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8)
* * *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의 견제로 인해, 테오도라는 황궁 시녀장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이세티아 공작 가의 여식이며, 아르페지나 공작부인인 자신이, 시누이인 위나 아르페지나 앞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그 상황을 마뜩잖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궁 내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은 뼈아팠다.
더 늦기 전에 더디게 진행되던 음모를 진전시켜야 했다.
테오도라 이세티아는 황녀 아스트리아를 만났다.
“Dou cement s'en dort la ter re. dans le soir tombant…….”
황녀 아스트리아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빈 요람을 흔들며, 쉼 없이 서글픈 자장가만을 불렀다.
들어주기 괴로울 정도였다. 하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걱정하는 척 테오도라는 말을 건넸다.
“황녀 전하. 당신의 아이를 되찾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빈 요람을 흔들던 손이 멈추었다. 노랫소리도 끊겼다.
황녀 아스트리아는 고개를 들고, 공허한 눈빛으로 테오도라를 바라보았다.
“내 아기……. 클로비스.”
황녀가 낳은 사생아의 이름은 클로비스 플랑섀넌이라고 한다.
아비 없이 태어난 그 아이를 황태자가 저 멀리 북녘 땅으로, 유모와 함께 쫓아 보냈다.
“내 아이 클로비스는 원죄를 타고났어요. 불쌍한 내 아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이곳 황궁으로 돌아올 수 없대요.”
“틀렸습니다, 황녀 전하. 이 모든 비극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간질은 테오도라의 특기였다. 황녀와 황태자비의 싸움을 부추기고 자신은 쏙 빠질 셈이었다.
검은 튤립과 노란 병아리의 다툼에 치어, 황태자는 죽을 것이고.
“아마 클로비스 플랑섀넌은 영원히 황궁으로 돌아올 수 없겠지요. 황태자비가 막을 겁니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클로비스가 황태자 전하의 아이임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황녀 아스트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노와 절망과 함께.
그러나 자신의 죄를 테오도라 앞에서 털어놓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황태자를 남매의 정 이상으로 사랑하는 황녀는 황태자의 발목을 잡으려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테오도라는 황녀의 아이, 클로비스 플랑섀넌이 근친상간의 결과물임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직접 봤으니까.
독사의 눈은 속일 수 없다. 그녀는 황태자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시녀장이었던 것이다.
“아니야…….”
황녀는 부정했다. 물론 그 아니야는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아니야였다.
“저는 황녀 전하를 비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테오도라 이세티아의 혀가 뱀처럼 날름거렸다. 황녀를 위로하는 척, 혀로 황녀의 죄의식을 핥아댔다.
“진실이 어찌되었든 황태자비는 당신의 아이가 황태자 전하의 아이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최근 황태자비는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에 성공해서 말이지요.
얼마 안 가 축복받은 황실의 적자가 탄생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린 클로비스는 효용성이 다하게 되는 거지요.”
아비가 누군지 확실치 않은 사생아 따위, 어느 귀족이 다음 대 왕으로 여기겠는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도 클로비스를 위험 요소로 전혀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치즈처럼 구멍이 송송 뚫린 헛점 많은 논리임에도 황녀는 흔들렸다.
클로비스의 정당한 권리를 위나 아르페지나가 가로채려 든다고, 더 나아가 클로비스를 죽이려 든다고 여겼다.
“위나 아르페지나……. 내게서 오빠뿐만 아니라, 내 아기까지…….”
질투란 그런 것이다. 감정은 이성을 이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요? 내 아기 클로비스를 지키려면.”
그래. 그 말을 기다렸어.
독사는 입맛을 다셨다.
“황녀 전하. 제게 피 한 방울만 주시겠습니까?”
***
독에 잠식되어 간다.
그리움에 사로잡힌 황태자는 실로 오랜만에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내실을 방문했다.
“어마마마…….”
“천만 뜻밖의 방문이로구나. 태자.”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드레스를 입고 계신 모습을, 황태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황태자는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몇 번인가, 소피아 아르첼은 황태자를 자기 아이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었다.
황제 아슬란의 강간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아이는 죄가 없지 않은가.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나마 황후는 황태자와 산책을 했고,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그 몇 안 되는 추억을 기둥삼아 황태자는 버텨온 것이다. 어머니께서 자신을 사랑한다 믿었다.
바로 그 어머니의 모진 학대가 이어졌어도, 황태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믿으며, 참고 견뎠다.
“새삼 말하기 뭣하지만, 많이 컸구나. 태자. 황제 아슬란을 몹시 닮았어.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카락 색도. 사자처럼 날카로운 눈매도.”
황제 아슬란은 황후에게 증오의 대상. 황제를 닮았다는 말에 황태자는 더럭 겁을 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원하신다면 눈을 감고 있겠습니다.”
“눈을 감는다한들, 네가 황제 아슬란의 적장자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단다. 태자.”
“제 스스로 눈을 파내겠습니다. 제가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싫다 하신다면, 바로 여기서 목숨이라도 끊겠습니다.”
“쿡쿡쿡. 성격하고는. 꽤나 극단적이로구나. 우리 태자.”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천천히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황태자가 미미하게 떨고 있음을 확인했다.
살포시 아들의 뺨에 손을 올려본다.
