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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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황태자비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으며, 이번 의회에서 그녀를 폐하려 한다.
듣는 귀 많은 황궁인지라 소문이 금세 퍼지고 말았다. 가장 먼저 달려와 황태자에게 항의한 이는 황태자비의 오빠,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이었다.
우유부단하단 평이 있을 정도로 차분하고, 또 너그러웠던 루진이 처음으로 불 같이 화를 냈다.
“태자 전하. 미치셨습니까?”
여동생에 대한 모독은 오빠 자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루진은 분노하고 있었고, 황태자는 루진의 분노를 헤아렸다.
“루진. 먼 과거부터 너는 나의 충실한 지지자였다. 원한다면 네 스스로 제위에 오를 힘이 너에게 있었지.
그러나 너는 야심을 품지 않았어. 오로지 자기 위치에서 온 힘을 다했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너의 충심과 노고에 감사한다. 루진.”
기나긴 작별 인사. 혹은 유언.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와의 이혼은 정치적 자살 행위였다.
그 많은 영지와 재산을 포기하고 황실에 넘겼으나, 아르페지나 가문의 영향력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들 세력은 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황태자의 최대 지지 가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 아르페지나 가문과 척을 지는 것이다. 체제의 불안정과 반란의 위협을 무릅쓰고.
황태자는 루진을 영영 떠나보낼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분히 감정적으로 행동할 당신이 아니신데. 저는 당신이, 카이사리아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철인군주가 되실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황태자에 대한 루진 아르페지나의 기대는 컸다. 루진 아르페지나는 이상주의자였고, 그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완벽한 철인군주의 탄생을 기다려왔다.
황태자의 탄생은 루진에게 기적과도 같았다. 여기 이 황실의 적자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이 세상 가장 약한 자들의 슬픔을 알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주던 우리들의 왕자.
머리로는 지혜를 구하고, 심장으로는 지혜를 실현하니, 과연 그는 루진이 바라왔던 완전무결한 통치자.
“미안하다, 루진. 나는 네가 기대한 철인군주가 아니야. 한낱 인간일 뿐이지.”
그러나 황태자는 루진의 기대를 비참하리만치 짓밟고 말았다.
“왜 애써 가꾸어왔던 정원을 망치려 하십니까? 혹시 소피아 아르첼 때문입니까?”
황태자와 황후,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벌어진 근친상간.
설마 제국의 재상인 루진이 모르겠는가. 궁전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도, 소문의 증거까지 앞에 두고도, 애써 모른 척 했을 뿐.
“더럽습니다.”
“이해해주길 바라네.”
황태자는 루진의 과한 기대가 부담스러웠다. 황태자는 누누이 일러왔다. 그 또한 인간이라고.
유혹에 무너져버리는 한낱 인간.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너는 몰라, 루진. 너에게 삶의 시련이란, 학자가 되려는 걸 네 아버지가 반대했던 그 한 가지 외엔 없었겠지.
그마저도 너는 네 할아버지, 전대 아르페지나 공작 프리울드의 도움으로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머나먼 이국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전도유망한 학자가 되어, 이 카이사리아의 재상으로 발탁되었지.”
기사 가문의 이단아는 카이사리아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관료가 되었다. 루진이 스스로 미련 없이 버렸다 생각했던 아르페지나 공작위도 결국 그의 차지가 되었고.
본인은 다르게 생각할지 몰라도, 황태자가 보기에, 루진 아르페지나의 인생은 지금껏 평탄한 마찻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결핍을 몰라, 루진. 나는 말이야.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어. 나는 갓난아기였던 시절에, 어머니의 젖을 빨아본 적이 없어.
모후 전하께 나는 그녀가 강간당했다는 증거. 그 저주받은 증거품에게 젖을 물린다니, 소름끼치셨겠지.
그래서 어머니께선, 내게 사랑을 주시지 않았어.”
황태자의 기억력은 비상식적일 정도로 좋았다.
‘내다버려! 제발 그 아이를 내 눈 앞에서 치워줘!’
모후 전하께서 어린 자신에게 퍼부었던 폭언을 황태자는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랬던 어마마마께서 드디어 사랑을 주셨어. 기뻤지. 비록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형태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이었어. 내 앞에서 헐벗고 가슴을 드러내셨어.
어릴 적엔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젖. 다 큰 어른이 하기에는 추잡한 행동이란 걸 알았어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가만히 어마마마의 품에 안겨, 그녀의 젖을 빨았다. 한참을. 모유는 나오지 않았으나, 행복했지.”
황태자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루진. 이제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여전히 네가 존경하던 철인군주가 보이느냐?”
“아니오. 한 마리의 짐승이 보입니다. 지 어미랑 붙어먹은 검은 머리의 짐승이.”
근친상간은 인간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다. 짐승이나 하는 짓.
어미를 여자로 보고 안은 황태자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똑바로 보았어. 루진.”
루진의 환상이 부서졌다. 루진의 숭배를 깨부수고 달아난 짐승은 비로소 평온함을 느꼈다.
