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1. 「No.001 스튜어디스 홍은하」 (2)
* * *
“날더러 이렇게 입고 레스토랑에 가라고?”
팔짱을 낀 은하가 턱을 치키며 말했다. 뉴욕 JFK 국제공항에서부터 서울 한복판의 백화점에 다다르기까지 옷 한번 갈아입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착 달라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청자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스타게이트 항공사의 유니폼 말이다.
“승무원복 입고 아무 데나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도 몰라?”
“여태까지 잘만 입고 다녔잖아요?”
“호텔은 의미가 다르잖아! 너 바보야?”
어깨를 으쓱거린 도윤이 정 과장을 바라보았다. 접객에 한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녀는 곧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마침 저희 백화점 10층에 최고급 스파가 준비돼있습니다. 구매하신 의류를 거기서 착용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백화점은 없는 게 있어선 안 된다. 오늘같이 VVIP를 접대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다행히 은하가 쓸어 담은 명품 중엔 당장 입을 수 있는 옷들이 많았고, 10층에 위치한 스파는 손님을 위한 샤워 시설까지 갖춰있었다.
“그럼 안내해 줘요.”
정 과장이 고갤 주억이며 가까운 승강기를 잡았다. 도윤은 에스컬레이터 방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네, 준비되시는 대로 바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범상찮은 관계를 지켜봤기 때문일까. 정 과장이 안심하라는 듯 그런 말을 덧붙였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선 건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만 도윤은 너무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끄덕였다.
은하는 아직 모른다.
그야 많은 돈을 쓰기는 했다. 난생처음 사치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도윤은 그녀와 가까워졌다. 끝간 줄 모르는 자존심 탓에 이제는 가면을 쓰는 것조차 잊은 여인은 그렇기에 도윤으로 하여금 빌미를 주었다.
그가 자신을 함락시켜도 좋다는 빌미를.
“정말이지, 즐겁다니까…….”
도윤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입가엔 뜻하지 않은 미소도 띄워져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층을 내려간 그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슬슬 이쯤에서 다시 현황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히로인 No.001 홍은하」
「나이 만 27세, 스타게이트 항공사 소속의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승무원입니다.」
「공략 진척도는 22%입니다.」
「공략 포인트 : 홍은하 히로인은 현재 당신을 경계하는 한편 얕잡아보고 있습니다. 이 양면적인 성향은 단연 그녀의 자존심으로부터 비롯된 오판입니다. 이제껏 그녀에게 구애한 남자들과 다른 모습으로 호감을 쌓고, 애써 유지하고 있는 자존심을 무너트려 적극 공략하십시오.」
주차장엔 정 과장이 호출한 리무진이 절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에 탑승해 비치된 소다 한 캔을 딴 도윤은 앱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한참 뒤, 공략 진척도가 100%에 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자니 옆문이 열렸다. 하얀 브이넥 블라우스에 새카맣고 옆이 트인 H라인 스커트, 수억짜리 장신구를 걸친 여인이 살짝 젖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나타났다.
은하였다.
유니폼을 입었을 때처럼 단정한 매력과는 또 달랐다. 세련된 도시의 여성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런 화려함이었다. 값비싼 향수를 은근하게 뿌려 풍기는 냄새도 몹시 도발적이었다.
“예쁜데요.”
“당연하지.”
히로인 컬렉션의 말이 맞았다. 앙칼진 은하의 목소리는 그녀가 제게 갖고 있는 경계심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제 외모에 대한 칭찬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그 모습에선 절 얕잡아보는 심리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식사는 뭘로?”
“한식.”
도윤이 그러자는 말과 함께 창문을 내렸다. 리무진 밖 주차장에는 정 과장을 위시로 한 백화점 직원들이 수십 명이나 나열해있었다.
“정 과장님?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음식 메뉴는 한식으로 좀 부탁드릴게요.”
“바로 연락 넣어두겠습니다. 쇼핑은 즐거우셨는지요?”
