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3. 「No.003 바리스타 최이나」 (2)
* * *
규칙적인 생활만큼 건강에 좋은 것이 없다던가?
과연 그 말대로였다. 시실리안느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한 도윤은 막막했던 제 삶에 조금씩 광명이 내비치는 것을 느꼈다. 돈이 많다고 무작정 의미 없는 시간만을 허비하는 것보단 무언가 할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단 걸 실감했다.
“도윤아, 여기 카운터 좀 잠깐 봐줄래?”
“잠깐만요.”
첫날엔 그저 단골 몇 명이 오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는 갑자기 손님으로 미어터지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으로는 직장인 여성이 그랬고, 늦은 오후에는 주로 근교 여학생들이 그랬다. 시실리안느의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이 돌아왔단 입소문 때문이었다.
“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포장해드릴까요?”
“아뇨, 매장에서 먹고 갈게요.”
공들인 화장에 잘 꾸며입은 여성이 음료를 주문하면서 비밀스러운 추파를 던졌다. 결제용으로 내민 핸드폰에 다이얼 화면을 켜놓고 내심 번호를 기대한 것이다. 행여나 거절하더라도 대금을 치르기 위해서였다고 발뺌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약삭빠른 수단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네? 아닙니다. 엄청 예쁘신데요.”
그러나 도윤은 모른 척 그것을 외면하며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 이렇게 간혹 직설적으로 묻는 손님이 있으면 누구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미소로 답했다.
“그런데 제가 여자친구가 있어서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생긴 것만큼이나 마음씨 고운 청년이 따로 없었다. 겨우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주제에 밤낮으로 이런 카페에서 일하는 걸 보면 생활고도 있는 듯싶어 모성애를 자극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애인을 실망시키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랬네요. 모쪼록 이해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예의 손님이 객쩍은 표정이 되어 부러움을 표했다.
“애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부럽네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들이대는 것은 어지간한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이윽고 커피를 받아든 그녀가 자리에서 얼마 안 있다가 일어섰다.
물론 모두가 그 이름 모를 여인처럼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건 아니었다.
느지막한 오후, 하교할 시간에 몰려든 여교생 중에는 막무가내로 제 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몇몇은 그게 엄연한 범죄인 줄도 모르고 도윤이 일하는 사진을 몰래 찍어다가 공유하기도 했다.
참 곤란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 대응했다간 가게에 손님의 발길이 끊기는 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결국엔 적당하니 달래며 지우라고 종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알바 오빠, 저 이거 사진 찍은 거 지울 테니까 번호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그건 좀 어려워요.”
“여자친구 있다는 거 뻥이죠? 사진 있어요?”
“음료 다 마셨나요? 또 주문할 거 아니라면 서비스로 아메리카노 한 잔씩 줄게요.”
원치 않는 경우에도 미소로 응대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란 게 쌓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윤은 물밀듯이 쏟아지는 손님들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사흘과 나흘을, 닷새와 엿새를 잇따라 넘겼다.
며칠을 바쁘게 지냈는지 모른다. 예전과 달리 놀고먹으며 무뎌진 몸을 갈고닦는 데엔 시간이 더러 필요해보였다. 그러나 거의 한주에 가까운 업무는 반년 전 시실리안느를 떠났을 때와 비슷한 일머리를 찾게 했다.
“오빠, 오늘은 진짜 번호 좀 줘요.”
“애인이 알면 화낸다니까요. 이렇게 예쁜 학생이랑 뭘 그리 시시덕거리고 있었냐면서요.”
“저 예뻐요? 그럼 한 번만 만나보지 않을래요?”
도윤이 싱긋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요 며칠 가장 집요하게 달라붙던 여학생은 도무지 포기란 걸 모르는 종자였다. 학교가 끝날 즘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절 귀찮게 만들었으니까.
“어허, 여자친구 있다니까요.”
“거짓말! 사진도 한 번 보여준 적 없으면서!”
“어른의 사진밖에 없거든요.”
“요즘 애들 알 거 다 알거든요? 진짜면 어디 한번 구경시켜줘봐요!”
모델을 꿈꾼다는 말처럼 외모가 제법 특출한 아이였다. 자신감을 갖고 들이대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 여고생 손님에겐 가장 중요한 끌림이 없었다. 그래서 며칠 귀찮게 하다 말겠거니, 하고 여겼던 도윤은 생각을 바꿔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그건 제 스마트폰 속 메신저 앱에서 어떤 여성과 나눈 대화록이었다. 이틀치가 담긴 그 기록에는 단순한 문자 말고도 사진과 영상이 함께 첨부돼있었다.
