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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22화 (22/31)

〈 22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22)

* * *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황태자는 카이사리아 수도 도시의 한가운데를 거닐고 있었다.

‘여긴……’

꿈속에선 시공간이 어긋난다.

시간은 낮이었고, 계절은 가을쯤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시장이었다.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를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황태자는 평범한 사과 장수가 되어 있었다. 사과를 잔득 싣은 수레를 밀었다.

끼릭끼릭 수레가 앞으로 나아갔다. 황태자는 사과 한 알을 집어서는 외쳤다.

“사과사시오, 사과. 맛있는 사과를 사시구료.”

걸걸한 시장 상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생소하게 바뀐 자기 목소리에 황태자는 웃고 말았다.

한참 수레를 밀다, 사과를 팔다, 한낮의 태양에 지치고 말았다.

황태자는 사과 수레를 벽면에 세워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땀을 닦았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다행이다. 전부 행복해 보이는군.’

영혼의 그릇이 깨어지면서, 황태자는 이 세상의 슬픔과 근심을 제대로 담아둘 수 없게 되었다.

줄줄 새어나오는 근심들이 이 나라에 어떤 해악을 끼칠런지. 황태자는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던 듯,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은 황태자의 예상보다 강인했다.

올해는 풍년. 그리고 이어지는 평화와 안정. 희망을 품은 사람들은 삶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아주 잘 버텨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없어도, 이들은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쓸모가 없어진 도구는 버려지는 법. 그러나 황태자는 섭섭해 하지 않았다.

조용히 세상을 관망했다. 자신 없이도 안정감 있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에, 황태자는 평온함을 느꼈다.

“아저씨. 저 사과 한 알만 주세요.”

황태자에게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다가왔다. 동화 두 닢을 건네며, 사과를 달라 보챘다.

“옜다. 가져가거라. 돈은 필요 없단다.”

황태자는 가장 맛있게 잘 익은 사과를 소녀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소녀는 꾸벅 인사를 했다.

“냠냠.”

작별 인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소녀는 황태자와 나란히 벽을 짚고 서선, 오물오물 사과를 깨물어 먹었다.

귀엽네.

황태자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선, 다시 조용히 시장거리를 관찰했다.

한참 뒤에 소녀가 물었다.

“사과 장사는 재밌으신가요? 태자 전하.”

앗.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수염 난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었는데도.

겉모습이 바뀌었어도, 영혼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소녀는 사과 장수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황태자가 알기로, 황태자의 꿈속 세계에 개입해 황태자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아스트리아. 꿈속에서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이로구나.”

황태자와 황녀 아스트리아는 쌍둥이 남매. 본디 하나였어야 할 사람이 둘로 갈라진 것.

여동생이 오빠를 찾으러 왔다.

“사람 잘못 보셨답니다? 저는 심술쟁이 마녀. 그…… 피레누트 피스치아랍니다.”

“뭐야? 그 급조된 설정. 게다가 피레누트는 마녀가 아니라 정령이야.”

피레누트 피스치아는 카이사리아의 민담 설화 속에 나오는 정령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옳은 일을 결코 실패하지 않는 지혜의 정령. 황태자는 피레누트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너무 좋아해서 피레누트 관련 설화를 전부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때론, 밤을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자장가 대신 들려주기도 했다.

황태자에게 여동생은 그가 지켜야 할 공주님이었고, 황녀에게 오빠는 그녀를 지켜주는 나만의 기사님이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어머니의 학대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인형이었다.

너무 친한 나머지, 궁정에 이상한 소문까지 돌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남들의 헛소리 따위, 황태자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황녀 아스트리아라도 없었다면, 황태자는 진작에 지쳐 쓰러졌을 테니까. 그리고 여동생은 여동생일 뿐이니까.

“그래서 우리 지혜로운 정령님께선 무슨 일로 저를 찾아 오셨나이까?”

“정령이 아니라 심술쟁이 마녀랍니다? 당연히 심술을 부리러 왔습니다.”

“무슨 심술을 부리러 오셨습니까?”

