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0. 돌아온 탕아 (4)
* * *
운항이 끝났다.
승객을 내보낸 뒤 남은 업무까지 모두 마친 은하는 동료들과 함께 공항으로 돌아왔다. 다른 장거리 항공편의 승무원도 그렇지만, 미주 노선은 그 비행시간이 긴 편이었으니만큼 곧바로 퇴근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돼있었다.
“흐으, 피곤하다!”
작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편 은하가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보는 눈이 없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국책 항공사인 스타게이트의 규정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반드시 단정한 용모와 조신한 태도를 요구로 했으니까.
“얘들은 언제까지 통화하려고 저러는 거야…….”
같이 퇴근하기로 약속한 동료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절반은 애인과의 통화였고, 또 절반은 가족과의 통화였다. 제법 잘나가는 승무원이었음에도 귀국할 때마다 연락할 사람이 없던 은하로서는 항상 피하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
“은하 언니!”
“응, 끝났어?”
제일 먼저 나갔던 후배 하나가 실색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 이변을 눈치채지 못했던 은하는 조금 나른한 표정으로 시선을 향하다가, 이내 그녀가 내뱉은 말을 듣고 나서야 흠칫했다.
“사무실에서 당장 올라오래요.”
“뭐? 갑자기 왜?”
“모, 모르겠어요. 선임 사무장님이 10분 안으로 오라고 막 화나서 소리지르시던데…….”
영문을 몰라 갸웃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찬가지로 통화를 이유로 잠시 떨어졌던 다른 승무원들 또한 하나둘씩 돌아와 입을 보탰다. 다들 하나같이 굳은 표정인 게 사태의 심각성이 여간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하야, 수석 사무장님이 너 찾으셔…….”
“나도 지금 사무장님한테 연락 받았어. 미주로 레이오버 한 승무원들은 전부 사무실로 오래.”
“대체…….”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여행가방을 끌고 느긋하게 퇴근할 예정이었던 은하가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스타게이트 항공사의 사무실은 인천국제공항 최상층에 위치했다. 가까운 승강기를 타고 5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일단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막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은하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다소 채신없어 보이는 것도 감수하고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실례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한 뒤, 쏜살같이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사무장님, 선임승무원 홍은하입니다.”
“저희도 왔어요.”
실내의 분위기는 과장 좀 보태서 초상집 같았다. 단순 업무를 맡은 인턴부터 시작해서 발권이나 클레임을 도맡은 지상직 승무원들까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법 관록 있어 보이던 여성을 비롯한 세 명의 상사들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로…….”
은하와 동기였던 승무원 하나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러자 선임 사무장이란 명찰을 단 승무원이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따귀를 때렸다.
쫘악!
고개가 홱 돌아갈 정도로 맹렬한 손찌검이었다. 그러고도 사무장은 분이 풀리질 않았는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희들 정신 나갔어? 승무원이 아니라 미친년들이야?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죄송합니다.”
뺨을 맞은 승무원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사무장의 옆에 서 있던 부사무장은 그녀를 진정시키고 호출에 응한 면면을 둘러보았다. 깐깐할지언정 부하를 아끼던 그녀가 답지 않게 몹시 화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까 기내에서 VVIP 두고 뒷말한 애들 앞으로 나와.”
그러나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사태의 경중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엄격한 승무원의 조직 문화를 생각해도 상사가 부하를 때리는 일은 몹시 드문 편이다.
“아무도 없어?”
그렇기에 이 순간, 사무실로 불려온 승무원들은 차라리 시치미를 떼는 게 나을 정도로 안 좋은 상황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홍은하, 너 내가 바보인 줄 아니?”
돌연 부사무장이 은하를 노려보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놀란 그녀는 움찔하며 눈빛을 받다가, 짜증이 가득 섞인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일등석 전세냈던 VVIP가 내리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 지 알아?”
알 턱이 없었다. 잔뜩 움츠러든 채로 상사의 말을 기다린 은하가 이어진 호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예민하기로 유명한 수석 사무장이나 선임 사무장은 그렇다 쳐도, 친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던 부사무장이 이렇게까지 혼을 내는 것은 정말 전례 없는 일이었다.
“졸부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다!”
“……!”
“너희들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 스티븐 모리스의 후계자야! 모리스 컴퍼니의 후계자라고! 수백억도 아니고 수백조씩이나 가지고 있는 억만장자의 후계자 앞에서 그런 뒷담을 해? 하물며 어머니 장례식 치르고 돌아오던 사람한테?”
