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컬렉션-18화 (18/28)

〈 18화 〉 3. 「No.003 바리스타 최이나」 (3)

* * *

영업이 끝났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실내를 감돌았다.

사실 그러한 기분은 일방적인 추측이었다. 그러나 이나가 생각하기로는 분명 그러했다. 해서 탁자를 닦고 매장을 소독하던 그녀는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잘생긴 외모의 별생각 없는 표정 뒤로 숨은 감정을 읽으려 들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싱긋거리며 설거지를 하던 그는 몹시 즐거워 보였다. 거품 가득한 싱크대에서 접시를 하나씩 헹구고 문지르며 가사를 읊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빠져들기 쉬운 광경이었다.

“이 노래 오랜만이네요.”

“으응, 그러네.”

청소는 곧 끝났다. 남은 건 설거지와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도윤은 제 몫의 일까지 거들 필요는 없다며 휴식을 종용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 뭐해 움직이려던 이나를 나무라고 느긋하니 있게 했다.

“금방 끝나니까 쉬고 있어요.”

“괜찮아? 쓰레기는 그냥 내가 버릴게.”

“어허, 가끔은 절 부리는 특권을 누려봐요.”

곧잘 삐지고 토라지기 일쑤던 소년이었는데, 언제 저렇게 부쩍이나 컸을까.

“응, 고마워…….”

“별말씀을요.”

문득 세월이란 게 참 빠르게 느껴졌다. 이나가 도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천년만년 소녀일 것만 같았던 제가 이리도 원숙해졌듯, 그리도 내성적이었던 아이는 여기 늠름한 청년으로 거듭났다. 쾌활하니 외향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다.

‘너도 이제 다 컸구나.’

청춘의 반년이란 그야말로 찰나와 같다. 불과 몇 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이나는 확실히 늙어갔다. 적어도 그녀 스스로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이제야 겨우 20대 중반을 넘겼을 뿐인데.

여전히 곱고 찰랑이는 머리칼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백옥 같은 피부였다. 건강하고 씩씩한 몸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아득히 지쳐있었다.

“이나야, 엄마가 미안해…….”

사색은 이내 회상으로 이어졌다. 이나는 차츰 생생한 기억과 함께 병든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그녀의 엄마가 병실에 입원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부모가 되어서 뭐 하나 보태주진 못할망정…….”

“그런 말 마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언젠가, 의지할 대상을 잃은 사람은 약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나는 그것이 몹시 일리 있는 말이라 여겼다.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제 경우가 바로 그랬으니까.

소꿉친구라기엔 나이 터울이 제법 있었지만, 어쨌거나 도윤은 어릴 때부터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 중 하나였다.

“야! 너 이름이 뭐야?”

“우, 우도윤이요…….”

이웃집으로 이사를 온 소년은 곱상하게 생겨서 낯을 많이 가렸는데, 당시만 해도 괄괄한 여장부였던 이나는 그렇게 겉도는 소년을 자주 제 무리에 끼워주었다.

“도윤아, 노래방 가자!”

“저 오늘은 학원 가야 하는데…….”

“배짱을 가져! 가끔은 땡땡이도 쳐보는 거야!”

소년은 그랬다. 싫은 척하면서도 늘 끝에 가서는 마지못해 어울려주었다. 저와 함께 해맑게 웃으며 사고를 치거나, 장난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두 집안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대체로 엄한 어머니들은 호되게 꾸중을 하였고, 호탕한 아버지들은 격려와 용돈을 건넸다.

추억은 그리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 문득 도윤의 아버지가 쓰러지면서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두 집안의 왕래가 끊겼고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와줘서 고마워요, 누나.”

“……응. 힘내.”

자그맣던 아이를 못 보면 얼마나 못 보았다고, 장례식장에서 재회했을 땐 마치 딴 사람처럼 어른스러워져있었다. 도저히 제가 알던 그 소년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그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도윤은 제 의사와 무관하게도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앳된 티를 벗어난 소년은 곧 사회로 뛰어들었다. 장례를 마치고 머지않아 재혼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며 가출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작은 단칸방에서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며 먹고 살기 시작했다.

“도윤아, 있지…….”

그 즈음 이나는 제 꿈이었던 바리스타를 향해 착실히 다가가고 있었다. 자격증을 따고, 기술을 공부했으며, 창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누나가 카페를 새로 하나 차리려고 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믿음직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흔쾌히 종잣돈을 보태주었다. 그리 청렴하진 않은 경찰이었으나 가족만큼은 끔찍이 아끼는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너만 괜찮다면 네가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혹시 생각이 있을까?”

“제가 과연 도움이 될까요?”

“응, 될 거야. 당연히 되고 말고.”

그 즈음 소년은 완연한 성인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그 성장이 끝나지 않았기에, 세상의 풍파를 견딜 만큼 강인하진 못하던 차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겼던 이나는 제가 창업한 카페에서의 일자리를 제안했다.

물론 그 제안은 단순한 연민에서 비롯된 결정이 아니었다.

일상보다도 더 익숙했던 소년의 존재가, 어느덧 제 안에서 무럭무럭 커졌음을 깨달아서였다. 본인 스스로가 실감했던 것처럼 우도윤이란 존재가 더는 제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임을 짐작해서였다.