자칭 심술쟁이 마녀가 미간을 좁혔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황태자를 매도했다.

“이 벽창호. 바람둥이.”

벽창호랑 바람둥이가 양립 가능한 말이던가?

“풋.”

“웃지 마세요, 오라버니. 저는 진짜진짜 화가 많이 났으니까요.”

아스트리아는 삐치고 말았다. 화를 내며 먹고 있던 사과를 내밀었다.

“환불해주세요. 사과가 너무 달아요.”

“처음부터 돈도 받지 않았는데.”

너무 놀렸나? 아스트리아의 입이 대빵 삐져나왔다.

“오라버니는…… 바보.”

“미안해. 아스트리아.”

“왜 저를…… 혼자 두셨어요?”

꽤 오랜 시간 동안 여동생을 방치했다.

“바빴어.”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안 났어. 네가 나를 원망할까봐 무서웠어.

“바보. 진짜 바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과 외엔 더 할 말이 없었다. 금이 간 남매애가 서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서먹서먹하게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다, 이대로 헤어질 순 없었다.

황태자는 화제를 돌렸다.

“그거 아니? 황태자비가 임신을 했단다. 드디어. 만약 여자 아이를 낳는다면, 네게 줄게. 사촌끼린 결혼 가능하니까, 네 아이 클로비스와 내 딸은 결혼할 수 있을 거야.”

아스트리아. 네 아이 클로비스가 네 품속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이것으로 너의 화가 풀리지 않을까.

“후 후후. 결국 황태자비가 임신을 하고 말았네요.”

그러나 아스트리아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만 돌아갈게요.”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세 걸음 걸어 나갔다.

“아, 참. 이거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오라버니, 아니, 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행복하세요?”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꿈속 세상에서 황태자는 결코 여동생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쌍둥이의 영혼은 본래 하나였던 것이 둘로 갈라진 것. 꿈속 심상 세계에서는 갈라졌던 둘이, 다시 하나가 된다.

심층 의식이 낱낱이 파헤쳐진다.

황태자는 황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굳이 그녀의 심층 의식을 파헤치려들지 않았지만, 황녀는 달랐다.

진실을 요구했다. 저 깊숙한 심층 의식에 손을 뻗어놓고는, 대답을 바랐다.

양심의 가책과 함께 황태자는 말했다.

“행복해.”

1년 뒤. 황태자는 죽을 것이다. 드디어 삶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애써 의무를 짊어지려 노력했다. 위기와 굴곡은 있었으나, 그럭저럭 결과를 내었다.

국가는 안정되고, 신민들은 행복해했다.

비록 자신은 스러지지만, 삶의 족적은 남길 수 있었다.

그가 살아있었고, 그가 희로애락을 느꼈단 증거가 이 나라에 남아 있는 한, 그는 영원불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는 만족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소녀의 입술이 삐뚤어졌다.

한 쪽 입꼬리만 올라간 채로 미소를 그리는데,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비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낮고 을씨년스러운 쇳소리가 소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너는…… 누구지?”

소녀의 눈동자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의 여동생 아스트리아 ‘아르첼’이옵니다.”

“내 동생의 이름은 아스트리아 ‘아르첼’이 아니야. 그리고 내 동생은 결코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아.”

“아아. 실수. 다시 제 소개를 해야겠네요. 당신을 저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당신의 치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탄생한 마녀. 아스트리아 ‘아르첼’이옵니다, 태자 전하.”

꿈속 심상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꿈과 악몽이 교차했다.

낮은 밤이 되고, 어둠이 밑바닥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시장 거리를 거닐던 신민들이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고개들이 전부 우드드득 돌아가며, 시선이 전부 황태자를 향했다.

위선자.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

어머니와 정을 통한 상간자.

너 따위 죄인이 어찌 우리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겠는가. 죄로 더럽혀진 너 따위가, 어찌 감히 법과 질서를 논할 수 있느냐.

황태자는 변명했다.

어쩔 수 없었어.

나는 너희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부서질 것 같았어.