사무실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그야 재산 좀 있는 사람일거라곤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티븐 모리스라니. 금세기 최고의 대부호라 불리는 억만장자에게 한국인 후계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 항공사따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너희들 인생 나락에 냅다 처박을 수 있는 재력가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 그 남자가 먼저 말을…….”
“말 좀 고깝게 했다고 그런 식으로 뒷말이나 한 게 잘한 짓이야? 너 퍼스트 클래스 승무원 맞니? SNS 팔로워 좀 끌고 인플루언서 소리 듣다 보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야?”
“부사무장님!”
“듣기 싫어!”
은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부사무장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도윤의 클레임 자체만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스티븐 모리스라면 얘기가 다르다. 만약 그의 귀에 제 후계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단 소식이라도 들어가면, 회사에 가해질 유무형의 압력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징계위원회까지 갈 것도 없어. 여기 두 사무장님이랑 얘기 끝났다. 넌 앞으로 무기한 면직 처분이니까 그렇게 알아.”
“부당해요!”
“고소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 그리고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하고 싶거든 시키는 대로 해. 그 남자 사는 곳 알려줄 테니까 가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용서받기 전까진 절대 돌아오지 마!”
시퍼렇게 눈을 뜬 상사들이 윽박을 질렀다. 뭐 하나 대꾸라도 할 기미가 보이면 야단을 치며 주눅들게 만들었다. 은하가 주먹을 꾹 쥐고 울분을 삼켰다. 뒷말이라는 게 어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던가?
후배와 동기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나눈 대화였었다. 그나마도 짧았고 두어번에 불과했다. 예의 당사자가 헤드셋을 낀 채로 잠든 것까지 확인하기도 했다. 언짢은 기분을 해소하기 위한 작은 일탈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대꾸만 조금 했을 뿐인데.
야속하게도 표적이 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문제의 그 대화를 나누었던 동기나 후배 모두. 그저 이 불편한 순간이 얼른 지나가길 바라기만 할 따름이었다.
“너희들도 조심해! 이런 클레임 한 번만 더 들어오면 너희들 전부 잘라버릴 줄 알아!”
선임 사무장이 말을 받으며 경고했다. 지금까지 무게를 잡고 있던 수석 사무장 또한 조용하게 말했다. 회사 경영진에게 가서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라는 걸 주지시키면서, 감정과 별개로 공적인 문제임을 깨닫게 했다.
“두 번은 없어요.”
그리하여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은하를 비롯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승무원들더러 그만 퇴근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처신들 잘하세요.”
그런 말과 함께였다.
* * *
택시 안.
목적지를 부른 은하가 인상을 구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공항에서 내린 도윤은 그길로 곧장 귀가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퇴근한 후 제 SNS나 돌보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 가득했던 그녀는 짜증이 가득한 채로 서울 모처로 향했다.
“도착했습니다.”
“여기요, 잔돈은 됐어요.”
“예에.”
시민의 숲이라 불리는 공원이 위치한 동네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광역버스가 오가는 정류장을 지나 주택가로 진입한 그녀는 제 스마트폰에 기록해둔 주소를 따라 어느 허름한 빌라 앞에 당도했다.
‘하, 이게 억만장자 후계자가 사는 곳이라고?’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그녀였다. 처음엔 화도 무척 나고 그랬지만, 흥분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진짜로 잘리면 어떻게 하나 싶은 것부터 사과를 받기는커녕 만나주지도 않으면 어떻게 하나 싶은 것까지.
‘이 사기꾼 새끼!’
겨우 5층짜리 빌라였다. 아무리 서울 도심권에 위치한 집이라지만 매매조차 3억을 넘을 것 같진 않았다. 당장 제가 살던 아파트보다 못한 집이었으니까.
부사무장이 알려줬던 주소를 따라 계단을 오른 은하가 501호의 문을 두드렸다.
쾅쾅!
어찌나 세게 두드렸는지 복도가 한가득 울릴 정도였다. 다행히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서 망정이지, 오밤중이었다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이웃들이 다 뛰쳐나왔을 것이다.
“예, 나가요.”
안쪽에서 듣기 좋은 미성이 들렸다. 그 남자였다. 이윽고 열린 문에선 185cm쯤 되어보이는 장신의 미남이 걸어나왔다. 기내에서 봤던 것과는 달리 후줄근한 평상복 차림이었고, 그래서 더욱 제 생각에 확신을 가진 은하는 이어진 그의 말을 듣고서 코웃음쳤다.
