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3)
* * *
“아스트리아는?”
“황녀 전하께옵선 지금은 태자 전하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래…….”
야외 발코니에서의 티 타임. 여동생을 초대했지만, 여동생은 오빠를 만나고 싶지 않아 했다.
이 소식을 들고 온 시녀는 에크모르 나나이젤이었다. 이 황궁의 사용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부인이며, 현 카이사리아 황궁의 시녀장.
본래 3년 전 쯤에 은퇴하였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복직하였다.
육아에 무관심했던 황제 부부를 대신해, 황태자 남매를 돌봐주셨던 분.
“전부 태자 전하의 잘못이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훈계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제가 없던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합니다. 황후 전하랑도 화해하시고, 황태자비의 그 지랄 맞던 성정도 많이 누그러들었다지요?”
“……응.”
“반면에, 여동생은 골방에 가둬놓고, 갓난쟁이 아기와는 떨어뜨려놓기까지. 태자 전하. 제정신이십니까?”
겉으로 드러난 이유와 진짜 내막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쉬이 설명 가능한 것이 아닌지라, 황태자는 애써 얼버무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해합니다. 태자 전하의 성격상, 홀로 끙끙 앓다가 나온 결론이란 게 그런 것이었겠지요.”
에크모르는 허락 없이 황태자의 맡은 편에 앉았다. 황태자와 시녀장이 아닌, 연장자와 손자뻘 아이의 입장에서, 황태자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황녀 전하와 클로비스 공자를 떨어뜨려 놓은 이유가 무엇이십니까?”
황제가 싫어해서……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여유롭게 신분을 숨기고 여행을 갔다고 해두었지만, 귀족들 대부분은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수면 밑에서 조용히 진실이 흘렀다. ‘황제는 이미 죽었다.’
여기에 황태자는 거짓말을 한 스푼 보탰다.
작년 겨울, 율리아 게일포드의 친위 쿠데타가 있던 날. 사실 쿠데타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황제 아슬란이었다.
그런데 황제를 못 알아본 신권파 소속의 멍청한 기사가 황제 아슬란을 칼로 찔렀다.
그 멍청한 기사는 아르페지나 가문원일 수도, 혹은 랜시나, 이세티아, 카밀라니엔 가문 출신일 지도 모른다.
지금은 황태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황제의 죽음을 숨겨주고 있으나, 언제 돌변하여 귀족 가문들에게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울지 모르는 일.
이것이 각종 개혁 정책에 불만 많아진 귀족들이, 감히 황태자에게 이의제기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튼 간에, 다들 쉬쉬할 뿐 황제의 죽음은 기정사실로 못 박혀 있었으며, 카이사리아의 지배자는 황태자가 되었다.
그래서 에크모르가 황태자에게 묻는 것이다. 사생아 클로비스를 황녀에게서 떼어내어 먼 북방으로 보낸 까닭이 무엇인지.
지금은 당신의 권한으로 클로비스 공자를 황궁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지 않느냐?
에크모르의 당연한 물음에 황태자는 답했다.
“위나 아르페지나가 싫어해서.”
“무슨 뜻이십니까?”
“최근에 기분 나쁜 소문이 돌고 있거든. 클로비스 플랑섀넌의 친아비는 황태자인 나. 클로비스는 근친상간의 결과물이다.”
황태자는 담담했지만, 에크모르는 비분강개했다.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황태자와 황녀가 보통 남매 이상으로 친근한 사이인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냉대 탓에,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 근거한 것.
황태자 남매의 어린 시절을 지켜본 에크모르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황태자는 여동생을 결코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 또한.
“황궁의 시녀들을 중심으로 헛소문이 돌고 있는데, 니나와 발레리가 황태자비에게 귀띔을 해준 모양이더군.”
“나르슈센느 영애와 뷔랑시에 영애가 말입니까?”
니나 나르슈센느와 발레리 드 뷔랑시에. 황태자비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두 시녀였다.
말 많은 쏙독새들. 에크모르는 그 두 시녀를 단단히 혼구멍을 내주리라 결심했다.
