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 컬렉션-11화 (11/28)

〈 11화 〉 2. 시실리안느 (1)

* * *

봄의 끝자락이었다.

해가 바뀐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그리 되었다. 창가에 선 도윤은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들며 사색에 잠겼다. 스카이라인 호텔의 특실은 그 이름처럼 저 하늘에 맞닿은 윤곽선을 맘껏 감상할 수 있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바라볼 배경으로선 더할 나위 없었다.

‘누나는 어려서부터 바리스타가 꿈이었어.’

근래엔 청명할 때가 드물어서 그렇지, 서울의 한강은 그런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정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저 둔치에선 정오의 햇살을 맞으려 나온 시민들이 가득하고, 철교 위론 도시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지하철이 힘찬 느낌을 주므로.

‘마셔볼래?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란 거야.’

도윤은 말없이 에스프레소를 머금었다. 리스트레토 방식으로 추출한 커피의 맛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해서, 그 진한 농도와 향만큼이나 졸음을 깨우기론 부족함이 없었다.

‘맛있네요.’

‘그렇지?’

커피에 담긴 추억이 그를 자극했다. 환하게 웃던 여인의 모습도 떠올랐다. 첫사랑 같은 낱말을 쓰기론 촌스럽고 간지러웠으나, 그래도 그 추억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단어가 그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도윤은 사색에 잠겼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여느 20대처럼 카페에서 일하며 먹고살던 아르바이트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제는 감히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유력자가 되어버렸다.

간극이 참으로 공활했던 것이다.

그야 도윤도 남자였다. 어쩌다 마음이 맞는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야 수두룩하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저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쁜 남자였다. 그래서 달리 누군가를 책임지려 하지도 않았고, 책임지려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기 침대에 곤히 잠든 승무원만 해도 그렇다. 예전이었다면 말 한마디 붙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여인이다. 그런데 보라, 지금은 밤새도록 열락에 가둬놓고 기진맥진 시달리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비단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번이고 우위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도윤은 그 사실이 몹시 오묘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앞으로 제가 나아갈 길은 과연 어디가 될지를 고민했다. 굶주릴 걱정이 없으면 쓸데없는 사유나 하게 된다고, 존재의 이유부터 시작해 삶의 목적까지를 두루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제 스마트폰에 빌었던 소원을 떠올리고 그것을 꺼냈다.

「반갑습니다, 우도윤 님.」

「더 나은 삶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 ‘Moonlight’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도무지 출처를 알 수 없던 프로그램, 이른바 문라이트는 여전히 제 스마트폰 속에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은 도윤이 허공의 자판을 두드렸다. 처음 소원을 빌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계가 아닌 사람을 대하듯 인사를 건넸다.

「현재 시간은 오후 12시 13분으로, 점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좋은 아침이라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본 프로그램은 우도윤 님께 좋은 오후라는 말을 권장합니다.」

문라이트가 그렇게 대꾸했다. 도윤은 피식거리면서 답했다.

「그래, 좋은 오후야.」

언제 봐도 프로그램보단 인공지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편으론 그래서 더 이 물건의 제작자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당장 제게만 보이는 홀로그램조차 명백한 오버 테크놀로지였고, 그 UI에 깔린 애플리케이션은 상식을 초월한 기능이었으니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도윤이 다시 한번 자판을 두드렸다. 오랜 아르바이트 생활로 굳은살이 조금 박히긴 했지만, 그래도 유려하니 예쁜 손가락이 제법 속도를 내었다.

「물론입니다.」

「본 프로그램은 이용자이신 우도윤 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문라이트가 말한 서비스 중에는 이렇듯 문답을 나누는 것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때때로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단 건 큰 보상이었다.

「널 만든 제작자는 스티븐 모리스와 무관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스마트폰을 건넨 장본인은 분명 도윤의 계부인 스티븐 모리스였다. 그러나 문라이트는 계속해서 제 개발자가 그와 무관한 제삼자라고 주장했다.

「내가 아는 그 스티븐 모리스 말이야.」

「본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도윤 님께서 말씀하신 재력가 스티븐 모리스와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그 제작자는 누구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증거도 없는데 믿음을 요구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물론 도윤은 문라이트를, 그리고 히로인 컬렉션을 믿었다. 이 홀로그램이 내포한 가능성은 억만금을 주더라도 살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제 표어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한 조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도윤은 주도적인 남자였다. 그래서 설령 지금처럼 방황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이 권유한 길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계부가 종용한 후계자 자리를 사양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건 결코 제가 바란 길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 인생이 타인의 뜻대로 좌우되는 걸 원치 않아.」

꼭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면, 그것은 온전히 제가 그러기로 결정했어야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걸 증명해줬으면 해.」

어머니의 유지도 마찬가지다. 절연했던 관계를 도로 이어붙이거나, 스티븐과 화해를 한 것도 도윤 스스로가 이제는 그래도 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물려주려 한 재산을 일부나마 상속받은 것이었다.

