소한 대화와 그로부터 빚어진 웃음이 며칠 동안이나 절 괴롭혔던 사실들을 떼어놓았다. 막상 스트레스를 받을 땐 어떻게 떨칠지 몰라 곤란한 근심이었건만,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옛날 생각나고 좋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도윤의 말마따나 어릴 땐 이렇게 손을 잡고 여기저기 잘도 쏘아 다녔었다. 하굣길엔 약속 지점에서 만나 근처 분식집에 들르고, 주말엔 느지막한 점심 무렵 연락해 PC방과 노래방을 전전했다.
때로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 하기야 남매도 연인도 아니면서 그렇게 어울려 다니니 오해를 사기론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두 집안의 왕래가 서먹해지기 전까진 개의치 않고 쭉 함께 다니곤 했다.
“응, 좋아.”
이나가 도윤과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깍지를 끼고, 서로를 옴짝달싹 못하게끔 붙잡은 그 느낌을 즐겼다.
“이러니까 꼭 연인 같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자니 절로 드는 생각이었다. 막상 내뱉은 순간엔 주책이다 싶어 얼굴이 빨개졌지만, 어릴 때부터 살갑기 그지없는 태도로 절 대해온 남자는 배시시 공감할 따름이었다. 짐짓 불쾌할 수도 있는 제 말을 듣고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대꾸할 뿐이었다.
“예전에 누나 친구들이 이렇게 맨날 손잡는다고 놀렸던 거 기억나네요.”
“맞아, 다들 그랬었지.”
“그때는 참 못됐다고 생각했어요. 누나한테만 달라붙지 말고 자기들 손도 잡아보라며 장난칠 때 특히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과거는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결코 역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그 시절을 꿈꾸었고, 어렴풋이 되새겨진 기분에 기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설령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갈 순 없을지라도, 그랬던 나날을 곱씹으며 노력하다 보면 이렇게 새로이 기꺼운 순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다니는 걸 본다면 누구라도 애인 사이라고 오해하겠죠.”
“지금은 몰라도 예전엔 네가 너무 작아서 남매로 보였을걸?”
“이젠 누나보다 커요.”
도윤이 피식거리며 답했다. 확실히 그는 이제 저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사내가 되어있었다. 이나의 키가 그리 작지 않단 점을 감안하면 늠름하니 썩 멋있는 남자가 된 것이었다.
“그러네, 이젠 어른이 다 됐어.”
어깨를 맞대자 풍기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은은한 체취에 어울리는 허브 향이었다. 여리고 쪼끄맣던 소년은 이제 어른이란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몹시 마음에 들었던 이나는 제 머리를 살포시 기댄 채 걸음을 내디뎠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도윤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쓸쓸할 정도로 한적한 오후의 거리 탓인지 퍽 감상적인 분위기 속에서였다.
“아직 부족하단 말을 하고 싶지만…….”
밤낮으로 조용한 동네는 원래부터 그랬다. 느긋한 태도로 보폭을 맞춘 두 사람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석양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는 사이 추억이기도 하고 회한이기도 한 대화를 나누며 값진 순간을 보냈다.
“그래도 제게 소중한 사람 정도는 챙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주홍빛 노을 아래, 고개를 살짝 치켜든 도윤이 앞을 보았다. 아련한 눈빛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대변했다. 흡사 근사한 미장센을 지닌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훌쩍 큰 소년을 우러러 바라보게 된 이나는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지금껏 제가 봐왔던 그 어떤 이보다도 고결한 남자가 그곳에 있어서였다. 그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반하고 남았을진대, 그 뒤로 가린 내면은 더욱 아름답고 겸손하기까지 해서였다.
‘그랬구나.’
휘청, 차분하던 발걸음이 잠시 흐트러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도윤은 거뜬히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혹시라도 제가 넘어지는 일이 없게끔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지탱하였다.
‘나는 얘를 좋아하는구나…….’