“헛소리라 일축하던 황태자비였으나, 그녀도 인간인지라,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이더군.
그녀에게 확신을 주어야 했어.”
“그렇군요…….”
의혹을 부정하려면 냉철해져야 했다. 황태자가 조카를 냉대하지 않으면, 조카는 위나 아르페지나의 손에 죽는다.
“뭐, 오래지 않을 거야. 황태자비가 딸만 낳으면 돼. 딸을 낳으면, 클로비스와 약혼시킬 거야.
‘사촌끼리는’ 결혼이 가능하니까. 의혹은 부정되고, 의심은 가라앉겠지.”
이는 황녀 아스트리아에게 아이를 돌려줌과 동시에, 황태자비와 황녀를 화해시키는 최고의 수.
하지만…….
불길한 경우의 수를 떠올린 에크모르는 머뭇거리며 다시 질문했다.
“만약 황태자비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태자 전하.”
“글쎄…….”
마음 같아선 얼버무리고 싶지만, 피해갈 수 없는 질문. 만약 듣는 귀가 있다면, 그 주인에게 확실하게 전하라는 뜻에서, 황태자는 분명하게 답했다.
“새 후계자에게 클로비스는 위협이 된다. 존재 자체가 원죄.
위나 아르페지나가 낳은 아이가 남자 아이라면, 클로비스는 내 손에 죽는다.”
조카를 살해하여, 클로비스가 사실은 황태자의 아들이란 의혹을 부정할 것이다.
황손에게 절대왕권과 정통성을 쥐어줄 것이다.
이것은 공리. 이 모든 것은 카이사리아의 영속될 역사를 위하여.
어젯밤, 여동생을 찾아가지 않고 황태자비 곁에 남음으로써 결정된 사안인 것이었다.
카이사리아의 안정된 질서를 해치려 든다면, 여동생 또한 황태자의 정적이라고.
***
외롭고 힘들 때면 황태자는 오히려 일에 매달린다. 습관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을 하다 드믄드믄 왼손을 옆으로 내민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려고.
‘오라버니~.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응. 회계 문서를 검토 중이야.’
‘오라버니~. 지금은 또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응. 외교 서찰을 읽는 중이야.’
집무실 책상 옆에는 등받이 없는 의자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모렐 재무관이 가끔씩 거치적거린다고 투덜거렸지만, 황태자는 결코 그 의자를 치우지 않았다.
의자의 주인은 황녀 아스트리아였다. 여동생은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황태자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종종 심심한 듯, 말을 걸어 일을 방해하곤 했다. 황태자는 화내지 않았다.
투정부리는 여동생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꼭 안고 뺨을 부비거나 했다.
생각해보면, 일이 즐거워 이 집무실을 찾았던 게 아니었다.
애교부리는 여동생이 찾아오니까, 미리 집무실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잃어버린 것이 몹시도 아프구나. 막상 버린 사람은 바로 나였던 것을.’
여동생의 웃음을 찾아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다가, 상처만을 안겨 주었다.
이 못난 오라비를 미워하게 되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해해주렴. 아스트리아.’
황태자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영혼이 깨어져,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12년 내로 완전히 쪼개지지 않을까.
‘영혼은 영원불멸한 법. 태자 전하께선 오히려 영생하실 겁니다.’
성녀 에스텔에게 부서지려는 영혼을 수복할 방법을 찾아오라 시켰더니, 영 이상한 답변을 최근에 가져왔다.
수긍하는 척하고 성소로 되돌려 보냈다. 자신을 살린답시고, 엉뚱한 사건이라도 벌리면 곤란하니까.
“영생이라…….”
꿈속에서 ‘마녀’ 아스트리아가 말했었지. 축하합니다, 오라버니. 영생을 얻으셨군요.
“그딴 거 믿지도 않지만, 원하지도 않았어.”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이거, 무지 아프거든.
황태자는 가슴 쪽 옷깃을 꾸욱 쥐었다. 바늘이 심장에 박혀 들어가, 핏줄 따라 흐르는 듯한 기분.
