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2. 시실리안느 (4)
* * *
나신, 곧 벌거벗은 몸.
두꺼운 이불로 제 치부를 가렸던 은하가 쭈뼛거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눈가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혀있었고, 피부엔 오돌토돌한 소름이 돋아있었다.
“큭, 흐읏……!”
본능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콧대 높던 여인이 이렇게 굴복할 수 있었으니까.
“얼마나 더…….”
어정쩡한 자세로 선 은하가 제게 각인된 복종심을 느끼며 되물었다. 이 남자를 만난 뒤로는 도저히 이런 치욕 어린 쾌감과 배덕감에서 자유로울 날이 없었다.
“쉿, 감상하고 있잖아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 도윤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 우묵하니 조용한 눈길로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은하를 훑었다.
헝클어진 것을 급하게 묶었지만 그럼에도 예쁜 얼굴. 그 아래로 명암이 돋보여 고혹적인 쇄골. 물방울 모양으로 탄력 있게 잡힌 젖가슴. 잘록한 허리와 미세하게 보이는 복근. 한눈에 봐도 순산형임을 알 수 있는 골반. 그리고 성숙함을 반증하듯 좁게 난 음모.
“보기 좋네요.”
관찰에 들였던 시간에 비하면 영 짧은 감상이었다. 그러나 달리 더 나은 표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은하의 나신은 오로지 제 앞에 있는 도윤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보기 좋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가라사대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자세가 조금 아쉽긴 해요.”
“변태 새끼…….”
“두 손 머리 위로 올려봐요.”
은하가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맞잡았다. 매끈한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창문을 연 것도 아닌데 서늘한 기분이었다. 수치심을 끌어안고 치부를 드러낸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위잉, 위잉.
그 즈음 도윤은 주머니 속의 진동을 느끼고 손을 집어넣었다. 확인을 해보니 전화였다. 귀국한 이래 한 번도 울린 적 없던 스마트폰이 ‘Ashely’란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의 발신을 알렸다.
“잠깐, 그대로 있어요.”
검지를 치켜세우며 주의를 준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은하는 분한 표정을 하고서도 차마 그 명령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딴에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합리화할 수 있는 복종에 대한 쾌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길들여지는 중이었으므로.
“네, 우도윤입니다.”
“Mr. Woo?”
“누구시죠?”
전화를 받던 도윤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능글했던 그가 정색하면서 되물었다. 상대는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사용하는 2, 30대의 여성이었다. 기억을 뒤져보는 한편 발음을 들어보니 아마도 원어민 같았다.
“모리스 컴퍼니의 애슐리 이브입니다.”
저 스스로를 애슐리라 소개한 여인이 능숙한 한국말로 되물었다.
“기억하십니까?”
높낮이가 살짝 어색한 것만 빼면 완벽한 한국어였다. 그리고 도윤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제게 한국말로 말을 건 외국인을 몇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너무 정신이 없던 나머지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말이다.
“기억난다고 치고,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당신의 아버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외국인이라 그런지 한국말을 잘 모르나 보군요.”
도윤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덧붙였다. 용인과 용서는 겨우 한 글자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 글자 안에 내포된 뜻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스티븐 모리스는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심정적으론 어떨지 모르나 법례상으론 아버지에 해당합니다. 어쨌거나 당신께선 연 사모님이 재혼하셨을 당시 미성년이셨으니까요.”
영원한 반목은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용서하고, 스티븐은 용인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도윤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부터 교류하던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용서라니? 그건 아직 너무 이르지 않은가.
과거의 연적이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을 쟁취했단 건 꽤 낭만적인 이야기다. 스티븐의 입장에서야 절 이겼던 사내도 떠나버렸고, 사모하던 이만이 남았을 따름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듣기 싫군요.”
억만장자의 순애는 과연 지고지순했다. 스티븐 모리스는 진심으로 제가 사랑하던 여자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그 애정을 가리켜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숨은 피해자를.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부호의 사랑을 받은 여자에게 자식이 있었음은 사족에 불과하니까.
애슐리의 말마따나 그 당시 도윤은 미성년자였다. 세상을 그렇게 똑부러지도록 옳고 그름으로 구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저 밖의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10대 소년이, 장례를 마치자마자 결혼한 어머니에게 느낀 감정을.