“이해를 바랄 수 없는 일이란 걸 안다. 그럼에도 너이기 때문에 이해를 바라게 된다. 나는 어마마마를 사랑해.”
황태자가 진하게 드러내는 근친상간의 욕망. 이를 황태자비 폐위 건과 연결시켜보면, 황태자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황태자의 숨은 의도를 알아챈 루진은 실소했다.
“기어코 소피아 아르첼을 당신의 비로 삼을 계획이시로군요.
애욕에 눈멀어 나라를 망친 암군은 많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들 중 하나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아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천지의 누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인으로 삼으려 한단 말입니까!”
더러웠다. 정말로 자신 앞의 황태자가, 자신이 존경했던 그 황태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좋습니다. 알데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꼴을 보아하니, 제 조카 알데어는 아버지께 사랑받을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요.
의회가 열리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천천히 잘 생각해보십시오. 당신께서 무슨 실수를 하고 계신지.”
협박이라면 협박. 황태자가 의회에서 황태자비 폐위 안건을 상정해도, 의회에서 그 안건을 용인할 리가 없었다. 명분이 부족하니까.
때에 따라선 역으로 황태자가 끌어내려질 수도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이라도 지키고 싶거든, 고집부리지 말고 헛된 욕망을 접으시라 루진은 충고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루진은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황태자가 예전의 철인군주로 돌아오길 바라였다.
“루진.”
여전히 자신을 이상의 틀에 가두고 싶어 하는 루진에게 황태자가 저항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너는 단 한 번도 여동생 위나를 여자로 본 적이 없느냐?”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려는 황태자에게 루진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다.
황태자는 자신의 체질을 오판했음을 깨달았다.
카이사리아 황가에는 이 세계의 슬픔과 근심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전해내려 온다.
그리고 이 의무를 견뎌내기 위한 능력과 권력이라는 보상 또한 같이 받는다.
이를 전부 합치니 저주가 되더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죽을 수가 없었다.
‘1, 2년 내로 슬픔에 삼켜져 죽어버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슬픔에 몸부림치다, 의지도 무디어져선, 삶의 의욕조차 잃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피를 나른해질 정도로 쏟았으나, 평온한 안식은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황태자는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영원히 남들은 이해해줄 수 없는 고통을 껴안은 채 영생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카이사리아의 전대 왕들도 결국 죽지 않았는가.
저주를 피할 방법은 존재했다.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방법이.
헌데, 위나 아르페지나가 낳은 아이, 알데어는 부적합자였다.
‘알데어가 안 된다면, 그 다음은 가까운 인척……’
여동생 아스트리아가 떠올랐다. 망각의 마력을 지닌 아스트리아라면, 자신의 기억을 지워가며 저주를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또 아스트리아가 낳은 조카 아이 클로비스 플랑섀넌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영혼의 크기가 아슬아슬하게 황태자의 저주를 물려받을 만큼은 되었었다.
‘안 돼.’
못난 오빠를 만나,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여동생이었다.
이미 불운한 삶을 살고 있는 동생에게 저주까지 얹어 줄 순 없었다.
조카 클로비스도 마찬가지. 어머니랑 강제로 헤어지게 만들고는, 이해관계에 따라 죽이려고까지 했다.
무슨 염치로 저주를 떠맡긴단 말인가.
황태자는 다른 대책을 강구했다.
‘꼭 카이사리아 황실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하계의 왕자가 되란 법은 없다.’
황태자는 옛 동화를 떠올렸다.
먼 옛날 어느 왕국에 세 왕자가 있었는데, 선왕의 뒤를 이어 그들 중 하나가 왕이 되어야 했다.
첫째 왕자는 왕국 최고의 전사였으나, 성격이 오만하고 포악했다.
둘째 왕자는 왕국 최고의 학자였으나, 그 성정이 음험하고 이기적이었다.
셋째 왕자는 뛰어난 형들에 비해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성품만큼은 가장 너그럽고 정의로웠다.
백성들은 누가 다음 대의 왕으로 적합한지 의논했다. 그러나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아, 인간들은 지혜의 정령 피레누트에게서 지혜를 구하였다.
피레누트는 말하였다.
가장 의로운 이가 왕관을 가질 자격이 있노라.
그리하여 능력은 평범했지만 가장 영혼이 올곧았던 셋째가 왕이 되었다.
‘세상의 이치가 동화와 같다면, 나는 이미 왕의 자격을 잃은 것이겠지.’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범한 황태자는 더 이상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왕의 자격을 잃은 것이다.
이 근심 많은 세게는 능력만큼은 평범할 지라도 영혼만큼은 순수한 새 황제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가장 정의로운 이에게 카이사리아의 권력을.
“루진 아르페지나…….”
황태자는 생각했다.
내 앞에서 그리 잘난 체를 하였으니, 자신이 있는 것이겠지. 한번 기회를 줄 터이니, 왕의 의무를 짊어지고 버텨보아라.
황태자는 루진 아르페지나에 황관을 던져주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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