“물론이죠.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제 여자친구도 만족한 것 같은데요.”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언제든 내키실 때 저희 영업점으로 내방해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직원들 모두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도윤은 기꺼이 그러겠노라 말하곤 창문을 닫았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 출발했다.
* * *
호텔 스카이라인, 한식당 홍연.
미쉐린 가이드 3성으로도 유명한 식당은 과연 만족스러운 식사를 선사했다. 요리로 쓰인 재료의 수준부터가 남다르게 특별했고, 전채에서 주요리로 이어지는 구성의 창의성 또한 훌륭했다.
“입에 맞으십니까, 손님?”
뿌리채소 위에 올린 닭갈비. 곤드레나물밥에 얹어 먹는 육회. 입가심을 위한 동치미 국수. 무엇하나 황홀하지 않은 게 없었다. 무엇하나 흡족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서울 야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특실에서의 저녁은 이렇듯 즐거웠다.
“네, 정말 맛있어요.”
은하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TV에서나 보던 유명 셰프는 도윤과 그녀를 국빈이라도 된 양 대접했다. 일개 손님으로 왔다면 눈치를 줬을지 모를 촬영에도 허허 웃으며 응했고, 즉석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주방으로 들어간 지 몇 분 만에 내놓았다.
“곁들이실 술로는 천주를 골라봤습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저희 계열사에서 매년 손수 담그는 증류식 소주입니다. 감압식으로 증류한지라 탄내도 나지 않고 향이 몹시 흐드러진답니다.”
천주, 하늘의 술이란 글자가 새겨진 도자기가 백자 술잔 두 개와 함께 식탁에 올랐다. 접객을 하러 나온 셰프의 말마따나 향이 몹시 흐드러진 술이었다. 화한 느낌에 코끝이 찡할 정도로 독하였음에도 그 맛에 중독된 은하가 석 잔을 내리 비웠다.
“아흐, 이거 좋다!”
“꽤 독한 것 같은데 적당히 드시죠.”
“웬 참견?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소리 하네.”
“그쪽이 쥐란 걸 알기는 하나 봅니다.”
도윤이 싱긋거리면서 대꾸했다. 은하는 빈정이 상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어째 말없이 식사만 한다 싶더라니 슬슬 제 자존심을 다시 긁는 게 언짢았다.
“재수 없어. 딱 봐도 나보다 어린놈이 돈 좀 있다고 말대꾸나 해대고.”
“그래요? 그쪽이 워낙 동안이라 제가 연상인 줄 알았네요.”
“……흥, 뻔한 작업 멘트지.”
그러나 꿍했던 기분은 그 한마디로 쉽게 풀렸다. 어쨌거나 도윤은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백마 탄 왕자였으니까.
젊고, 잘생겼으며,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재산을 가진 청년이었으니까.
‘가끔은 이런 것도 좋네.’
은하가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벌써 네 잔째였다. 취기가 제법 오르는데도 목 넘김이 부드러워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거기다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흥취를 더했는지 과음 아닌 과음을 하게 만들었다.
“이제 술은 그만 드세요. 더 마셨다간 취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눈썹을 치켜세운 은하가 또다시 술병을 들었다. 조금 발그레한 얼굴로 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이내 퉁명스럽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방긋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그대로 제 SNS 계정에 로그인해 그것을 업로드했다.
한식당 홍연은 국내 최고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에 은하는 언젠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건 동료 승무원들의 말처럼 어떤 재벌 2세에게 구애받았을 때였다.
얼굴은 그럭저럭, 씀씀이야 뭐 재벌답게, 그러나 참 지지리도 떠벌거리던 놈이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뒤에도 몇 번인가 회사에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매몰차게 내쫓았다. 그러자 찌질하게 클레임 따위를 넣으며 한동안 괴롭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회사가 그런 사정을 이해해 주었단 것이다.
“식사 즐겁게 하고 계십니까, 두 분?”
셰프가 다시 방으로 찾아와 얼굴을 비췄다. 손에는 후식이 담긴 둥근 소반을 들고 있었다.
