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2. 시실리안느 (完)
* * *
스카이라인 호텔.
본관 2층 라운지에 위치한 카페는 아주 고즈넉했다. 짙은 고동색을 기조로 귀족들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처럼 디자인된 인테리어, 가브리엘 포레의 잔잔한 실내악과 함께 곁들이는 음료는 한가한 정오의 평화를 실감케 해주었다.
“우도윤 씨?”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는 식사를 마친 손님이 모이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조금 모자란 포만감을 채우는 것엔 카페의 음료나 디저트만 한 것이 또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서울에서 손꼽히는 호텔의 라운지는 조용했고, 텅 빈 카페의 전경은 누군가가 안배해둔 것이 아닐까 어림잡게 했다.
“손님이 보이질 않는군요.”
“전세를 냈으니까요.”
도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제 앞에 선 여인의 외모를 훑어보았다. 눈부신 금발을 단정히 엮어서 만든 시뇽, 황금빛 눈썹 아래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정장 위로도 돋보이는 발군의 몸매까지.
애슐리 이브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동안이 드문 백인이었는데도 도무지 연령을 짐작할 수 없는 외모였다. 사무적인 태도가 영 까칠한 느낌을 주었는데도 여기 도윤의 시선을 끌었다. 나아가 그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커피 드시겠어요?”
“방금 마시고 와서 또 마시긴 그렇군요.”
도윤이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의 가장 큰 단점이 있다면, 그건 역시 농축된 카페인을 마신 탓에 드는 갈증이다.
“탄산수로 얼음물 한잔 부탁해요.”
“예,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애슐리는 보기만 해도 써 보이는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주문과 동시에 주머니로 손을 넣은 도윤은 약간의 미소를 보태며 주의를 환기했다. 눈앞에 있는 여성은 유능한 만큼이나 깐깐한 듯싶었지만, 어쨌거나 보기 드문 미인임은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된 통성명을 안한 것 같군요.”
“그랬던가요?”
“면치레에 불과해도 인사는 중요한 법이죠.”
도윤이 악수를 청했다. 오른손으로는 스마트폰을 꺼내 조작하고 있는 탓에 왼손을 내밀었다.
“우도윤이라고 합니다.”
“이브, 애슐리 이브예요.”
“미즈 이브.”
부드러운 손이었다. 아주 잠깐동안 맞잡았을 뿐이지만 찰나에 느끼기로는 그랬다. 비단 도윤만의 감상이 아니라, 애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 될까요?”
“그렇게 하시죠.”
그러나 제 기분을 감추는데 익숙했던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을 가장했다. 이 자리에 온 이유를 주고받기 위해서 제각각 필요한 말을 골랐다. 이어질 대화를 준비했다.
「지정이 완료되었습니다.」
「히로인 공략을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 도윤의 손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은, 그 위로 반짝인 홀로그램은 새로운 히로인의 출현을 알렸다. 은하와 마찬가지로 컬렉션에 담을 히로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그녀의 이력을 띄우기 시작했다.
「히로인 No.002 – 애슐리 이브 (Ashely Yves)」
「나이 만 34세, 모리스 컴퍼니 소속의 변호사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해금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찍은 증명사진은 꽤 예전 것으로 보였다. 지금과는 인상이 사뭇 다른 게 몹시 날카로웠다. 물론 그 미모엔 큰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주는 위화감이 상당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복종도를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성욕을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속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히로인 컬렉션의 항목은 여전히 해금되지 않은 것들 투성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은하의 공략도 채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도윤은 처음과 달리 헤매지 않고 제게 필요한 문구만을 눈에 담았다. 애플리케이션이야 달라진 게 없을지 몰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달라졌으므로.
「공략 포인트 : 애슐리 이브는 비밀이 많은 여성입니다.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를 공략하려 들지 마십시오. 범국제적 명성을 지닌 변호사는 알려지지 않은 억만장자의 해결사이기도 합니다.」
공략 포인트에 적힌 경고는 의미심장했다. 대다수의 항목이 잠긴 탓에 자세한 확인은 어려웠지만, 아무래도 애슐리 이브는 단순한 변호사가 아닌 것 같았다. 평범한 여자가 아님은 물론이고 말이다.
“모리스 회장님께서 우도윤 님에게 재산의 약 5%를 이전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잠깐, 얼마라고요?”
“퍼센테이지라면 5%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화로 약 20조 원 상당이겠군요.”
도윤이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때마침 제가 주문했던 종업원이 돌아와 잔을 건넸기에, 얼음을 넣은 탄산수라는 것도 잠시 잊고 한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금전적인 어려움이 없게끔 도와주겠단 얘기는 들었습니다. 실제로도 들어오자마자 편의를 볼 수 있었죠. 하지만 이건 금시초문이군요. 제가 승낙하지 않은 사안입니다.”
뒤늦게 터진 탄산의 기포로 목이 무척 따가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따갑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제가 처한 이 상황이었다.
“돈을 받는데도 승낙이 필요할까요?”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앞서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모리스 컴퍼니 소속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한 직책이 어떻게 됩니까?”
“회장님의 직속 변호사 겸 휘하 법무팀 총괄 책임자입니다.”
이번에는 애슐리가 마시다 만 커피의 잔을 들었다. 만면에 가득한 여유로움은 과연 그녀가 대부호의 심복을 자청할 만큼 거물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최소한 영미법에 관해선 통달하셨겠군요.”
“말씀대로예요.”