그러나 신민들의 비난은 멈추지 않았다.

위선자. 우리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주제에. 자기만족뿐인 결과만을 남긴 채, 죽음으로 도피하려 드는구나.

신민들이 황태자를 에워쌌다. 그를 검은 그림자로 만든 포승줄로 묶어, 이 세계에 고정시켰다.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의무로부터.

살아서 영원히 고통 받으라.

광기에 물든 군중들을 지휘하던 마녀 아스트리아가 웃음 지었다.

“축하드려요. 영생을 얻으셨군요? 오라버니.”

***

“허억! 허억!”

황태자는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를 옭아매던 저주가 아직도 생생히 느껴졌다.

‘방금 전 꿈은 대체 무슨 의미지?’

아스트리아. 아스트리아를 만나 봐야 해.

여동생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마녀 아스트리아 아르첼이라고 했었나?’

분명 황녀 아스트리아는 마력을 타고났다. 여동생은 선천적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기억과 망각의 마녀였다.

언제나 망각의 마력이 몸에서 넘쳐흘렀다.

그 탓에 아스트리아는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황제 아슬란은 내게 딸이 있었냐는 듯 황녀에게 무관심했고, 황후 소피아 아르첼도 황태자에게 화를 표출할지언정, 굳이 황녀까진 찾지 않았다.

궁정의 사용인들도 황녀의 존재를 종종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황궁의 사교회에서도 황녀는 불현듯 혼자가 되고는 했다.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황녀로서의 이름과 어머니 닮아 아름다운 외모는 회자되지만, 막상 곁에 있으면 잊혀져버리는, 마치 빛바랜 명화와 같은 존재가 황녀 아스트리아였다.

‘다른 사람은 잊어도, 나는 잊어선 안 되었다. 오빠니까. 그게 섭섭하니까 꿈속까지 찾아온 거겠지. 잊혀져가는 자신을 부디 기억해달라고.’

아직 한밤 중.

침대 옆에 황태자비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깨지 않게 황태자는 조심히 일어났다.

황녀 아스트리아는 밤을 무서워한다. 필시 악몽에서 깨어난 여동생은, 마치 어린애처럼 울고 있으리라.

가서 달래줘야 했다.

황태자는 침실 밖 복도로 향하는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어디 가? 황태자.”

심장이 놀라 두근두근 뛰었다. 어느새 깨어난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황태자를 뒤에서 차가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

“어디 가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황태자.”

열두 살이 되도록 황태자는 황녀와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썼다.

근친상간의 소문이 돌았어도 황태자는 상관하지 않았다.

밤을 무서워하던 여동생. 하나뿐이어서 소중한 여동생. 혼자 내버려두면 사라질 것 같아서, 언제나 황태자는 여동생을 껴안고 잤다.

하지만 하늘에 대고 맹세코, 여동생을 여자로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여동생이니까 소중했을 뿐이었다.

그것조차 황태자비는 질투했었다. 결혼을 강요하여 황태자에게 족쇄를 채우더니, 황녀를 황태자 곁에서 몰아냈다.

황녀를 모독했다. 종복 프리슬리드를 시켜 황녀를 더럽히려 들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를 증오하게 되었다. 위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아스트리아와의 일도 꽤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네 곁에 있을 거야. 위나.”

당장 여동생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황태자는 버렸다.

황태자비는 지금 황태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게다가 위나는 황태자의 관심이 모자랄수록 악녀가 되어버린다.

원활한 국정 운영과 카이사리아의 안정을 위해서, 황태자는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남편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줄 알았어, 황태자.”

“그렇지 않아.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하고 있어, 위나.”

황태자는 황태자비의 뺨과 턱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키스했다.

위선자라 해도 좋다. 이것은 공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황태자는 희생해야 했다.

‘미안해. 아스트리아.’

가장 가까운 피붙이, 황녀 아스트리아조차도 희생시켜야 했다.

축하드려요. 영생을 얻으셨군요? 오라버니.

마음 한 구석에서, 마녀 아스트리아가 남긴 비아냥이 맴돌다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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