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0. 돌아온 탕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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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했던 위스키를 건네받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스터 위에 잔을 올린 은하가 도윤이 앉은 곳으로 다가와 그것을 사뿐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실까요?”
생글생글한 영업용 미소가 몹시 보기 좋았고, 이어서 건넨 물음 또한 그 목소리의 나긋나긋함 덕에 귀가 즐거웠다.
“충분해요.”
도윤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살며시 떨리는 목소리를 혹시라도 들켰을까 싶어 무척 긴장됐다. 그야 제 스마트폰의 홀로그램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미 확인했지만, 지금 제 앞에 떠오른 화상은 그래도 혹시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히로인 No.001 홍은하」
「나이 만 27세, 스타게이트 항공사 소속의 퍼스트 클래스 담당 선임승무원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해금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홀로그램은 일종의 이력서를 띄웠다. 정면을 바라보고 찍은 증명사진부터 간단한 약력, 신상, 그리고 아직은 해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화상 몇 개를 송출했다.
‘사진과 영상이라.’
옅게 모자이크 된 그 화상은 히로인의 일상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검열된 채로 봐선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좌측 상단에 위치한 증명사진과 번갈아서 보고 나니 은하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아직 활성화된 기능이 아닌 모양이고…….’
주민등록표의 번호, 등본상 거주지 및 실거주지, 사용하고 있는 전화, 각종 자격면허까지. 상세한 내역을 따지자면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도윤의 말마따나 아직 활성화된 기능이 아니라서 그렇지, 지금 눈앞에 적힌 것들을 전부 알 수 있다면 은하를 공략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복종도를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성욕을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속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선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해야 합니다.」
갓 설치된 앱은 많이 미흡했다. 대부분의 기능이 결제를 유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하란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활성화된 극히 일부 기능은, 특히나 공략 포인트라고 적힌 기능은 앞으로 도윤이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공략 포인트 : 홍은하 히로인은 제 외모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높은 여성입니다.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선 상대가 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물임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승무원이란 직업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실수를 적극 이용하십시오.」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확인한 공략 포인트는 그런 조언 말고도 주의할 문구를 덧붙였다.
「도움말 : 공략 포인트는 히로인을 함락시키는 데 있어 가장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조언과 취향을 취합해 히로인을 공략하세요. 해당 기능은 히로인을 추가로 수집할수록 강화됩니다.」
도윤이 독한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술이 열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제 외모와 능력에 대한 자부심?’
확실히 승무원은 힘든 직업이다. 그리고 은하의 나이와 직책으로 미뤄봤을 때, 그녀는 지금껏 출세가도를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남들이 마다하는 궂은일조차 솔선수범했겠지.
‘하긴, 생긴 것만 반반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여느 항공사나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하는 고객은 상류계급이다. 그런 승객들을 전담해 접객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굉장히 고된 일이다.
물론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긴 했을 것이다. 아무리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다고 한들, 겨우 스물일곱밖에 안 된 여자가 이런 직책을 맡았단 것은 단 한 번의 진급 누락도 없었단 얘기가 되니까.
하지만 사람이란 게 과연 한 번의 실수도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던가?
제아무리 완벽한 초인이라도 그건 무리일 것이다. 적어도 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서 그는 홀로그램에 적힌 공략 포인트를 곱씹은 뒤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좌석 옆 수납장에 비치된 꾸러미의 포장을 뜯고, 세계적인 음향기기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헤드셋을 꼈다. 그리고는 편한 자세로 노래를 듣는 척 시간을 때웠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도윤의 계부는 단순한 재력가가 아니었다. 그는 금세기 최고의 대부호였다. 그것도 지금처럼 계속 돈을 긁어모으기만 한다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다던 라커펠러조차 뛰어넘을 게 확실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가 소유하고 있을 전용기의 숫자를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차라리 거느리고 있을 항공사를 세는 편이 훨씬 빨랐다. 그렇기에 스티븐은 제 의붓아들이 일개 항공사 일등석에 탑승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리하여 약간의 말씨름이 있었고, 결국엔 그가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부호도 나름대로 고집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어이 도윤이 탑승할 항공편의 일등석을 전부 구매했다. 덕분에 이곳 객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가까운 갤리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승무원들의 잡담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손님, 실례합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부터 다가온 은하의 발걸음 소리 또한 그랬다.
“……손님?”
모른 척 눈을 감고 있던 도윤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올렸다. 머리에 끼고 있던 헤드셋을 잠시 벗고 내려놓은 뒤, 메뉴판을 옆구리에 끼고 온 은하와 눈을 마주쳤다.
“예?”
“죄송합니다. 식사 시간인데 혹시 드실 예정인가 해서요.”
“아뇨, 별로 생각이 없네요.”
“그럼 이따 가져다드릴까요?”
“글쎄요, 정 배고프면 나중에 그쪽한테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윤이 귀찮은 듯 말했다. 이어서 은하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헤드셋을 끼며 덧붙였다. 진상까진 아니어도 매몰차기 짝이 없는 태도였고, 상대방을 별로 존중하지도 않는 일방적 통보였다.
