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8)
* * *
카이사리아의 겨울은 10월부터다. 10월의 또 다른 이름은 니보즈Nivôse. 눈이 내리는 달이라는 뜻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황태자의 슬픔이 하늘에 닿았는지, 초겨울부터 눈이 내렸다.
슬픔에 젖은 황태자는 알현실 안의 옥좌 위에 어머니의 시신을 안치해 두곤, 그 넋 나간 인형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부비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잃어버린 어머니의 온기만을 바라였다.
제국의 재상 루진 아르페지나와 재무관 모렐 카니나는 황태자의 은둔 생활이 오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강인한 영혼을 가진 분이시다.
오래지 않아 훌훌 털고 일어나, 왕의 의무를 다하실 거라 믿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예상보다 컸는지, 황태자는 쉽게 슬픔을 털어내지 못했다.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12월 29일. 드디어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 되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2월 32일. 오늘도 또 눈이 내렸다.
12월 35일.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한 사람의 슬픔 탓에 봄이 오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냥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계의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의 슬픔입니다. 이 세계가 그 분의 소유이자, 꿈일진대.”
기적의 증명 앞에서 모렐은 허망해했다. 신의 사랑을 잃은 성녀 에스텔도 씁쓸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12월 48일.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이 황태자가 무엇과 싸워왔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싸워왔던 것이다.
황폐해진 황태자의 마음은 겨울을 불러왔다.
12월 57일. 극단적인 주장이 하나 나왔다. 겨울을 불러오는 황태자를 죽이자.
“소용없을 거예요. 오라버니께선 죽지 않을 거예요. 설령 운 좋게 성공한다 치더라도, 오라버니의 죽음과 함께 세계도 붕괴할 거예요.”
황녀 아스트리아는 오라버니의 슬픔을 절절히 이해하고 느꼈다.
그녀는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았고, 바꿀 수 없는 섭리에 절망했다.
12월 74일.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영원한 백야의 도래였다.
“너희 모두 죄인이야! 황태자에게 상처만을 주었어!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건데? 그 아이는 올해로…… 19살이야.”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울었다. 어린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다.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천재라고 한들, 결국은 어린애.
우리들은 대체 열아홉 살 소년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
여린 마음은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금이 가고 있었다. 못되고 이기적인 어른들은 간신히 버티던 아이에게 슬픔만을 계속해서 얹어주었다.
그래서 부서진 것이다. 황태자는.
“당신이라고 뭐가 달라! 태자 전하께 가장 많은 상처를 안긴 사람은 황태자비, 당신이잖아!”
율리아 게일포드가 발끈해서 외쳤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알아……. 내가 제일 잘못했다는 거. 그래서 미안해. 나도 사과하고 싶어……. 사과하고 용서받고 싶어.”
황태자도 어렸던 만큼 황태자비도 어렸다. 이기심이 사랑인 줄 알았다. 불타는 소유욕이 애정의 발로인 줄 알고 착각했다.
“단지 사랑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사랑이란 말은 상처와 이음동의어. 끝없이 내리는 눈이 욱씬욱씬 상처에 내려앉는 겨울이 왔다.
***
알현실에 홀로 그리움만을 삼키고 있는 황태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레온 게일포드.”
여기사 율리아의 아버지, 게일포드 공작이었다. 늙은 공작은 지팡이에 의지해, 간신히 노구를 운반할 수 있었다.
불세출의 명검사라는 말도 옛말. 세월의 무상함에 아쉬움만을 삼키며, 죽는 날만을 기다리던 노공작이 왜 황태자를 찾아온 것일까.
노공작은 알현현실 중앙을 가로질러, 황좌 밑 계단을 올라, 황태자 옆에 섰다.
“황후 전하시군요. 이십여 년 전, 처음 뵈었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죽어서도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노공작은 손을 뻗어, 소피아 아르첼의 은발을 매만지려 했다.
“만지지마.”
어머니의 시신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부비던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살기어린 눈동자.
황제 아슬란을 닮은 눈매에, 노공작은 씁쓸함을 머금었다.
레온 게일포드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황태자 곁에 앉았다.
아무 말 않고, 황태자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듯, 조용히 곁에 머물러주려 했다.
“저리 가. 나는 네가 싫어.”
“허허. 어린 아이 같은 투정이로군요.”
황태자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노공작에게 증오서린 분노를 내비쳤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고백했다. 어마마마를 황제에게 바친 사람이 바로 너라면서. 네가…… 사람 새끼냐? 차라리 죽여 드리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어마마마께서 이십여 년을 수치와 치욕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도,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저를 원망하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저도 묻겠습니다. 왜 제게 복수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마마마께서 바라지 않으셨다. 이 카이사리아에서 그나마 어마마마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 너라면서.”
황제가 소피아 아르첼을 노리개로만 삼을 생각이었다면, 황후로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소피아 아르첼을 굳이 자신의 황후로 삼았다.
누군가의 뒷공작이 있던 탓이다.
“태자 전하. 저는 운명처럼 당신의 탄생을 예감하였습니다. 카이사리아의 영광을 드높일 당신께, 사생아의 멍에를 드리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프러시아 왕녀셨던 소피아 님을 황후로 올려드린 겁니다.”
“영속될 역사와 대의를 위해서? 정말 하찮군. 그래서 만족하시나? 지금의 결과를?”
황태자는 망가졌고, 그는 어머니가 안 계신 세계를 저주했다.
그가 꾹꾹 눌러온 근심과 슬픔이 풀려나, 영원한 겨울이 왔다.