“하면 묻겠습니다. 받을 이유가 없는 돈을 사양하는 게 멍청한 겁니까?”
입안에 머금은 음료를 차분히 삼킨 그녀가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탁자 위로 가지런하게 얹고, 법률상담을 하는 변호사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업과 기업의 일례로 비추어봤을 때, 상대측에서 돈을 전해주려 한다는 것은 곧 제 약점을 그로써 무마하려 든다는 것과 같지요. 현명한 변호사라면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까지 결코 그리 눈먼 돈을 받지 않을 겁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애슐리가 끄덕였다.
“연 여사님께선 곧잘 제 아들을 자랑하곤 하셨죠. 그 기분을 조금은 알 것도 같군요.”
“스티븐에게 가서 전하세요. 얼마를 가져오든 제 용서를 돈에 팔 생각은 없다고 말입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회장님께선 당신의 용서를 돈으로 사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귀하가 어린 시절 겪었을 아픔에 대한 징벌적 배상을 할 따름이지요.”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 여자 애슐리 이브는 지금껏 자신이 만나온 사람들과 다른 부류 같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는데도 물러서는 기색이 없었고, 도리어 저에게 종용하려 들었으니까.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는 20조가 아닌 20억에도 제 인격을 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20조 정도라면 제 인격을 팔 법도 하단 겁니까?”
“회장님께선 어쨌거나 당신을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 제가 말씀드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겠지요.”
애슐리가 돌연 분위기를 잡았다. 서슬 퍼런 기운이 과연 비범했다. 뒤이어 내뱉은 말은 더욱 더 그랬다.
“아시아에서 가장 싼 살인청부업자의 수임료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을 것 같군요.”
“한화로 약 15만 원입니다. 동남아 어느 나라의 17세 청년이 살인 노동에 대한 삯으로 받아 간 돈이죠. 도윤 님께서 어제 미래백화점 강남점에서 쓰신 돈을 대입한다면, 대략 6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대화 도중에 미안하지만, 화제가 무척 불쾌한데요.”
“모쪼록 그러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만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건네려 하는 돈의 무게를 짐작하실 테니까요.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20조란 돈으로 용서를 사려 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용서든 간에 그만한 값어치를 가진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불쾌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눈썹을 꿈틀거린 도윤은 이어진 애슐리의 말을 듣고 조금 뜻밖의 결론에 다다랐다.
“도윤 님께서 이 돈을 거절하려 드는 이유는 당신의 용서가 값지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그걸 함부로 베풀지 않음으로써 얻는 평안이 그 어떤 물질적 요소와도 맞바꿀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여자는 단순히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직설적이었던 제 거절조차 뛰어난 화술로 반려한 것이었다.
그녀의 동기란 상사를 향한 충성심이다.
애슐리 이브는 진심으로 스티븐 모리스를 염려하는 사람이었다.
“회장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막대한 금액을 물려주려 하시는 건 결코 당신의 용서가 그만큼 값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제 평안이 그 어떤 물질적 요소와도 맞바꿀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충성심이 대단하군요.”
도윤이 제 앞에 놓인 잔을 들고 목을 축였다. 차갑고 따가운 탄산수가 타는 목마름을 단숨에 해소시켜주었다.
“제 미덕 중 하나이지요.”
그 사이 애슐리는 등 뒤의 핸드백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이전되었거나 이전할 예정인 재산입니다.”
“아직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말씀하시죠. 그리고 당신의 계부에게 평안을 안겨준 대가로 그 돈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어제처럼 반반한 승무원을 자빠트리는데 써도 좋고, 재미삼아 회사 몇 개를 사서 가지고 노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선택지가 없는 걸 보니 당신의 성격을 알 것 같군요.”
“저를 예로 들었다면 틀림없이 말했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예로 들었기에 그러지 않은 겁니다. 귀하에겐 더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멈칫, 그러다 조금 경직된 채로 숨을 고른 도윤이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 조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스티븐이 아주 재미난 분을 보낸 것 같네요.”
“앞으론 더욱 재밌어질 겁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편의를 봐주시라고 저를 보냈으니까요.”
애슐리가 앞서 내민 종이 옆에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서 내려놓았다.
“이후에 일정이 있는 관계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른 전달사항은 결정을 내리시면 그때 다시 논의해보기로 하죠.”
“잠깐 기다려요.”
“뭐죠?”
“그 일정이라는 게 설마 스티븐을 대리한 사업입니까?”
“아뇨, 딸아이가 입국할 예정이라 마중을 나가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그녀가 조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신지? 없다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답변은 언제까지 주면 되겠습니까.”
“긍정적인 답변을 주실 수 있을 때까지로 하지요.”
그리고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등을 돌리더니,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이곤 장소를 떠났다.
“서류를 보고 궁금하신 점이나,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길.”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정신없이 나눈 대화는 그런 만큼이나 도윤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탁자에 놓인 종이와 명함을 집어 든 그는 얼마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애슐리가 한 말을 떠올리곤 저 멀리 있는 직원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손님?”
“컨시어지에 전화해서 차를 한 대 더 준비해달라고 해주세요.”
“아, 예!”
대부호의 변호사는 유능하다. 애슐리 이브의 조사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마따나 도윤에겐 더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모두 죽거나 없어 사라져버렸으므로.
“……시실리안느.”
하지만 모리스 컴퍼니의 무시무시한 여변호사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카페 시실리안느로.”
뭐든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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