“어마마마?”
황태자가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는 뺨을 맞을 줄 알았던 것이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황태자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고 있었다.
말이 황후지, 소피아 아르첼은 사실 전리품.
실프러시아 왕녀였던 소피아는 이곳 카이사리아로 끌려와 장난감이 되었다.
거의 매일 범해지고, 강간당하고, 겁탈당했다.
아름다움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소피아 아르첼은 황제 아슬란의 분노를 녹여버릴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살아남았지만, 그 대신으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었다.
카이사리아의 귀족들이 소피아를 보고 킥킥 비웃었다. 실프러시아의 고급 창부라며.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거란다?”
그러나 소피아 아르첼은 이제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짓밟고 괴롭혔던 황제 아슬란이 죽은 것이다.
확신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제 아르페지나 공작부인이 그녀를 방문해 온갖 아부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비로소야 확신하게 되었다.
카이사리아의 귀족도 슬슬 황제 아슬란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공식 발표만 안 났다 뿐이지, 황제 아슬란은 죽은 것이 확실하다.
황제 아슬란의 죽음과 함께 정치 지각이 요동쳤다.
권력의 중심축이 황태자에게로 옮겨갔다.
그와 함께 황후의 위상이 올라갔다.
황태자는 어머니가 내비치는 분노와 모진 학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황후에게 잘 보여야, 정치권력에서 밀려나지 않는다.
“이만 눈을 떠요. 태자.”
정말이지 기특한 아들이었다. 그간 밀어내온 자식인데, 이렇게 또 어머니를 찾아오다니.
모후 소피아 아르첼의 명령에,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에 어머니의 은빛이 맺혔다.
“어마마마…….”
기껏 눈을 떴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네 눈에 무엇이 보이니? 태자.”
“어마마마. 상냥하신 어마마마께서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이니? 태자.”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어머니는 아름다웠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보다도 화려하고,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보다도 당당하며, 성녀 에스텔보다도 성스러우신.
존귀하고 고결하신, 달빛을 머금은 은방울꽃.
황후 소피아 아르첼.
세월조차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럽히지 못해, 여전히 투명한 피부와 깨끗한 눈빛을 자긍심처럼 내비치고 계셨다.
“낯간지러운 칭찬이로구나. 우리 태자. 그거 아니? 아름다움은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것.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아름다움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야. 아마 네가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나는 세기의 미녀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
순간.
황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 아슬란이 말했고, 성녀 에스텔이 재확인시켜 주었던 사실.
황태자는 신의 현현이며, 하계에 남겨진 기적의 증거이다.
“그 비밀을 어떻게……”
“경험이지.”
황후는 왼쪽 손목을 들어, 동맥이 지나가는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네가 나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니까.”
황후는 죽고 싶어 했다. 황제 아슬란의 성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얻고 싶어 했다.
손목을 긋고, 목을 매고, 독약을 마셨다.
그런데도 살았다.
계속되는 불운에 소피아는 의심했고, 결국 확신했다.
누군가가 소피아 아르첼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소피아는 자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 다. 어마, 어마마마…….”
“탓하는 게 아니란다. 우리 귀여운 아들. 나의 황태자.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결국 이렇게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잖니?”
죄스러워하는 아들을 황후는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상처뿐이었던 나날은 이제 과거일 뿐이었다.
이만 과거를 잊고, 행복한 미래를 그려야 할 때가 왔다.
“참 이상한 일이야. 황제 아슬란이 내 침실을 찾아오지 않자, 나는 안심했단다.
하지만 이내 지루해졌어. 자극 없는 삶이 이렇게나 무료할 줄이야.
무료함이 불행보다도 더 불행해.”
홀로 소피아는 생각했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해질까. 어떻게 해야 지난 불운한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감히 자신을 창녀라고 멸시한 카이사리아의 귀족들에게 복수를 해볼까? 아니면 영원히 끝나지 않은 연회를 열어 화려하게 즐겨볼까.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까?
그건 모르는 일.
소피아는 일단 저질러버리기로 했다.
온갖 것들을 전부 경험해 보면, 그중 마음에 드는 한 가지쯤은 발견되겠지.
“역시. 네가 필요해. 황태자.”
소피아는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계획을 전부 실행하려면, 황태자의 권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소피아는, 황태자에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워주기로 했다.
소피아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아들의 허리춤에서.
“어마마마! 잠시만!”
분명 황태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바라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었다.
기겁한 황태자는 어머니를 떼어놓으려 했다.
“잠자코 몸을 맡기렴. 그동안 사랑해주지 못했던 만큼, 사랑해줄게. 내 아가.”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색기가 묻어났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은방울꽃이었다.
고귀한 자태에 홀려 다가갔다가, 은방울꽃의 이슬을 들이키는 순간, 짐승은 죽는다.
황후가 황태자의 입술에 키스하는 것으로, 은방울꽃의 독이 황태자를 마비시켰다.
치명적이게 달콤했다.
황태자는 금기를 잊고, 어머니와 혀를 섞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황후의 젖가슴을 매만지며 탐했다.
그는 점차점차 어머니께 젖어들었다.
“너는. 읏♡. 내 것이야. 황태자.”
황후가 두 가슴을 드러낸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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