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0. 돌아온 탕아 (完)
* * *
빌라의 입구로 나선 두 남녀가 주택가를 거닐었다.
아직 해도 채 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런데도 맞은편 상점가는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그런 방문객을 노리는 택시가 더러 정류해있었다.
도윤이 은하를 끌고 다니듯 한발 앞서나갔다. 잔뜩 화가 난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데이트는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데이트였다.
“어딜 가는 거예요?”
“알면 재미 없죠.”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 바로 경찰 부를 거니까!”
표독스럽게 몰아붙인 은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유니폼을 입은 채로 그런 태도를 보이니 사근사근했던 기내의 모습과는 달리 또 도도한 맛이 있었다. 주머니 속에 든 스마트폰을 꺼낸 도윤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택시를 잡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면 불러도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부자라면서 차도 없는 모양이네요.”
딴에는 빈정거린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면허조차 없었던 도윤에게 그런 말은 별 타격이 되지 못했다. 적당하니 그녀의 말을 넘긴 그가 때마침 저희 앞을 지나던 택시 한 대를 잡았다.
그래도 일행이랍시고 은하가 타기 쉽게 문을 열어주었고, 그녀가 끌고 온 여행가방은 트렁크 뒤쪽에 손수 싣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흥.”
물론 은하는 그런 대접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 사기꾼 남자가 제 눈에 띄어서 어떻게든 관계의 싹을 틔워보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지금껏 그녀에게 구애한 유력자들은 돈을 퍼부었음 퍼부었지 몸을 쓰려 들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미래백화점 본점으로 가주세요.”
기사가 룸미러로 은하를 흘깃하더니 끄덕였다. 아마도 승무원 유니폼을 훔쳐본 듯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옷이었고, 그걸 걸치고 있는 여성의 미모 또한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미래백화점?”
“네.”
“거긴 가서 뭐하게요?”
“알면 재미 없을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같은 대답이었다. 은하가 대답하기 싫으면 관두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도윤은 꽉 끼는 그녀의 유니폼을 바라보다 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히로인 No.001 홍은하」
「나이 만 27세, 스타게이트 항공사 소속의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승무원입니다.」
「공략 진척도는 9%입니다.」
잠깐 실행시킨 앱에서 못 보던 항목이 있었다. 기내에 탑승하고 있었을 땐 그저 빈칸으로만 보였던 항목이었다.
공략 진척도.
완전히 남남이었던 은하와 이렇게 동행하고 있다는 건 분명 큰 성과였다. 정당한 클레임과 능글맞은 태도로 얻어낸 내기는 확실히 이 히로인을 공략하는데 공헌하고 있었으니까.
‘뭘 기준으로 하는 건지 궁금하네.’
유니폼도 채 갈아입지 않은 승무원과 이렇듯 데이트를 하는 게 9%라고 했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오늘 밤엔 얼마나 더 오른 수치가 표기될까?
「도움말 : 공략 진척도는 히로인을 함락시키는 데 있어 도달한 지점을 수치로 알아볼 수 있게 합니다. 해당 기능은 히로인마다 각자 다른 산정 방식을 사용하며, 100%를 달성하여 완전히 함락하기 전까진 현재 상황을 반영해 등락합니다.」
홀로그램에 손가락을 가져갔던 도윤이 앱을 종료했다. 스티븐이 건넨 스마트폰은 통신사니 요금제니 하는 번거로운 것들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전세계 어디서든 통화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위성전화였으니까.
“……흠.”
지루한 비행이 이어지는 동안 도윤은 스마트폰의 실질적인 기능을 꼼꼼히 살펴봤었다. 자칭 Moonlight라는 프로그램은 계부와의 연관성을 부정했지만, 제게만 보이는 홀로그램이 아닌 액정 속 평범한 소프트웨어에는 그가 안배한 것들이 가득했다.
이른바 모리스 인베스트먼트라 불리는 뉴욕 본사의 관계자들. 스티븐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이사회 의장이나 CEO, 또는 법조계 등 다방면에서 유력한 인사들.
아마도 그가 이 스마트폰을 건네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을 터였다. 어쨌거나 뉴욕은 이곳에서 16시간이나 떨어진 곳이었으니까. 물론 동아시아에 위치한 먼 나라라고 제 영향력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래도 약간의 지연은 있지 않겠는가.
이윽고 등록된 연락처를 둘러보던 도윤이 스마트폰을 귀로 가져갔다. 어딘가 전화를 걸었는지 친숙한 발신음이 몇 번 울렸고, 중년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천 사장님?”
“누구십니까?”
“우도윤이라고 합니다.”
쿠당탕! 스마트폰 스피커 너머에서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화기를 살짝 뗀 채로 기다린 도윤은 잠시 후 들려온 신음에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어쩐 일로 연락 주셨습니까?”
천 사장이라 불린 남자가 이내 공손해진 어투로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어서인지 아픈 것도 싹 잊은 모양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뵈었었죠?”
“예, 모리스 씨와 함께요.”
“와주셔서 감사하단 인사도 좀 드릴 겸 찾아뵈었으면 합니다만.”
