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2. 시실리안느 (3)
* * *
이불로 몸을 가린 은하는 자꾸만 도윤의 시선을 피했다. 애써 타온 커피를 반려하기도 뭐했는지라 잔을 잡긴 했지만, 혹시라도 제 가슴이나 엉덩이가 드러날까 싶은 생각에 자꾸만 뒤척이게 되었다.
“커피 맛은 어때요?”
“괘, 괜찮네…….”
간밤에 있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수줍은 모습이었다. 하기야 어제까지만 해도 정말 처녀였으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녔다. 정사를 마치고 일어난 다음날, 얼굴을 마주하며 느끼는 그 멋쩍은 분위기란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잠은 잘 잤어요?”
은하가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굳이 말로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퍽 낯선 그의 모습 때문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무자비한 폭군처럼 제게 군림하던 사내였으니까. 아마도 이쪽이 평소의 모습 같긴 했지만, 일단 그런 본색을 목도하고 나면 그 간극 때문에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침이라기엔 너무 늦었지만 끼니는 챙기셔야죠.”
도윤이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비치는 가운데 이리도 잘생긴 남자의 걱정을 받자니 기분이 남달랐다. 저보다 일찍 일어나서 체력을 과시하는 게 멋있었고, 말없이 떠나지도 않으며 커피까지 타주는 게 몹시 다정했으니까.
어쨌거나 이 부유한 상속자는 뭇 여성이 꿈꿀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점심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요.”
“그, 그냥 옷이나 입게 가져다줘…….”
커피를 홀짝거리고 난 은하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새 시달린 탓인지 공복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부끄러움이 앞선 관계로 지금은 여기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괜찮으니까, 얼른!”
“저기 옷장에 넣어뒀으니까 직접 가져가요.”
은하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은근히 이불을 꾹 쥐는 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도윤이 실실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뒤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묶어주었다. 이윽고 드러난 귓가에 접때처럼 싸늘한 목소리를 연기하며 속삭였다.
“내가 반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히끅……!”
짓궂기 그지없는 장난이었다. 은하가 깜짝 놀라서는 딸꾹질까지 하며 움츠러들었다. 이내 히죽거리던 도윤의 표정을 보고 진심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등을 받치고 있던 베개를 던지며 마구 화를 냈다.
“농담이에요. 반응 한번 귀엽기도 하네.”
“어, 얼른 옷이나 가져다줘!”
“직접 가져가라니까.”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단 말이야!”
“알아요. 어제 실컷 봤는데 뭐.”
물론 눈부신 대낮과 어두컴컴한 야밤이 같을 수는 없다. 더구나 어제는 취기며 열락이며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와서 제 나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심정도 나름대로 이해는 됐다.
다만 도윤이 알 바가 아니었을 뿐.
“변태 새끼!”
“또 그런다. 어제도 느낀 거지만 말이 너무 세요.”
“옷 하나 가져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어렵진 않죠. 그쪽 알몸을 한 번 더 볼 수 있어서 그럴 뿐이지.”
너무나도 솔직한 표현이었다. 말문이 막힌 은하가 버벅거렸다. 그러다 곧 묘안이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다 마시고 난 커피의 잔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고, 이불을 한껏 끌어온 뒤 돌돌 말아서 옷처럼 걸쳤다.
“흥, 이러면 되지.”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 한 가지 맹점만 제외하면 그랬다. 도윤이 뒤뚱거리며 일어난 은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뭐야.”
“글쎄요?”
키가 그리 차이 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하는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인지 자꾸만 도윤을 경외하듯 올려다보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몹시 분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너무 쌀쌀맞게 구니 섭섭해서요.”
“아, 안 그럴 테니까 비켜.”
“잠깐만요. 적당한 호칭을 못 찾겠네. 그쪽이 연상이랬으니까 누나라고 불러도 되나요?”
솜이 가득한 이불은 어젯밤 질질 흘린 체액을 잔뜩 머금어서인지 무거웠다. 덕분에 호칭 따윈 아무래도 좋았던 은하가 끄덕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얼른 이 버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제 옷으로 갈아입으려 들었다.
“은하 누나?”
도윤이 이불의 끄트머리를 잡고 물었다. 컬렉션에서 본 공략 진척도도 그랬지만, 은하의 예속은 많이 발전했을지언정 아직이었다.
“우, 왜……!”
“제가 어제 부탁하는 방법 가르쳐줬잖아요.”
부탁은 공손하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밤새 암컷으로 전락했던 그녀가 배운 것이었다. 그제야 도윤이 절 가로막은 이유를 깨달은 은하가 몸을 떨었다. 그는 아직 반항기가 남은 저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불 내려놔요.”
“시, 싫어.”
“그럼 앞부분만 슬쩍 치우던가요. 생각해보니 그 편이 더 꼴리니까 좋겠네요.”
