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3. 「No.003 바리스타 최이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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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시어지 데스크의 치프가 몸소 수배한 차는 고급스러운 세단이었다. 아스팔트 깔린 도로를 따라서 쭉쭉 뻗는 차량의 탑승감은 마치 푹신한 침대에 눕기라도 한 양 편안했다. 운전이라는 제 본분에만 충실한 기사와 오후의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뭇 안락하기까지 하여,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깜빡 졸았을 정도였다.
“손님?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팔짱을 낀 채로 꾸벅거리던 도윤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자 보이는 것은 변화한 도심지 속 삼림, 그리고 정겹게 낡은 주택가의 풍경이었다.
“고마워요.”
거리는 아직 이른 오후라 그런지 한산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문을 열고 내린 도윤은 팔목을 살짝 쓰다듬었다. 봄치곤 조금 쌀쌀한 바람이 때아닌 겨울의 추위를 떠오르게 했고, 그래도 울창한 공원 옆이란 건지 공기만은 제법 쾌적했다.
귀향이란 게 이런 기분일까.
자취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동네는 도윤에게 있어 마음의 고향과도 같았다. 가난한 형편 탓에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가야 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마지막으로 같이 살았던 곳이 저 골목 귀퉁이를 지나면 나오는 빌라의 반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만큼 강하게 남는 것이 바로 행복했던 순간이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재혼한 어머니가 싫어 집을 뛰쳐나왔을 때도 선뜻 타향으로 나가질 못한 이유는 그랬었다. 어찌어찌 청소년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서 자취방을 얻었을 때 멀리 가지 않은 이유도 그랬었다.
도윤의 심리와 그 기저엔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강박이 깔려있었다.
그에게 여기 삼림 옆 주택가는 말 그대로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잃은 나머지 다시는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마음의 고향 말이다.
‘귀하에겐 더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애슐리 이브는 과연 유능한 변호사였다. 사람을 상대하는데 이골이 난 그녀는 그 짧은 새 도윤의 모든 것을 꿰뚫어본 게 분명했다. 아무리 뒷조사가 철저했던들 그런 말을 장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언제나 쾌활하고 익살스럽던 아버지는 더 이상 곁에 없었다. 조용하면서도 엄하지만 자애로웠던 어머니도 떠나보냈다. 일가친척 하나 없던 두 사람은 그랬기에 남들 못지않게 화목한 가정을 일궜었는데, 정작 그 자식이란 놈은 부모를 떠나보낸 뒤 홀로 남겨졌다.
정처 없이 향하던 발걸음이 점점 방향을 되찾았다. 그의 가족애란 더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상대는 있었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그 이웃집 누나는 가장 힘든 시기에도 곁을 지켜준 인물이었다.
‘그래, 누군가에게 보답이란 걸 해야 한다면…….’
저 앞에 소박하지만 예쁜 카페가 보이기 시작했다. 간판에는 시실리안느란 글자가 적혀있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진 매일같이 출근했던 일터였다. 또한 절 항상 응원하고 격려하던 그녀의 가게였다.
자그마치 반년 만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도윤이 실내를 훑었다. 기억 속에 있던 것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가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곧 카운터 쪽에 선 여인과 눈을 마주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이나 누나.”
“우도윤.”
곧 저보다 살짝 작은 키의 여성이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대로 입구에 선 도윤을 위아래로 훑다가 와락 끌어안았다. 가녀린 겉모습과 달리 그 힘이 얼마나 셌는지 윽, 하고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어서 와…….”
낮게 묶은 머리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도담한 가슴이 절 껴안으면서 짓눌린 감각도 묘한 쾌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던 것은 그런 육체적 기쁨이 아니었다. 이 포옹의 의미와 같은 정신적 기쁨이었다.
“누나, 숨 막혀요…….”
“넌 좀 더 막혀도 돼.”
꾹, 도윤의 몸이 으스러질세라 힘껏 껴안은 그녀가 말했다.
“아파서 그래요.”
“이제 좀 반성할 준비가 됐어?”
“항복, 항복.”
참으로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목숨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뇌쇄적인 몸매를 이용한 육탄 공세가 그러했다.
두 손을 높이 든 도윤이 눈을 감으며 투항했다. 그리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여성은 제가 껴안고 있던 죄수를 놓아주었다. 죄목은 연락 두절이었다.
“앉아, 뭐라도 좀 마시면서 얘기하자.”
“누나가 사주는 거예요?”
“오늘만 특별히.”
배시시 웃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카운터 너머로 훌쩍 넘어간 그녀가 주문을 물었다.
“뭐 마실래?”
“유분기 없이 깔끔한 드립 커피요.”
“나가는 문은 저쪽이란다.”
“……아무거나 주세요.”
가까운 자리를 찾아서 앉은 도윤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제야 앞치마를 맨 여인은 이런저런 도구와 함께 커피 낼 준비를 시작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종이 필터나 드립포트 따위가 테이블에 놓인 걸로 보아, 처음 주문한 대로 접수를 한 게 틀림없었다.
“식사는 했니?”
“아뇨, 조금 늦게 일어나서.”
“베이글 샌드위치 먹을래?”
“돈 내라고 할 거 아니죠?”
“너는 두 배로 내야지!”