이 세상 모든 슬픔을 거두어들이고 삼켜야 하는 하계의 왕자의 의무란 이렇게나 아픈 것이었다.
이 고통을 감내하여 오는 보상이 영생이라니. 그것은 축복이 아니다. 살아서 영원히 고통 받으라는 뜻의 저주.
존재의 저주.
황태자는 자신의 병명을 위와 같이 정의하였다.
외롭다. 슬프다. 아프다.
‘오라버니? 어디 아프신가요?’
아스트리아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었겠지. 뒤에서 껴안으며 ‘아프지 마세요, 오라버니.’라고 해주었겠지.
황태자는 오늘따라 여동생이 몹시도 그리웠다.
“어디 아프니? 태자.”
은방울꽃 꽃잎 나리듯, 청아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황태자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 어마마마…….”
아름다우신 어머니.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황태자를 나무랐다.
“노크를 몇 번이나 했는데도 듣질 못하고.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니?”
어머니의 말씀은 친절하였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 안에 쌓인 울분을 황태자가 모조리 흡수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돌아왔다.
인간의 정신에까지 손대는 건 황태자의 신념에 반하는 일이었으나, 결과가 만족스러워 진작에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툭하면 손찌검을 하던 옛날과 다르게, 황후는 황태자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아프지 말아다오. 우리 태자.”
따뜻하다. 정화된다.
아스트리아의 빈 자리를 황후가 채워주었다. 아니, 어머니의 빈 자리를 여동생이 대신 채워준 것이었다.
어머니가 상냥히 안아주시는 지금이 본래 황태자가 바라는 형태.
허나, 있을 수 없는 것을 바란 대가는 참혹했다.
할짝. 황후가 황태자의 귀를 핥았다.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미리 명령해두었단다. 여기서 해버릴까?”
황후의 하얀 왼손이 나무 덩굴처럼 황태자를 옭아매었다.
그녀는 황태자 앞에서 어머니가 아닌, 여자가 되어 있었다.
황태자는 자신의 몸을 더듬는 어머니를 멈춰 세웠다.
“제발. 멈춰주세요, 어마마마.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모후 전하의 울분을 달래드리다, 충동적으로 그녀와 해버렸다.
부끄럽게도, 가장 만족스러웠던 잠자리였다. 황후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젖과 꿀은 달콤했다.
“한 번의 실수라니.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거니? 황태자비의 눈을 속이고, 내 침실을 네가 찾은 게 몇 번이나 되는 줄 아느냐? 이미 두 자릿수가 되었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을 잃은 황후가 남자를 바라였으니.
다른 남자를 붙여줄 바에는 차라리 내가…….
“변명하지 말렴. 우리 태자. 너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이 어미를 여자로 보고 사랑하도록.”
황후가 황태자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황태자 앞에서 젖가슴을 드러냈다.
그녀가 품은 음욕처럼 풍만한 가슴이었다. 농익은 과실이었으며, 마실 수밖에 없는 그리움이었다.
결국 황태자는 어머니의 젖무덤에 손을 대고 말았다. 달콤한 죽음이 넘실거렸다. 황태자는 착실히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
‘고작 1, 2년이다. 나의 죽음과 함께 근친상간의 죄도 유야무야 사라지겠지.’
황태자는 양심의 가책을 벗어버렸다.
이 살풍경한 집무실이 여자의 교성으로 뒤덮인 것이 몇 번째였는지도 잊어버렸다.
참을 수 없었다. 인내가 바닥난 황태자는 황후를 안았고, 결국 어머니의 질 내에 사정하고 말았다.
‘아. 위험한데.’
저질러놓고 후회하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또 다른 혼란의 씨앗이 근친상간의 토양 아래서 뿌리내리고 싹틀지도…….
“걱정할 것 없단다, 태자.”
황후는 황태자를 끌어안고 달랬다.
“생리가 벌써 세 달째 오지 않고 있어. 네 아이란다.”
이미 늦었다. 파멸은 황태자의 죄악을 받아먹고,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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