“피곤하니 다시 부를 때까진 깨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은하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눈을 감았다. 이미 그녀의 사과 따윈 안중에도 없고,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스튜어디스는 감정노동이 심한 직업군 중 하나다. 그리고 암만 제 일에 철저한 사람이어도 은근한 스트레스 앞에선 빈틈을 보이기 마련이다. 지금 같은 인생역전이 있기 전엔 도윤도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잘 알았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생떼를 부리는 사람이 아녔다. 은근하게 쏘아붙이는 족속이었다. 그러한 군상을 접객하는 일이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을 노고가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나오실지 한 번 볼까?’
도윤은 그런대로 관찰력이 좋은 남자였다. 그는 앞선 통성명 때, 그쪽이라는 호칭을 들은 은하의 표정이 미세하게 무너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히로인 컬렉션의 공략 포인트가 운운했던 것처럼 그녀는 확실히 자부심 높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
자부심은 곧 자존심과도 같다. 그리고 자존심 높은 사람은 제 자존감이 훼손된 그 순간부터 어떻게든 보상받으려고 하는 심리가 있다.
은하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도윤은 아슬아슬하니 선을 넘지 않으며 그녀를 도발했다. 절 향한 뒷말을 내뱉기 좋게끔 축객령까지 내리고, 노래를 들으면서 자는 척 연기했다.
“언니, 일등석 승객 자요?”
“아까 잘 테니까 깨우지 말랬어.”
아니나 다를까,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갤리 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를 비롯한 서너 명의 승무원이 도윤을 씹는 소리였다.
“그 남자 말이에요. 발권 업무하는 지상직 친구한테 들었는데 어마어마한 부잔가봐요.”
“어머, 나도 들었는데. 일등석 매진된 게 저 남자 아버지 때문이래.”
“사무장님이 그러는데 뉴욕의 엄청난 기업인이래요.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인물이라던가. 완전 VVIP라 신원도 사무장급 이상 직원들만 알고 있대요.”
“그래봤자 졸부 아들 아냐?”
잘 꾸며입은 승무원들의 본색은 그야말로 적나라했다. 갤리에 틀어박혀 쉬던 여인들은 제 수다가 어디론가 샐 거라곤 꿈도 꾸지 못한 채 계속 떠들었다.
“하긴, 그래도 은하 언니한텐 안 되지. 재벌 2세한테도 대시를 받는 몸인데.”
“애초에 눈에 차기는 해요? 언니 입장에선 저거보다 더 잘난 남자들 수두룩하잖아. 우리랑 다르게 일 그만둬도 인플루언서로 먹고 살수 있고.”
대화는 낯간지러울 정도로 그 수위가 높았다. 더구나 소문은 와전되기 마련이라고, 피 한 방울 섞인 적 없던 도윤과 스티븐은 어느샌가 부자지간이 되어있었다. 나아가 은하가 잘나가는 SNS 스타고, 누군지 모를 재벌 2세에게도 구애를 받은 사실이 있음까지 알 수 있었다.
“너흰 맨날 나더러 그 소리 하더라. 나 일 그만둘 생각 없거든. 저렇게 밥맛없는 남자도 당연히 별로고. 나한테 계속 그쪽 그쪽 거리던데 얼마나 거슬리던지. 자기가 돈 많으면 다야?”
“역시 언니 눈엔 꽝인가 보네.”
“흥, 얼굴만 좀 반반하지 재수 없어.”
곧이어 다 함께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한술 더 떠 맞장구까지 쳤다. 그리고 그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도윤은 피식거리면서 좌석에 달린 리모컨을 집었다. 더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공략의 단서였기 때문이었다.
장장 16시간동안의 비행.
아마도 은하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그렇게 틈틈이 저를 씹을 터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도윤에겐 은하를 함락시킬 수단이 공고해졌다. 만족스러움을 느낀 그가 손을 들어 사람을 불렀다.
“여기요.”
“네, 손님.”
때마침 일등석 칸을 지나가던 승무원이 다가왔다. 이륙하기 전 도윤을 찾아와 인사했던 바로 그 부사무장이었다.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한층 높은 지위 탓인지 갤리에서의 수다로부터 따돌림당한 그녀가 살포시 웃었다. 영문도 모른채 미소를 짓는 것이 어째 조금 우스웠지만, 그래도 다른 승무원들과는 달리 제 직책을 수행할만큼 접객이 훌륭했다.
“뒤늦게 시장기가 돌아서 그런데, 식사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금방 메뉴판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하늘 위에서의 호화로운 식사가 시작됐다. 절 두고 떠들어대던 은하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음식을 날랐다. 그리고 주린 배를 채우고 난 도윤은 이내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제공되는 AVOD를 붙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같은 비행기에 탔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들과의 텍사스 홀덤.
최신이라기엔 민망하고 한물 갔다고 보기도 애매한 액션 영화.
마지막으로 남은 비행시간을 보여주는 안내 채널까지.
“승객 여러분, 잠시 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그 모든 것들로 지루함을 때운 끝에야 마침내 그런 방송이 나왔다.
길었던 여정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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