“용건만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미즈 이브.”
“그러죠. 지금 스카이라인 호텔에 묵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예, 그래서요?”
“모리스 씨께서 도윤 님께 전하라고 당부하신 물건이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전해드릴까 합니다만, 괜찮을지요.”
도윤이 은하를 잠시 흘깃하며 고민했다. 벌을 서기라도 하듯 굳어있던 그녀는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흠칫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밤새도록,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도 그 자존심을 자분자분 짓밟은 결과였다.
“그렇게 하죠.”
“본관 2층 라운지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곧 내려가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겼다. 도윤은 귀에서 떨어트린 스마트폰을 그러고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불편한 심기와 그로 인한 기분을 겨우 작은 한숨 따위로 해소한 뒤, 나머지 울분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버렸다.
“은하 누나?”
“……왜.”
“이제 그만해도 돼요.”
그렇게 말한 도윤이 몸을 돌렸다. 특실이라 그런지 전자식으로 된 옷장의 문을 열고, 밤새 살균되고 탈취된 옷을 꺼내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어요. 옷은 씻고 나서 입도록 하세요. 프론트에 차 준비해놓으라고 할 테니까 갈 때는 타고 가시고요. 식사는 배고프면 여기 식당 아무데서나 해결해요. 돈은 제가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깐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혹시 나 몰래 영상이나 사진 같은 거 찍은 건 아니지?”
뒤늦게 제 몸을 가린 은하가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물었다. 하긴 이래저래 정신없는 하루였으니까 말이다. 제가 나가떨어진 사이 그런 전리품을 취하려 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녔다. 어쨌거나 은하는 도윤을 아직 잘 몰랐기도 했고.
“흐음, 그거 의심하는 거예요?”
“난 네가 엄청난 부자란 것밖에 몰라.”
그리고 은하가 아는 부자들은 전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양아치였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째서?”
“전 누나 말처럼 변태일진 몰라도, 비열하진 않거든요.”
도윤이 씩 웃었다. 여자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가 없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허락받고 찍는 게 더 꼴리는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하나요.”
“변태 새끼…….”
“저런, 이걸 어쩌나. 그 변태한테 그만 연락처를 넘겨줄 시간이 된 모양이에요.”
옷을 건네받고 난 은하가 몹시 얄미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능청스러운 태도로 나선 도윤은 제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혹시라도 그런 걱정은 말라는 듯, 사진과 영상이 담겨있을 갤러리까지 열어놓은 채였다.
“봐요, 아무것도 없죠?”
“……그러네.”
살짝 움츠러든 은하가 토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스마트폰 갤러리에 있는 것이라곤 어느 저택을 배경으로 한 장례식 사진, 그리고 영상뿐이었다.
“네가 말한 장례식?”
“어머니의 장례식이요. 제가 찍은 건 아닌데, 아마도 스티븐이 저한테 건네주기 전에 찍은 건가 봅니다.”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적절한 순간이었다. 밤새도록 누그러진 자존심에 뒤늦게 밀려온 미안함이 겹쳐, 은하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리 줘.”
도윤의 스마트폰을 낚아챈 그녀가 제 연락처를 기입했다. 그리고는 캐치볼마냥 그것을 던져서 돌려주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어제는 막말해서 미안…….”
그 어떤 겁박이나 압박도 없었다. 말 그대로 순수한 자의에서 비롯된 사과였다. 그랬기에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도윤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마, 막말해서…….”
“작아서 잘 안 들려요. 크게 말해봐요.”
입가에 감도는 미소가 짓궂은 장난이었음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러나 알몸 때문인지, 아니면 진심 어린 사과 때문인지 부끄러움에 물든 은하는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 미안하다고…….”
“더 크게.”
“미, 미…….”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완전히 절 가지고 논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그 사실을 눈치챈 은하가 눈을 질끈 감으며 빼액 소리쳤다.
“……미친 변태야! 나 씻을 거니까 훔쳐보지 말고 얼른 가!”
그런 뒤엔, 욕실로 뛰어가버렸다.
후다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