왜 겨울인가.
어머니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길 바라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고향이 눈의 나라 실프러시아라서.
“말해보라. 레온 게일포드.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나? 하계의 왕자란 무엇인데? 너 또한 하계의 왕자이지 않았느냐?”
“허허. 그것까지 알아내신 겁니까?”
레온 게일포드는 황제 아슬란의 이복형이었다. 카이사리아 황실의 숨겨진 사생아.
“왜 포기했어? 너의 의무.”
“그것은 제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황위가 탐나지는 않았나?”
“전혀요. 저는 세실리아만 있으면 족했습니다.”
세실리아 데 히스페리아. 레온 게일포드의 부인. 그리고 율리아 게일포드의 어머니.
소피아 아르첼 이전에 카이사리아 제일의 미녀로 일컬어지던 사람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왕의 자격을 물려받을 이는 특별한 재능과 운명적인 사랑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는 검의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세실리아를 만났습니다.”
“운명적인…… 사랑?”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계의 왕자가 가혹한 의무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 사랑을 가르쳐줄 별의 불꽃이 분명 있었겠지요. 다만,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황태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후회와 실패를 곱씹었다.
“나는 사랑을 몰라. 내게 존경을 표한 인간은 많았지만, 전부 지겹고 귀찮았어.”
“설마 그럴 리가요. 당신은 19년 동안 왕의 의무를 견디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짊어질 수 없는 짐입니다.”
“왕의 의무를 견디기 위해 하계의 왕자에겐,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줄 별의 불꽃이 준비되어 있다 하였나?
내가 사랑을 하였다면…… 오직 어마마마만을 사랑했다. 되돌리고 싶어. 어떻게 하면 어마마마께서 살아나실 수 있지?
내가 신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해야 하잖아. 내가 지금껏 다한 의무에 대한 보상으로, 어머니 한 사람쯤은 돌려주어도 되잖아.”
황태자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또 다시 눈물이 쏟아져,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노공작은 황태자의 등을 조심히 토닥여주었다.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그저 조금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인간. 하늘의 여제께서 정하신 섭리는, 죽음은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전하.”
신이되 신이 아닌 신. 왕이되 왕이 될 수 없는 왕.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하계의 ‘왕자.’
“부조리하구나.”
노공작의 방문은 황태자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좌절감만이 더욱 커졌다.
“이제 나는 왕이고 싶지 않아. 어차피 그대는 왕의 의무를 다하라고 나를 다그치러 온 것이 아닌가. 포기하겠다. 그대처럼. 왕의 권리와 의무 모두 이양하겠다.”
“누구에게 던지시렵니까?”
“루진 아르페지나. 전대 아르페지나 공작이 좀더 욕심을 내었다면, 손자인 그가 왕이 되고도 남았어. 능력은 평이하지만, 성품은 너그럽고 정의롭지. 좋은 왕이 될 거야.”
어머니를 사랑하게 된 이후, 황태자는 자신이 왕의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좀더 도덕적이고, 흠결 없는 후대 왕을 필요로 했다. 그는 루진 아르페지나에게 선위할 생각이었다.
‘시시각각 영혼이 깨져가는 고통 속에서도, 카이사리아의 미래를 걱정했다니.’
역시나 존경받아 마땅한 어린 왕자. 노공작은 황태자가 가엾어졌다.
그는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었다.
“아마 루진 아르페지나는 하루도 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크. 내 예상보다 나약한 인간이라는 건가? 그럼 모렐 카니나는 어때? 성녀 에스텔은?”
레온 게일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전대 아르페지나 공작, 제 친우 프리울드가 황제위에 욕심을 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도 태자 전하의 탄생을 예감했기에, 황제 아슬란을 몰아내지 않은 겁니다.
당신의 영혼의 크기는 큽니다. 아마 역대 하계의 왕자들 중에서 가장 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왕의 의무에서 달아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마지막 하계의 왕자입니다.”
“그만! 대체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건데! 괴롭다. 괴로워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이만 편해지고 싶은데, 안식을 주지 않는구나.
나는 죽기를 바란다. 내게 죽음을 주지 않겠다면, 어마마마라도 되살려내. 나의 바람은 그것뿐이야.”
황태자의 마음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다. 아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듯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일포드 공작은 황태자를 이해하였다.
부인 세실리아를 잃고, 지금의 황태자처럼 그도 울부짖은 적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시간 속에서 슬픔은 흐려질 것이옵니다.”
이만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 하려던 일을 마저 해야 했다.
게일포드 공작은 지팡이를 들었다.
“마력!? 안 돼!”
화염의 마법이다. 노공작은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시신에 불을 붙였다.
“무슨 짓이야! 아아……. 어마마마…….”
타닥타닥 타들어간다. 마음도, 상처도, 추억도.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이 개자식!”
황태자는 레온 게일포드를 쓰러뜨렸다. 배 위에 올라타 멱살을 잡았다.
“왜 그랬어! 왜!”
“불쌍하신 분이십니다. 언제까지 황후 전하의 넋을 이 하계에 붙잡아둘 요량이십니까?
사랑하신다면 이만 보내주십시오. 그녀도 충분히 고통 받았습니다.”
그의 말이 옳았다. 납득할 순 없었지만. 황태자는 노공작을 놓아주었다.
“평생 너를 저주할 것이다. 죽어서라도 너를 저주할 것이야! 만일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네게 지금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것이야. 그러나 지금은…….”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별은 섭섭한 법이지. 하지만 상처는 지워질 것이다. 언젠가는.
황태자는 반 발자국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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