소년에서 남자로, 장장 몇 년동안 일상으로 자리잡은 도윤이었다. 비로소 실감한 사실이었지만 그는 결코 이나의 수호천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불행은 행운과 마찬가지로 삶 곳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도윤이 절 떠났을 때 불우해졌다고 느낀 건, 단지 제가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마음에 위안을 주는 사람을 잃은 나머지 영락했던 것이다. 당차게 시련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상실하였으므로.
“괜찮아요?”
“응, 이젠.”
진실을 마주하는 과정은 실로 벅차다. 그러나 일단 한번 마주하고 나면, 대개는 후련함이 감돌기 마련이다.
“고마워.”
이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답답했던 느낌은 좀 가시는 기분이었고, 제가 처한 현실을 잊으며 기념비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람차다고 여겼다.
“배고프지 않아요?”
“음, 살짝.”
“슬슬 식사하러 갈까 하는데.”
“데이트라고 했으니 분명 로맨틱한 곳이지?”
도윤은 반쯤 농담 삼아 꺼낸 말에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정말 저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릴 때부터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아이는 아녔으니, 제게 좋은 감정을 지녔단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이란 게 애인으로서의 유대가 아닌, 가족으로서의 유대란 차이점이 있을 뿐.
“물론 로맨틱한 곳이죠. 그런데 비싸거나 고급진 식당은 아니에요.”
“그런 식당은 오히려 내가 사양이야. 게다가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그런 걸 사겠니.”
“누나 모르는구나? 저 엄청 부자예요.”
장난스럽게 내뱉긴 했지만 진짜였다. 하루아침만에 억만장자의 상속자로서 간택되었으니까. 아마도 역사상 이보다 더 극적인 신분의 상승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느냐만, 도윤의 재력은 틀림없이 이 나라 제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동네도 살 수 있을걸요.”
“푸훗, 퍽이나 그렇겠다.”
“그러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있으면 뭐든 말해요.”
“정말 뭐든 괜찮아?”
“속는 셈 치고 얘기해봐요.”
“그럼 좋아. 너와의 시간이 갖고 싶어.”
이나가 소박한 바람을 입에 담았다.
“……네?”
그리고 도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제 등골을 타고 흐르는 걸 느꼈다. 은하를 굴복시키고 그 위에서 굴복할 때 느꼈던 쾌락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로맨틱한 거 좋지. 하지만 근사한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괜찮아. 꼭 맛난 음식과 비싼 가격이라고 해서 만족스러운 데이트는 아니잖아. 나는 그냥 이렇게 너랑 걷기만 해도 즐거워.”
결핍된 욕구의 충족은 망가진 인간성을 치유한다. 도윤이 본능에 충실한 삶을 바랐던 건 그런 퇴폐야말로 공허한 제 마음을 채울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겐 여기 이나처럼 절 사랑해 줄 여자가 없었으니까.
혹은 있었다 할지라도 그걸 실감치 못했으니까.
“이나 누나…….”
지난 한 주간, 어딘가 불편해하는 그녀의 기색을 종종 엿보았다. 그래서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오늘의 데이트는 바로 그 걱정거리를 듣기 위한 발판이었다.
막대한 재력은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어렵잖게 해결한다. 같은 맥락에서 도윤은 이나가 가지고 있을 고민을 손쉽게 풀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다만 그녀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헤아리면서 대처를 해야 하니 접근하기 난감했을 뿐.
“응?”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거란 애슐리의 도발에 제 발길이 향한 곳은 시실리안느였다. 도윤은 그 이유가 약간의 충동과 오랫동안 쌓아온 유대가 뒤섞인 결과라고 예단했다.
그렇지 않았다.
그는 놀랍도록 제 감정에 솔직한 남자였다. 그랬기에 지금 이 순간 절 향한 이나의 말은 어마어마한 고양감이 되어 돌아왔다.
“저도 그래요.”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수없이 많은 반증이 그의 결단을 못박고 있었다.
“제가 누나를 사랑하나봐요.”
더없이 직설적인 고백이란 그래서 시작된 것이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어요.”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세월의 풍파에 찌들었음에도 아직 풋풋함을 드러내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춘을 스물 안팎의 나이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생의 절정기란 감히 누구도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한 쌍의 불그스름한 뺨이 꼭 저물어가는 노을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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