“누나가 저를 믿어줬으니, 이제는 제가 누나를 믿어줄 차례겠네요.”

결과적으로나 과정적으로나 그 선택은 전적으로 옳았다. 바리스타의 길에 들어선지 얼마나 되었다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으니까. 아직 미숙하던 저를 심적으로 지지해 준 남자 덕분에.

그래, 도윤은 말하자면 이나의 수호천사였다.

소심한 이웃집 동생은 이제 그녀의 동업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욱 챙겨주려고 애썼고,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관둬야 될 것 같다고 말했을 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유가 절연했던 어머니와의 재회를 위한 것임을 알기 전까진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언제든 돌아와도 좋아.”

이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불행이 시작됐다. 도윤이 정말로 그녀의 수호천사라도 되었던 건지, 멀쩡하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누웠다. 들어본 적도 없는 희귀병에 걸려 막대한 치료비를 필요로 했다.

계급 경위, 뒷돈도 그런대로 기준을 세워 받아먹던 경찰 아버지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고 변해버렸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타락해 여기저기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엔 내사에 걸려 불명예스럽게 퇴직했다.

업보였다.

차라리 거기서 멈췄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망가진 이나의 아버지는 폭주기관차처럼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그나마 동료들의 배려로 조용히 퇴직한 덕에 뱉어내지 않을 수 있었던 뒷돈을, 어떻게든 불려보겠답시고 사설 도박장 따위를 드나들다 날려먹었다.

겨우 다섯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나야, 딱 한 번이면 돼! 아빠가 종잣돈이 없어서 그렇다니까? 이번에는 도박을 하는 게 아니라 사업을 하는 거야! 여럿이서 짜고 치고 한놈 수술하는 거라고!”

“제발 정신 좀 차려! 그 돈 먹는다고 엄마 병원비 감당 안 된다고!”

“야, 이 년아! 그렇게 하면서 몇 번만 굴리면 네 엄마 병원비쯤은 눈깜짝할 사이야!”

“나 그런 돈 없어! 그리고 이젠 가지고 있던 돈 날리는 걸로도 모자라 감옥까지 가려고 그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빠까지 왜 그래!”

폐인과 병자를 부양하는 삶은 몹시 고달팠다. 이제 겨우 한 달째였지만 그마저도 순탄치 않아서 많은 굴곡이 있었다.

가장 특기할만한 사실을 꼽으라면 건물주다.

맘씨 고운 노부부가 은퇴하며 손주란 작자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마흔 중반의 노총각이었던 그는 이나를 만나고 반했는지 끈질기게 구애해댔다. 볼품없는 외모와 추잡한 내면을 돈 몇푼으로 무마하며 치근덕댔다.

“이나 씨, 오늘 시간 되나? 내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하나 예약해뒀는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가게 문 닫는대로 병원에 가봐야해요.”

“맞다, 어머님이 입원중이시랬지?”

관상이니 인상이니 하는 걸로 사람을 예단하는 건 나쁜 거라고 늘 여겼는데, 남자는 도무지 그런 편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부류였다. 입은 매일 방정이었고 배포는 쥐꼬리만했다. 더욱이 제가 무슨 치명적인 매력의 사내라도 되는 양 구는 게 아주 눈꼴사나웠다.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일만 해서 쓰나. 내가 따로 간병인 붙여드릴 테니까 쉬엄쉬엄해.”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허!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튕기는 것도 좋지만 여자가 조신한 맛이 있어야지.”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남자였다. 어찌나 혐오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집안의 빚은 점점 늘어갔고, 가장 역할을 해야 할 아버지는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그리하여 제게 구애한 남자의 존재를 알더니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이나야, 그냥 눈 딱 감고 결혼하는 게 어떠냐?”

“아빠 미쳤어? 그 사람 나랑 나이 차이가 20년이나 돼!”

“요즘 세상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사랑만 있으면 되는 거지. 아빠가 따로 만나보니까 널 위해서라면 별도 따다 줄 기세더구먼. 너, 그렇게 헌신적인 남자 찾아보기 쉽지 않다?”

“찾아보기 쉽지 않긴 뭐가 쉽지 않아? 딸한테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닐 말이 있지 어떻게 그러냐고!”

“누가 나 좋자고 이러는 줄 알아? 그럼 네 엄마 병원비는 어쩔 건데! 그냥 저대로 누워있다가 확 뒈져버리라고 할까? 제발 철 좀 들어라, 이년아! 도대체 언제까지 네 좋은 대로만 살 수 있을 것 같아?”

치료도 제대로 받질 못해 초췌해지는 어머니. 사랑하던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에 망가져버린 아버지.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계속 추근대는 남자. 밤 늦게까지 영업하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을 정도로 감소한 매출.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그냥 다 벗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포자기하던 심정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누군가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제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던 수호천사가.

“이나 누나?”

이윽고 정신이 돌아왔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도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응?”

밝은 얼굴 속 훈훈한 표정으로 절 위로한 그가 단호히 말했다.

“다 끝났어요.”

“아…….”

아닌 걸 알면서도 진짜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난 그녀는 처연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비정한 현실에 낙망하며 그것을 수용하기 전,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뿐일지도 모를 일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데이트 신청, 아직 대답을 안 해줬는데.”

이른 저녁, 시간은 오후 5시 30분.

“그래, 좋아.”

폐점한 카페에서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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