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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24화 (24/31)

〈 24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4)

* * *

개인의 쾌락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리는 황태자가 행동 양식으로 삼은 유일한 것이었다.

전체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쯤은 당연하게 여겼다. 자기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아낌없이 갈아 넣었다.

그러나 딱 한 번.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죄로 모든 것을 잃게 될 처지가 되었다.

어머니랑 잤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태중에는 근친상간의 결과물이 자라나고 있다.

어째서 황태자는 어머니를 여자로 느끼고 말았는가.

변명.

황후는 강간범(황제)의 씨앗으로 잉태한 황태자를 미워했다. 어린 시절 황태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황후는 젊고 아름다웠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당대 최고의 미인은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었다. 은연중에 황태자는 어머니의 미모를 흠모하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괴로웠다. 황후의 품은 황태자에게 유일한 도피처였다.

‘알아. 전부 변명이란 거. 죄는 변명으로 덮어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시시각각 모후 소피아 아르첼의 배가 불러왔다. 황녀 아스트리아에 이은 두 번째 황궁 스캔들.

다행스럽게도 황후는 뱃속의 태아가 황제 아슬란의 아이라고 주장해 주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다.

황태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혹의 시선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믿어. 나는 행복해. 황태자.”

위나 아르페지나가 말했다.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황태자비는 행복하다는 말만을 달고 살았다.

어머니와 저지른 불륜이 죄스러워, 황태자는 황태자비 앞에서 더더욱 가정적인 남편을 연기하였다.

거짓된 사랑 아래서, 위나 아르페지나의 배가 불러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다시 슬픔의 계절이 물러가고 침묵의 겨울이 왔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각. 황태자비와 황후가 동시에 아이를 낳았다.

***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끈끈한 그림자가 묻어나오는 기분을 아는가.

황태자를 뒤덮은 저주는 점점 커져, 황태자의 오감마저 잡아먹었다.

낮인데도 어두운 복도를,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공간을, 그저 옛 기억에 의존하여 걸어 나갔다.

길의 끝에는 황태자비의 산실이 있었다.

“경하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태자 전하.”

음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시녀들의 인사. 황태자는 앞을 더듬어 산실의 문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와주었구나! 황태자!”

황태자비가 기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내심 황태자가 어머니인 황후를 먼저 찾아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날 우선적으로 생각해줘서 기뻐. 내가 너의 첫 번째이기만 한다면, 너의 그 어떤 치부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

황태자비는 그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자. 안아봐. 네 아이야.”

황태자의 저주를 물려받아야 하는 황손. 그 얼굴을 직접 확인해볼 필요는 있겠지.

황태자는 진흙처럼 눈에 붙어있던 저주를 손으로 닦아내었다.

잠시 색감이 돌아왔다.

이어 손에 묻은 저주도 털어내었다.

촉감이 돌아왔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권하는 대로, 황태자는 아이를 받아들었다.

“아들이구나.”

“응! 네 후계자가 될 아들이야!”

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황태자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들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매만져 보았다.

“황태자비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전하……?”

“잠시 황태자비와, 둘만 남아, 대화하고 싶구나.”

산실 안에 모여든 인파가 빠져나갔다. 아이는 유모가 데려갔다.

황태자비와 둘만 남게 된 황태자는 바로 의심을 털어놓았다.

“저 아이……. 누구 아이야?”

“왜 그래? 황태자. 당연히 네 아이지.”

“그렇다면 왜, 아이의 머리카락이 금색인 건데!”

황태자는 분노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머리카락 색이 금빛이었다.

놀란 황태자비는 서둘러 황태자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아기가 꼭 아빠를 닮으란 법은 없잖아? 내 머리카락 색을 봐. 아르페지나 가문이 자랑하는 아르페지나 블론드야. 황금을 녹인 듯한 금빛.”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하지만 황태자의 후계자라면 경우가 달랐다.

“하. 카이사리아 황가에는 특별한 의무랄지, 저주랄지. 그런 게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범인은 결코 견뎌낼 수 없는 왕의 자격이지.

왕의 자격이 무거운 만큼, 황가의 후손, 특히 장남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지.

나는 공감의 능력을 가졌지. 내 쌍둥이 여동생 아스트리아는 망각의 마력을 타고났고. 황제 아슬란조차 불꽃을 다루는 능력이 있었어.”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황태자.”

“네 아이에게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무능력자라고! 이래서는 왕의 자격을 물려줄 수가 없어!”

황태자는 몸과 마음 모두 한계였다.