「널 만든 게 내 계부, 또는 날 아는 사람이 아니란 걸 보여줘.」

문라이트가 잠시 침묵했다. 말줄임표가 뜨는 것으로 보아 어떤 연산을 하는 듯싶었다. 미뤄보건대 제게 걸린 금제를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을 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본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여성입니다.」

이윽고, 유보되었던 답변이 출력됐다.

「도윤 님께서 말씀하신 재력가 스티븐 모리스와는 아래의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제작자의 인종은 동양인이었다. 성별은 여성이었다. 연령은 일흔을 바라보는 스티븐보다도 많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다른 사람일진대, 문라이트는 그 밖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설명했다.

느긋하니 작아지던 채팅창의 스크롤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압축될 정도였다.

「보다 자세한 사항을 원하신다면, 제작자와의 접선을 추천드립니다.」

「접선이라면, 어떤 방식이지?」

「본 프로그램은 이용자 측에서 요청할 시 신호를 중계할 수 있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긴 도윤이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부탁해.」

「접선 요청 신호를 발신합니다. 수신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상관없었다.

「다른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아니, 고마워.」

「상담을 종료합니다.」

자판이 사라졌다. 채팅이 끝난 후에도 멍하니 홀로그램을 들여다보던 도윤은 곧 제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근미래적인 UI 속 유일하게 설치된 앱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히로인 컬렉션.

어차피 이 시점에서 제게 일어난 일이 스티븐의 소행인지를 가늠할 방법은 없다.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란 것도 있으니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있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지.’

방황하는 자라고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이유니 삶의 목적이니 하는 어려운 것은 몰라도, 도윤에겐 바람이 있었다.

그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원했다.

순수한 욕구를 따라 살아가길 소망했다.

‘그거면 충분해.’

문라이트를 누가 만들었는지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도구의 가치는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 따라 달려있다. 그래서 도윤은 은하를 공략하고, 기어이 자빠트린 것이다. 제 바람처럼 살아가려는 소망을 이룩하기 위해.

「히로인 컬렉션 앱을 실행합니다.」

「현재 공략 중인 히로인의 갱신 사항이 있습니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이제 수확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히로인 No.001 ­ 홍은하」

「나이 만 27세, 스타게이트 항공사 소속의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승무원입니다.」

「공략 진척도는 70%입니다.」

애플리케이션의 인터페이스가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적엔 22%에 불과하던 공략 진척도도 어느덧 70%에 달해있었다. 무지막지한 상승세였고, 그에 따라 돋보이는 특징도 몇 가지 있었다.

「히로인 수집을 위한 최저 진척도 수치를 달성하였습니다.」

「이제 히로인 No.001 스튜디어스 홍은하가 컬렉션에 추가됩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수집란의 해금이었다. 이전까진 텅 비어있던 그 공간에 앙증맞은 비행기 배지가 추가된 것이었다. 아마도 스튜디어스라는 은하의 직업에 맞게 안배된 표식 같았다.

「도움말 : 공략 진척도 70%의 달성은 히로인을 수집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저 수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수집된 히로인의 진척도는 100% 달성, 이른바 함락에 성공하기 전까진 계속 변화하며 수집 대상에서 또한 다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컬러인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 배지였다. 그런데도 색이 흑백으로 된 건 아무래도 이 수집이 완전하지 않아서인 모양이었다.

「도움말 : 공략 진척도 100%의 달성은 곧 해당 히로인의 완벽한 함락을 의미합니다. 또한 어떤 히로인은 이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특정 과제를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붙지 않은 히로인의 경우엔 통상과 같이 수치를 올릴 수 있으나, 그 속도가 대단히 더딘 편입니다.」

아직은 알아가야 할 게 산더미였다. 그러나 버겁단 느낌이 들기보단 즐거움이 앞섰다. 도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도움말을 정독했다. 배지를 건드리자 떠오른 인터페이스의 문구를 읽었고, 그것이 지난 정사를 회고할 수 있는 기능임을 깨달아 실행을 눌렀다.

삶이란 건 이렇게나 기꺼운 일이라 생각하면서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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