“아까 그 승무원 분이시군요. 사과하러 오신 겁니까?”
“꿈도 꾸지 마요!”
잔뜩 약이 오른 목소리였다. 그만큼 불쾌한 경험이기도 했고, 스스로 겁을 먹었던 사실이 수치스러워 더욱 강하게 반발하는 심리도 있었다.
“우도윤 씨라고 했죠? 그 유명한 스티븐 모리스 씨의 후계자라고요?”
“후계자라고 한 기억은 없는데요.”
“당연히 그렇겠죠! 당신 같은 사기꾼들은 원래 말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하니까! 도대체 어느 부자가 이런 허름한 빌라에서 거주하죠? 그쪽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없는 살림에 일등석 탑승해서 갑질하는 게 취미인가봐요?”
검지를 치켜세운 은하가 도윤의 가슴을 꾹꾹 누르며 도발했다. 어딜 봐도 사과하러 온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클레임을 건 입장에선 황당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했을 텐데, 도윤은 의외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렇군요. 사과하러 오신 게 아니었군요.”
“사과하러 왔었죠! 당신이 사기꾼만 아니었으면요!”
“전 갑질 같은 거 한 적 없습니다. 조금 퉁명스럽긴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가족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참작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요. 단지 제가 친절하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그런 뒷말을 들어도 된다는 얘기십니까?”
“그, 그건…….”
말문이 막힌 은하가 잠시 더듬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 또한 도윤의 수작이라고 여겼는지 숨을 고르고 다시 내뱉었다.
“어쨌거나 당신은 거짓말을 했잖아요! 그거라면 그쪽도 할말 없는 거 아닌가요?”
“거짓말 한 적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정말 모리스 컴퍼니의 후계자라고요?”
“엄밀히 말하면 후계자는 아니죠. 단지 그쪽에서의 바람일 뿐이니까.”
포브스에서 세계 최고의 부자를 선정할 때마다 꼬박꼬박 1위에 드는 것이 바로 스티븐 모리스다. 그런 그가 후계자로 삼은 것도 아니고, 삼고 싶어한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허언증 환자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은하가 경멸 어린 비웃음을 내뱉었다.
“점입가경이네요!”
“못 믿으시는군요. 사과를 할 생각도 없어보이고요.”
“저는 사기꾼한테 사과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이래 보여도 나름 인플루언서예요. 재벌 2세한테도 구애받은 적이 있을 정도인데, 그쪽 같은 사기꾼 하나 못알아보겠어요?”
나아가 강력하게 경고했다.
“어떻게 그런 신분을 사칭했는진 모르겠는데, 당신 사는 주소 말한 건 큰 실수예요. 졸부는커녕 서민도 안 될 사람이 남의 경력 갖고 장난치지 마세요. 내일까지 회사에 클레임 취소하지 않으면 공론화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두시고요!”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약 진짜라면 어쩌려고요.”
“허세 부리기는! 어디서 렌트해온 외제차라도 보여줄 생각이에요? 어림도 없어!”
피식 웃은 도윤이 문을 닫고 앞으로 나왔다. 검은색 바지에 셔츠 하나 입은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차림새는 허름했지만 외모는 썩 잘생긴 게 봐줄만했다.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흥, 구석에 몰리니 이젠 아무 말이나 막 내뱉네.”
“생각은 자유죠. 제가 이런 빌라에 산다고 해서 사기꾼으로 보인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요. 하지만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욕을 얻어먹는 건 아무리 예쁜 승무원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쁘네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억만장자도 아니고 후계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돈은 제법 받았어요. 제가 뒤를 이었으면 한다는 말도 정말이고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은하가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비웃었다.
“지금부터 그걸 증명하기로 하죠. 제가 진다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클레임을 취소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도 해드리죠. 대신 그쪽이 진다면 이번에는 진짜로 사과하는 겁니다. 거기에 진짜 억만장자가 후계자로 점찍은 남자와 연인처럼 데이트도 한 번 하고요.”
“하! 지금 저한테 수작부려요?”
“예쁘니까요.”
도윤이 덧붙였다.
“아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냥 사과하고 가시던가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은하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치졸한 사기꾼 새끼!”
내기? 좋아,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그런 안일한 속마음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증명해봐!”
“약속한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작하기도 전에 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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