“후식입니다. 홍시로 만든 소르베와 곡차를 준비해봤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이렇게 셰프의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당시엔 자리를 비워서 그랬다지만, 원체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날의 공백은 그 남자가 여기 도윤만한 위상을 지나지 못했기에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맛있네요.”
“좋아요.”
도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은하도 조금 꼬부라진 혀로 덧붙였다. 셰프는 영광이라는 듯 허리를 살짝 굽혔다. 그리고 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도윤과는 다르게 셰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딴에는 격려의 의미였겠으나, 실은 엄청난 무례였다.
그럼에도 물론 셰프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불쾌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것도, 거의 인사불성이 된 상대를 배려한 것도 있었다.
“……많이 취하셨군요.”
“별로 안 취했거든?”
확실히 말도 술술 나왔고, 걸음도 사뭇 멀쩡했다. 그러나 발그레한 얼굴이 말하는 취기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마시라고 했잖습니까.”
“으, 지긋지긋한 잔소리.”
도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어디 사과는 할 수 있겠습니까?”
“사과? 아직도 내가 그런 걸 할 거라고 생각해?”
“데이트도 이제 슬슬 끝입니다. 계속할 게 아니라면 약속대로 사과해 주셔야죠.”
은하가 히죽거렸다. 그러다 곧 깔깔거리며 비웃었다. 취기에 힘입어선진 몰라도 그녀는 지금 아주 기분이 좋았다. 흡사 여왕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재벌에 이은 억만장자 후계자를 갖고 놀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이 남자는 그 재수 없는 떠버리와 다르게 호감형이기도 했다.
“난 잘못한 거 없거든? 사과는 오히려 네가 해야지. 그리고 이런 데이트라면 얼마든지 계속해 줄 수 있는데?”
“홍은하 씨,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취하신 것 같은데 그냥 가볍게 사과하고 집에 들어가세요.”
”후후, 싫은데? 그냥 데이트 계속해. 네가 원할 때면 언제든 어울려줄게. 그럼 되는 거 아냐? 네 돈이 나가지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책임지면 되지.”
술김에 내뱉은 말임에도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다. 이내 더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도윤이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이제야 조금 잘못 건드렸다 싶지? 너야말로 지금 사과하면 봐줄 용의는 있는데 어쩔래?”
“피차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네요. 아쉽지만 그냥 이대로 계속하는 수밖에요.”
“흐응, 이번엔 어디로 또 데려가서 재미를 보게 해주려나?”
“알면 재미 없죠.”
은하가 공감했다. 이런 즐거움은 그의 말마따나 미리 알았다간 반감되었으니까.
“가시죠.”
도윤이 앞장서며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 백화점에서처럼 계산도 하지 않았고, 나가는 길엔 예의 셰프를 비롯한 일동으로부터 인사까지 받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기꺼운 대접이었다.
그래서 은하는 승강기에 오른 뒤에도 계속 싱글벙글했다. 융단 깔린 복도의 고요함을 가로질러, 어떤 쌍문 앞에 도달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마치 기사처럼 문을 열어준 도윤의 태도에는 더욱 콧대가 높아져 기뻐했다.
달칵.
그리고 문이 닫힌 뒤, 실내를 둘러본 그녀의 정신이 빠르게 돌아왔다. 스카이라인 호텔의 최고급 객실 정경이 곧 있을 일을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긴?”
“오늘 잘 곳.”
도윤이 천천히 은하에게로 다가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의 허리에 손을 내뻗으며 윗옷 단추를 풀었다.
“뭐, 뭐하는 거야!”
“데이트 계속한다고 하지 않았나?”
기겁한 은하가 딸꾹질했다. 거기에 취기로 인해서 몸이 잘 겨눠지지 않았다. 그제야 제가 저지른 짓이 새삼 실감되기 시작하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자존심도 내팽개친 채로 애원했다.
“아, 알았어. 사과, 사과할게……!”
“늦었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회는 이미 끝나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