“아이고, 언제든 환영이죠. 벌써 귀국하셨습니까?”
“막 들어왔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마중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VIP쪽 주차장에 사람 보내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곧 가서 뵙죠.”
짤막한 인사를 나눈 도윤이 전화를 끊었다. 택시는 어느덧 커다란 백화점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VIP용 주차장에서 세워달라고 주문한 그가 제 옆에 앉은 은하를 흘깃 쳐다보았다.
바로 옆에서 한 통화라 그 내용을 생생하게 들었을 그녀는 혹시나 하면서도 애써 모른 척 창밖만 들여다보았다.
“데이트 준비하셔야겠네요.”
“보면 알겠죠.”
은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직도 도윤이 사기꾼이란 생각에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택시가 주차장으로 진입할 즈음엔 그녀의 표정에도 놀라움이 찾아왔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기사가 말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문이 열렸다. 주차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열댓 명의 직원 중 하나가 에스코트한 것이었다. 과장 명찰을 단 여성은 도윤이 내리자마자 다른 직원들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은하가 내린 뒤에도 똑같이 반복했다.
“당점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고객님의 안락하고 즐거운 쇼핑을 도울 정인화 과장이라고 합니다.”
“트렁크에 짐 있습니다. 그리고 지갑을 안 가져와서 그런데 택시비 좀 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상사의 명령을 받은 직원 중 하나가 기사에게 택시비를 지불했다. 다른 직원 둘은 트렁크를 열더니 은하의 여행가방을 내려서 끌었다.
“거짓말…….”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은하는 도윤이 다가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 옆에 있는 남자가 정말 스티븐 모리스의 후계자인진 모르겠어도, 최소한 이 백화점에서 손꼽히는 귀빈임은 확실했으니까.
“이제 인정하겠습니까?”
“돈 몇푼 쥐어주고 사람 고용한 거죠?”
“어째 아직도 못 믿겠단 얘기처럼 들리는데요.”
“당연하죠! 남의 영업장에서 이런 사고를 치고도 무사할 거 같아요?”
도윤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참 귀여운 반응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게 문을 열어준 과장을 호출하더니, 점내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 과장님.”
“네, 고객님.”
“천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한 번 물어봐주세요. 오늘 절 위해서 백화점 문을 일찍 닫아줄 수 있냐고요. 제 여자친구가 느긋하게 쇼핑 한 번 해보고 싶은 모양이네요.”
아직 저녁도 아닌 시간이었다. 영업을 종료하기까지 서너 시간이나 남은 마당에 점내를 모두 비워달라는 요구라니 참으로 터무니 없었다. 오죽하면 온갖 유형의 인물들을 상대했을 과장조차도 표정관리가 안 될 정도였다.
“손님, 그건…….”
“전화부터 먼저 해보세요. 안 된다면 제가 양보하도록 할 테니.”
정 과장이 머리를 숙이며 고분고분 답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은하는 그 반응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백화점을 비워달란 요구를 해놓고 양보란 표현을 쓰는 것도 웃긴데, 그 말에 또 납득해서 전화를 돌리는 직원이라니.
“사장님, 정인화 과장입니다. 지금 손님께서 요청하시는 게 있어서…….”
정말이지 고용이나 매수한 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 예. 실내에 손님이 없게끔 전부 비워달라고 하십니다.”
전화를 붙잡고 소곤거리던 정 과장이 당혹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 하지만 지금 VIP룸에 문라이트 홀딩스 윤 사장님도 계신데…….”
이어진 말로 미뤄보아선 원하는 대로 해달라는 답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린 그녀가 이어진 호통에 고분고분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저, 고객님?”
“가능하다던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천 사장님께서 1시간 안에 도착할 예정이니 인사드리겠다고 하십니다.”
도윤이 끄덕거렸다. 그러나 정 과장은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었는지 그에게로 다가와 속삭였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한 은하가 혹시라도 듣지 못하게끔 배려함이었다.
“죄송합니다. 안에 귀빈 한 분이 더 계셔서 그분은 고객님께서 양해를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서로 마주칠 일 없도록 조처할 터이니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VIP룸은 들어갈 일 없을 것 같거든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허리에 찬 무전을 든 정 과장이 즉각 조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창 영업 중이던 백화점은 직원들을 제외한 모든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냈고, 사죄의 말을 전하는 방송과 함께 입구에서 상품권 따위를 보상으로 내놓았다.
“10분만 기다려주시면 입점 가능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한바탕 파란을 몰고 온 도윤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상사의 지휘 하에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는 은하에게로 다가갔다.
“사과할 준비는 됐습니까?”
“말도 안 돼…….”
“아직이라면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아요.”
오랜 비행 시간, 귀국 후 이동을 거쳤음에도 주름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한 유니폼이었다. 육감적인 몸매에 꽉 끼는 그것을 보고 손을 내뻗은 도윤이 은하의 허리를 제 팔로 감쌌다. 마치 이 승무원이 제 여자라는 것처럼 과시한 뒤 흠칫한 그녀에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래도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탕아가 돌아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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