정다운 분위기가 도윤을 미소 짓게 하는 한편 안도시켰다. 별다른 설명 없이 제멋대로 떠난 자신이었는데도 이렇듯 따스하게 맞아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던지. 느닷없이 나타난 계부의 변호사로 인해 아렸던 마음마저 아무는 기분이었다.
“이나 누나.”
“응, 왜?”
부끄러움 탓인지 차마 고맙다는 말까진 내뱉을 수 없었다. 애꿎은 카페 벽면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가 인테리어 소품처럼 걸린 액자의 사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벌써 2년인가 해서요.”
“저 사진?”
말마따나 액자에 음각된 날짜는 어느덧 2년이나 지나있었다. 작은 웃음을 머금은 도윤이 그때를 회상했다.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바리스타 대회.
당시엔 아직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았던 여성은 그해 가장 파란만장한 승부 끝에 우승자가 되었다. 숱한 광고 제안과 자리 주선에도 한사코 거절로 일관한 끝에, 여기 보잘것없는 동네에 작은 카페를 열었다.
그것이 여기 바리스타 최이나, 그녀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봐야 장사엔 별 도움도 안 되는 걸.”
“하기야, 이력에는 좋을지 몰라도 창업에는 좀 그렇죠?”
“그래도 네가 있을 땐 근처 여고 애들이 매상 책임졌는데.”
“아, 그 착하던 누나가 이젠 돈 앞에서 동생을 팔아먹네요.”
한참 달그락대던 이나가 작은 쟁반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담아왔다. 주문한 대로 유분기 없는 깔끔한 드립 커피였다. 햄과 토마토, 양상추에 마요네즈와 치즈를 곁들여 만든 맛난 샌드위치였다.
“뭐 어때, 친동생도 아닌데!”
“진짜 너무한데.”
“너무한 건 네 얼굴이지! 너 한번 보겠다고 근처 회사 여직원들이 바글바글 몰려왔을 땐 매출이 얼마나 나왔는지 아니? 장담하는데 그렇게 1년만 장사했으면 권리금으로 십수억은 받았을걸!”
“십수억이라…….”
확실히 예전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 용돈으로 쓰는 것조차 민망할 금액이다. 당장 어제만 해도 은하에게 100억 가까이 되는 돈을 쓰지 않았던가.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20조란 돈을 받네 마네 씨름한 그에게 더 이상 십수억이란 돈은 크게 와닿지 않는 금액이었다.
도윤이 새삼 제 금전 감각이 무뎌졌음을 깨달았다.
“별로 잘 와닿는 액수는 아니네요.”
“그렇지?”
돈에 깔려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금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를 잡아먹는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도윤은 그리 무지몽매하지 않았지만, 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생긴 돈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나가 받아들인 의미와 달리 도윤에겐 더 이상 십수억이란 액수가 잘 와닿지 않았으니까.
진정 부를 거머쥔 자는 돈에 깔려 죽지 않았다. 그 위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과연 제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도 돼?”
애슐리가 제게 일침을 가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본능에 충실한 삶보다는 보다 인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들 애정을 나눌 이 하나 없다면 결코 의미 있는 삶이라곤 할 수 없었으니까.
“아주머닐 만나러 미국으로 간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었잖아.”
“걱정했나요?”
“당연하지. 연락도 통 되질 않고 어디서 뭘 하나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얘기하기엔 좀 길어요.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짙은 갈색에 낮게 묶은 머리, 부드러운 눈매와 연분홍 입술, 수수한 분위기와 달리 도담한 가슴, 뇌쇄적인 몸매를 가졌으면서도 생활감은 가득한 여자,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고 좋아했던 여인이 작게 웃었다.
“오늘 많이 바쁘니?”
“아뇨.”
“나도 그래. 그러니까 말해보렴.”
기쁜 불가항력이었다. 도윤은 간략하게나마 그간 있었던 일을 이나에게 말했다. 계부의 정체는 숨기고 재력은 축소해서 말하는 식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녀는 반년 동안 있었던 일을 들으며 손을 내밀었다. 커피 잔을 들기 위해 탁자에 올려둔 도윤의 손을 살포시 포개며 위로를 건넸다.
“그랬구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
“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시실리안느로 온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얼굴을 비춰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듯 갑작스럽게 마주한 건 애슐리의 도발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다.
“글쎄요.”
솔직히 말한다면 그냥 그녀가 떠올랐다. 제가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온 이웃집 누나이자, 가장 힘든 시기에 곁을 지켜준 사람에게 가고 싶었다.
“네가 괜찮다면, 여기 있으면서 고민해봐도 돼.”
“그건 매출을 올리려는 누나의 속셈?”
“앗, 들켰나?”
멋쩍게 웃은 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여전히 도윤의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그 사실이 무척 마음에 와닿았던 그는 못말린다는 듯이 함께 웃으며 답했다.
“그럴게요. 그동안 진 신세 정도는 갚아야죠.”
때로는 본능과 욕망에 충실한 삶보다 순수한 행복을 추구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앞치마 입고 주방으로 직행!”
“오늘부터에요?”
“커피 값 대신!”
“진짜 너무하네…….”
어쩌면, 어릴 적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더더욱 나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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