아이에게 왕의 자격을 물려주고 이만 편해지고 싶었는데.

여전히 왕의 자격, 혹은 존재의 저주라 이름붙인 그것은 황태자를 옥죄고 있었다.

고통스럽다. 슬프고, 괴롭다.

더욱 비참한 것은, 꿈속의 마녀가 남기고간 경고가 사실이었단 것이다.

존재의 저주는 살아서 영원히 고통 받으라는 뜻의 저주가 맞았다.

세상의 근심을 대신 짊어지고, 영혼이 깨어져 끊임없이 고통 받는데,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이대로 가다간 황태자는 슬픔에 미쳐버린 채로 영생하게 된다.

기약 없이 이어지는 마음의 고통에 황태자는 절망했다.

“위나…….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지? 생각해둔 이름은 있어?”

절망과 상실감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황태자를 위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알데어. 황실의 적손이니까, 어디서든 의기롭고, 당당하라는 의미에서 알데어.”

알데어Ardeur. 용기, 의기, 패기 등을 뜻하는 카이사리아 어.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던 황태자비다운 작명이었다.

“그렇다면 아이의 이름은 알데어 아르페지나가 되겠군. 난 저 아이를 황실의 적손으로 인정할 수 없어.”

“그러지마, 황태자……. 전부 오해야.”

“옛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르네. 우리 황태자비는 음란해서 황궁의 기사와 시종들을 침실로 끌어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밤에 궁 밖으로 나가, 창녀 흉내를 내어 손님을 받았다고.”

“아니야……. 나는 그런 적 없어…….”

전부 헛소문이야. 하늘에 맹세코. 영광스런 아르페지나 가문의 이름을 걸고.

“너의 배신에는 이제 질려버렸다. 위나 아르페지나. 그 동안 미뤄왔던 결정을 이제 해야만 하겠어.”

“제발…… 그러지마, 황태자. 믿어줘……. 나를 사랑해줘, 황태자.”

황태자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이를 막 낳은 산모의 몸은 위나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아픈 배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진실을 알려야 했다.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걸레인 척 했지만, 사실 다른 남자랑 자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황태자는 위나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옛날, 글라디올러스 꽃이 만발했던 정원에서 황태자가 안아준 그 순간부터. 쭉.

알데어는 황태자와의 사랑의 결실이었다.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고……”

“치워.”

손을 잡으려 했지만 황태자는 위나의 손을 쳐냈다.

마음은 이미 추슬렀다. 다만, 겨울처럼 차갑게 가라앉았을 뿐이다.

자리를 뜨며 황태자는 선언했다.

“의회를 소집하여, 황태자비 폐비 안건을 상정하겠다. 새 황태자비를 올리겠어. 그녀의 태반이 너의 것보다 우수하길 바라지.”

“안 돼…….”

이대로 황태자비 자리를 잃을 순 없었다. 위나는 마지막으로 황태자의 다리를 붙잡고 애걸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끝까지 위나를 외면하려 들었다. 차가운 눈빛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하. 황태자. 옛 기억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했어?”

결혼 초기에 사소한 트러블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었다.

황태자가 과거의 냉담했던 남편으로 돌아간 만큼, 그녀도 지독했던 악처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였다.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너의 증오라도 사겠어. 증오도 관심이니까.

“너는 결코 나를 버리지 못해, 황태자. 설마 내가 모를 것 같아? 네가 네 어미인 황후랑 잤다는 거 알고 있어!”

아뿔싸.

황태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격정에 못 이겨 크나큰 실책을 저질렀다.

그가 저지른 근친상간의 죄악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나의 외도가 의심되니? 당연하지! 너는 친어머니와 배를 맞춘 쓰레기니까! 네가 더럽다고 해서 남들도 똑같다는 착각! 너 자신을 내게 투영하지 마!”

황태자비는 속이 뻥 뚫리는 후련함을 느꼈다. 역시 비련의 여주인공은 자신에게 안 어울렸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악녀가 적격이었다.

“네가 의회에서 나를 폐하려 한다면, 나도 너의 패륜을 폭로하겠어.

지금까진 의혹에 불과했지만, 그때부턴 공개된 진실이 되는 거라구? 후후. 너의 도덕성에 흠집이 날 거야.

네가 사랑하던 신민들도 돌아서서 너를 지탄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되겠지.

자. 이번엔 내가 너에게 명령하겠어. 나를 사랑하도록 해. 그리한다면 내가. 너의 치부를 숨겨줄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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