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1. 「No.001 스튜어디스 홍은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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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강남 일대에 위치한 백화점이 한창 피크일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텅 빈 채로 있었다. 매장 관리를 위해 자리한 직원 몇몇을 제외하면 정말로 사람 한 명 없었고, 점내로 들어서면서 흘깃 본 입구 밖에는 내쫓기다시피 한 사람들이 아우성이었다.
‘뭐야, 대체 얼마나 부자이길래 이런 게 가능하지?’
멀쩡하게 영업하고 있던 백화점을 사사로이 폐점시키다니,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도 이보다 터무니없진 않을 것이다. 하물며 어디 지방에 있는 작은 백화점도 아니지 않는가. 미래백화점 본점은 국내 선두를 지니는 규모와 매출의 점포다.
“정 과장님?”
“네.”
“무리한 요구를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겐 1인당 100만원짜리 상품권으로 보상해주세요. 비용은 제 쪽에서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은하의 허리를 감싼 채 함께 걷던 도윤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정 과장은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대꾸했다. 분명 그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맞지만, 사회적 신분과 재산을 생각하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어서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천 사장님께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시라고 하셨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도윤이 제가 잡고 있던 은하의 골반을 툭툭 두드렸다. 대화의 스케일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며 가볍게 내뱉었다.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맘껏 고르세요.”
“뭐라고요?”
“내기에 지면 오늘 하루 제 연인이 되기로 했잖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연인 같은 데이트 한 번이었다. 그러나 이미 반쯤 넋이 나간 은하는 그 미묘한 차이를 깨닫지 못했다. 오죽하면 도윤이 내뱉은 말을 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릴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그쪽은 여자친구한테 선물할 때도 백화점 대절 정도는 하는 사람이다?”
“저도 이런 건 처음 해봅니다. 사치엔 별로 익숙하지 않거든요.”
“책임지지도 못할 말은 하지도 마세요. 당신 재산 거덜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은하가 도윤의 손길을 뿌리쳤다. 손가락질과 함께 어깃장을 놓는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그러나 도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딴에는 불쾌할 수도 있는 태도인데, 씩 웃으며 제 손을 거두기만 할 따름이었다.
“새겨만 듣겠습니다. 실천은 이미 하고 있으니까요.”
원치 않는 스킨쉽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은하를 연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객기 부리지 마요.”
“그런 거 아니니까 제 선물이다 생각하고 고르세요.”
두 사람의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정 과장이 속으로 질색했다. 그녀 또한 급히 연락을 받았던 탓에 잘 알진 못했지만, 최소한 이 우도윤이란 남자가 VVIP에 해당한다는 것쯤은 어렵잖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야 온갖 유력자들이 가득한 백화점을 10분 만에 비우도록 만든 장본인이니까. 재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체의 총수도 이런 짓은 쉽게 할 수 없다. 그만큼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미칠듯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재산이 거덜 나기는커녕 백화점이 거덜 나진 않을까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좋아요, 후회하지 마세요!”
은하가 씩씩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를 내는 도중에도 품위를 잃지 않으며 또각또각 걷는 것이 천상 승무원이다 싶었다.
“당신 오늘 큰 실수하는 거야.”
화장품 코너였던 1층은 달리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제 피부에 맞는 용품이라면 이미 구비하고 있었거니와, 명색이 승무원이었던 만큼 면세점에서 구매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가까운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은하가 2층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부티크가 위치한 이곳은 보석 따위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제일 고상하기로 소문난 브랜드를 찾은 그녀가 안에 상주하고 있던 직원에게 물었다.
“신상 모델 있어요?”
“네, 이쪽 진열대입니다.”
“제일 비싼 건요?”
“이 제품입니다.”
부티크의 직원이 진열대 한가운데 전시된 제품을 가리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매장의 손님을 내보낸 순간부터 VVIP에 대한 얘기를 전달받아서인지 예사롭지 않은 접객이었다.
“에센셜 라인 네크리스, 총 22캐럿 상당의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 250개 및 8캐럿 상당의 브릴리언트 컷 핑크 다이아몬드 170개로 구성되었습니다. 체인은 18K 화이트 골드이며 옵션으로 플래티넘 이니셜 각인이 가능합니다.”
그 밑에 적힌 가격은 무려 3억 9천만 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액수에 흠칫거린 은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세요.”
“결제는 어떻게…….”
당황한 직원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VVIP를 상대로 한 물음으론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요컨대 실수였다. 미소가 일그러질 정도로 화끈한 결정이었던 탓에 무심코 하고 만 실수.
“포장해드리세요. 저희 점포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두 사람을 곁에서 수행하던 정 과장이 끼어들었다. 해당 직원에게만 보이도록 눈을 크게 뜨며 꾸중하듯 말했다. 질책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실은 비호하는 것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잘리는 것이 이 바닥이었으니까.
“가도 돼죠?”
은하가 직원을 향해 퉁명스레 물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그녀 또한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네!”
“그럼 먼저 가요.”
“실례했습니다…….”
부티크의 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은하는 피식거리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비슷한 수준의 브랜드를 몇 군데 돌아다니며 제일 비싼 물건을 점찍었고, 눈치 빠른 직원 몇몇이 제품을 권유하자 그 또한 사들였다.
그리하여 3층,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이는 디자이너들의 공간을 누볐다.
나아가 4층, 호화스러운 시계가 널린 곳에서 마음껏 손목에 찰 것을 골랐다.