「우도윤, 어제 오후 02:15 은하 누나.」
「홍은하, 어제 오후 02:22 ?」
「우도윤, 어제 오후 02:25 지금 어디에요?」
「홍은하, 어제 오후 02:26 인천국제공항.」
「우도윤, 어제 오후 02:27 맞다, 오늘 비행 있다고 했었죠?」
「우도윤, 어제 오후 02:27 또 JFK?」
「홍은하, 어제 오후 02:28 아니, LA.」
쌀쌀맞은 여성의 태도는 도저히 애인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계속 탐독하고 나니 냉랭하던 자세는 곧 반전되었다.
「우도윤, 어제 오후 02:30 가면 언제쯤 와요?」
「홍은하, 어제 오후 02:33 나흘쯤? 나 슬슬 준비하고 가봐야 해.」
「우도윤, 어제 오후 02:33 그럼 지금 유니폼 입고 있겠네요.」
「우도윤, 어제 오후 02:34 사진 좀 찍어서 보내봐요.」
「홍은하, 어제 오후 02:35 진짜 별걸 다 시키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순순히 사진을 찍어 보낸 은하였다.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여고생이 아리따운 승무원의 모습을 보고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디어에 나오는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법한 그녀의 외모 때문이었다.
스튜어디스 특유의 단정한 올림머리, 꽉 끼는 제복 너머로 드러나는 몸의 굴곡, 메신저 속에서 보였던 차가운 모습과 달리 방긋 웃는 표정까지.
완벽했다.
「홍은하, 어제 오후 02:39 자, 됐지?」
「우도윤, 어제 오후 02:40 예쁘네요.」
「홍은하, 어제 오후 02:41 당연한 거 아냐?」
「우도윤, 어제 오후 02:42 비행기 안에서도 찍을 수 있죠?」
「홍은하, 어제 오후 02:45 시간 나면, 그런데 알고 있겠지만 바로는 못 보내.」
「우도윤, 어제 오후 02:47 그럼 제가 시키는 대로 찍었다가 그쪽 공항에서 보내봐요.」
이어진 도윤의 명령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노골적인 것이었다. 내용을 읽어가던 여고생이 화끈거리는 제 뺨을 어루만졌다.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는 게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홍은하, 어제 오후 02:50 이 변태야, 그런 걸 어떻게 해!」
「우도윤, 어제 오후 02:51 잘 다녀와요.」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약 20시간쯤 후에 두 개의 파일이 도착해있었다.
「홍은하, 오늘 오전 10:50 (사진)」
하나는 사진이었으며, 기내의 화장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유니폼 웃옷의 단추를 풀고 치마를 내린 은하가 제 속옷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홍은하, 오늘 오전 10:51 (동영상)」
또 하나는 영상이었고, 모두가 잠든 일등석 객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곳곳에 장막을 쳤다지만 언제, 어디서, 그리고 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황. 그런 와중에도 치마를 내리고 팬티를 벗은 은하가 그것을 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경멸 여린 목소리로 남은 비행 시간이자 제가 노출할 시간을 읊은 뒤 끝냈다.
「우도윤, 오늘 오전 11:37 :D」
스물도 채 되지 않은 학생이 알기론 너무 배덕적인 관계였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그녀가 스마트폰을 도윤에게 돌려주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증명이 되었을까?”
“가, 갈게요.”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허겁지겁 제 음료만 챙기고 가게를 빠져나가기 바빴다.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런, 아무래도 단골 한 명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도윤이 커피 머신 앞에 선 이나를 향해 웃으며 농을 건넸다. 그러나 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얼굴을 찡그리기 바빴던 그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나 누나?”
“응? 아, 뭐랬더라?”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냐! 아무 일도 없어!”
이나가 격렬히 손을 내저었다.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반년 전만 해도 활기가 넘치던 그녀였는데, 제가 돌아오고 난 뒤로는 어째 영 안절부절 못했기 때문이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다시 한 번만 말해줄래?”
절 유혹하던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만 해도 그렇다. 예전이었다면 가게의 주인으로서 두 눈을 번뜩이며 절 지켜주었을 텐데, 엄중하게 경고를 주는 한편 생각지도 못한 서비스로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인데, 요 며칠동안은 자꾸만 자리를 비우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오늘 가게 문 일찍 닫을 수 있나 해서요.”
“아, 누구랑 약속 있구나? 그럼 그렇게 하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원체 처연하게 전부 끌어안는 성격이었으니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도윤은 오랜 관찰 끝에 허를 찔렀고, 정겹게 내뱉었다.
“오늘 저랑 데이트 해요.”
끈질기게 달라붙던 아이를 쫓아낸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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