아까는 장난이었을지 몰라도 이번엔 아니었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부터가 진심이란 것을 시사했으니까.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은하가 어떻게든 옷장까지 가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뛰어난 수비수였던 도윤은 그 모든 시도를 차단한 뒤 제가 원하는 선택지만을 남겼다.
“왜 이렇게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건데! 어제 그렇게나 했으면 됐잖아!”
“딱히 괴롭히는 건 아닌데…….”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이게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뭐야?”
“그냥 좋아해서 그러는 거죠. 원래 남자들은 다 그러잖아요.”
뜻하지 않은 고백이었다. 덤덤하게 내뱉은 도윤이 시원한 미소를 머금었다. 잘생긴 얼굴로 그렇게 웃으니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리하여 뜻하지 않은 공격에 당황한 은하는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달아올리며 내뱉었다.
“거, 거짓말…….”
“거짓말이었으면 하룻밤에 100억씩이나 쓰진 않았겠죠.”
“넌 어마어마한 부자니까 그 정도쯤은…….”
“부자는 제가 아니라 제 계부죠. 그리고 오히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구두쇠 같은 면이 있다는 것쯤은 아실 텐데요?”
확실히 그렇긴 했다. 있는 놈이 더하단 진리는 얼마나 부유하든 간에 통용되는 것이니까. 특히나 퍼스트 클래스를 전담하던 은하는 그 점을 곧잘 실감했기에 잘 알았다. 상류계급의 비열함이란 좀처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니까.
“알아! 그렇지만 우린 서로 잘 알지도 못하잖아! 언제 봤다고 좋아한다는 건데?”
“누가 처녀 아니랄까 봐 순진하게 구시네요.”
“이, 이게……!”
“사랑하는데 꼭 이유 같은 게 필요한가요? 그냥 본능적으로 느끼면 된 거지. 굳이 말해야 한다면 누나의 얼굴이나 몸매겠죠. 전 단지 누나의 고압적인 자세를 무너트리고 제 밑에 깔아버리고 싶었어요.”
놀랍도록 직설적인 말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미친놈이라고 뺨이라도 올려붙였겠는데, 말마따나 제게 100억씩이나 태운 장본인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려 꾸밈없는 진실로 승부한다는 인상만 받았다.
“너, 정말 미쳤구나?”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내가 그런 말을 듣고도 홀라당 넘어갈 만큼 쉬운 여자로 보여?”
“설마요. 더 튕기면 튕겼지 넘어오진 않겠죠.”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
과제는 어려울수록 달성의 쾌감을 준다. 그 감각이란 마치 드높던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기쁨과도 같다. 그래서 도윤은 도리어 그런 반항심을 반겼다.
아무리 저를 거부한다고 해도 함락시킬 자신이 있으니까.
그렇게 저를 싫어할수록 훗날 손에 넣었을 때의 소유가 실감될 테니까.
“자존심은 높아도 비열하진 않은 게 누나의 성격이니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소위 귀빈이란 자들의 민낯을 보고 살아왔잖아요. 그들이 약자 앞에서 얼마나 비열해지는지도요. 그래서 오히려 저보다 센 사람 앞에선 굴하지 않으려고 한 거겠죠. 그게 누나가 가진 자존심의 근원일 거고요.”
도윤이 연신 정곡을 찔러댔다. 카운슬러처럼 은하의 내면을 들여다본 후,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이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있었던 일은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었어요. 누나가 크게 거부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보통 사람이었으면 제 첫 경험까지 바치며 약속을 지키려 하진 않을 테죠. 그런데도 누나는 그런 비겁함을 혐오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응했고요.”
“그, 그게 뭐 잘못됐어?”
“제 말은 그런 누나의 성격을 제가 잘 안다는 거예요.”
그랬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이 관계를 한번으로 끝내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그 과정의 정당성이야 차차하고서라도, 그것이 일단 유효한 이상 만남은 계속된다. 은하의 자존심이란 그런 쪽으로도 통용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도윤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도도하게 굴어도 돼요. 저랑 함께 있더라도 남들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이해할게요. 사실 그러는 편이 좀 더 꼴리기도 하고.”
“변태 새끼……!”
“듣기 좋네요. 그런데 잠자리에서만큼은 좀 자제해요. 어차피 지금은 말해도 소용없겠지만, 제가 누나를 그렇게 공략할 거라는 건 알아두라고요.”
“변태 새끼, 변태 새끼……!”
연신 욕설을 내뱉던 은하가 곧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처럼 다시 절 싸늘하게 내려다본 도윤의 표정 때문이었다.
‘또, 저 표정…….’
맹수의 눈앞에 선 먹잇감처럼, 싫은데도 자꾸만 그렇게 무기력해진다. 아무리 발버둥치려 해봐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뇌리에 명확히 각인된 상하관계 때문에.
“벗어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고개 돌리지 말고 따라해요.”
은하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려놓았다. 눈을 질끈 감거나 시선을 회피하지도 못한 채 제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즈, 즐겁게 감상해 주세요…….”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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