또 5층, 평소엔 몇 달치 월급을 모아야만 살 수 있던 핸드백을 전부 구매했다.
그렇게 6층, 7층, 그리고 8층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아찔한 소비의 쾌감이 은하를 어지럽게 했다. 매 층마다 현실감각이 배로 무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만하면 충분히 혼쭐을 냈겠거니 싶어 바라본 도윤은 여전히 덤덤했다.
“정 과장님, 이 커피 머신 쓸만합니까?”
“쓸만한 정도가 아니라 걸작이죠. 홈 바리스타를 위한 네스프레소 컴퍼니의 정점입니다.”
“음…….”
어디 덤덤하기만 하다 뿐일까. 수억 원짜리 명품을 사들이기 바쁜 자신에 비해 수십만 원짜리 커피 머신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소박했다. 또한 아이러니했다.
“안마의자도 집에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거라면 이 브랜드를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막상 놓으면 안 쓸 것 같아서 사기가 겁나네요.”
사치를 모른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그게 거짓이었다면 이 30분 동안 산 물건이 겨우 하나일 리 없었으니까. 수십만 원짜리 커피 머신을 손에 든 도윤이 은하를 돌아보았다.
“다 골랐어요?”
“다 골랐죠. 조금만 빼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죠. 먹은 게 없어서 그런가 배고프네요.”
정 과장이 커피 머신을 대신 들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고 사양하는 도윤에게 한사코 건네달라며 받아낸 뒤 물었다.
“쇼핑은 이만 끝내시겠습니까?”
“네, 근처에 괜찮은 식당 있나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계열사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해 주세요.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시도록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결제는 따로 얘기할 필요조차 없이 진행됐다. 어떤 재력가들에겐 돈 얘기를 입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실례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죠. 천 사장님껜 나중에 보자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차량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생각하고 계신 메뉴가 있다면 그쪽에 도착하실 즈음 바로 드실 수 있게 조처할 겁니다.”
정 과장이 연락을 넣어두겠다며 전화를 꺼냈다. 도윤은 그 사이 어정쩡하게 선 은하를 보며 물었다.
“먹고 싶은 음식 있습니까?”
미래백화점의 계열사 호텔이라면 바로 스카이라인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대명사로도 쓰이는 그 호텔 레스토랑에는 이름처럼 서울 하늘을 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미디어에도 나오는 유명 셰프가 총괄함은 물론이다.
“뭐든 말씀하세요. 지금 미리 얘기해둬야 가서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 물건 얘기는 쏙 빼놓네. 은근슬쩍 넘어가려 하지 마요. 당신이 계산하기로 했잖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여기 과장님이 나중에 제가 지정한 계좌에서 인출할 거예요.”
“얼만지 알고요?”
“꼭 알아야 합니까?”
은하가 별 소릴 다 듣겠다는 듯 쏘아붙였다.
“기가 막혀! 그럼 내가 여기 백화점에서 얼마나 쓰든 상관없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대꾸하기엔 별로 실감을 내게 만들지 못할 모양이었다. 도윤이 막 전화를 끊은 정 과장을 부르더니 그녀에게 질문했다.
“정 과장님?”
“네, 예약 완료됐습니다. 주차장에 리무진 대기시켜놓았으니 바로 출발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충 얼마일까요?”
“구매하신 물품 말씀이시라면 한 90억 상당일 것 같은데요.”
은하가 내심 놀랐다. 애초에 그러려고 쓸어온 것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도윤은 물론 정 과장까지도 금액에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한술 더 떠 도윤이 물은 금액은 그런 게 아니기까지 했다.
“아뇨, 여기 점포 1년 매출 말입니다.”
“그거라면 작년을 기준으로 약 2조쯤 될 겁니다.”
“그렇다네요. 1년 매출도 감당이 가능한 수준인데 여기 백화점 안에서라면 얼마나 쓰든 상관없겠죠.”
스티븐이 건넨 모리스 컴퍼니의 주식만 팔아도 그 정도는 거뜬했다. 차명에 억지로 쥐어준 것이라지만 어쨌거나 실소유주는 도윤이었으니까. 더구나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미래백화점의 지주회사는 모리스 컴퍼니가 35%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총수를 비롯한 사장단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신, 진짜로 스티븐 모리스랑 후계자예요?”
“그거라면 아니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그럼 도대체 뭔데요?”
“계부도 아버지라 부른다면 부자지간이라 할 수는 있겠죠.”
“……!”
은하가 경악했다. 자세한 신분까지는 모르고 있던 정 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스티븐 모리스라는 이름의 파급력이란 대단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금세기 최고의 대부호란 별명을 가진 남자였으니까.
“이제 좀 사과하실 마음이 듭니까?”
능청스럽게 웃은 도윤이 은하의 자존심을 긁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그리고 앞선 일로 현실감각이 무뎌진 그녀는 한치도 굽히지 않으며 발끈거렸다.
“그렇게 돈만 많으면 다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사과는 역시 요원하단 말처럼 들리네요.”
“어림도 없어, 난 너처럼 재수 없는 녀석이 제일 싫거든.”
“내기에 동의한 것 아녔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데이트해주고 있잖아.”
얄밉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득의양양한 그 표정에선 귀여운 부분이 더 컸다. 도윤이 마침 듣고 싶었던 말이라며 흡족해하곤 내뱉었다.
“그럼 식사나 하러 가야겠군요.”
데이트는 계속된다.
“갑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은하에게 있어 자충수였다.
“메뉴는 그쪽이 고르세요.”
자신만 모르는, 그런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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