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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17화 (17/31)

〈 17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7)

* * *

유리 밖 세계를 바라본다.

집무실 창밖, 봄의 정원에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시녀 둘, 니나와 발레리가 차와 과자를 내왔다.

위나는 과자 하나를 한 입에 쏙 집어 먹으며, 행복의 미소를 그렸다.

‘다행이군.’

황태자는 창가 유리에서 이마를 뗐다.

위나 아르페지나가 행복한 것은, 황태자가 그간 무심했던 것을 사과했기 때문이다.

단순 사과만 건넨 정도가 아니라, 요 몇 주 간, 제대로 위나 아르페지나를 그의 황태자비로 예우해 주기 시작했다.

황궁의 연회에 함께 손을 잡고 입장하기도 했고,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키스하기도 했다.

흔들리던 위나 아르페지나의 위치를 다잡아주었다. 그러자 안정감을 찾은 위나 아르페지나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황태자비로 변모했다.

작년 겨울, 율리아 게일포드의 친위 쿠데타와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의 양보 덕분에, 황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황태자는 의회에 나가, 귀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올리고, 군권 회수, 대헌장 파기 등 급진 개혁 정책을 잇따라 통과시켰다.

그러나 새해 들어, 칼로 얻은 공포가 희미해져서인지, 귀족들이 슬슬 불만을 터트리려 하였다.

황태자비는 발 빠르게 불평하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고, 그래도 안 되는 놈들은 약점을 잡아 협박하며, 정치판을 안정시켰다.

훌륭한 솜씨다. 사실 위나 아르페지나의 정치력은 황태자도 이미 인정하는 바였다.

그것을 전에는 황태자를 방해하는 데 써서 문제였지.

‘시야가 좁았다. 사랑을 연기하는 것만으로, 최악의 적을 최고의 아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인정한다.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를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다루었었다.

어째서 첫날밤 이후, 위나 아르페지나를 싫어하게 되었었냐면……

“요즘 통 일에 집중을 못하시는군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회색 톤의 목소리. 황실 재무관 모렐 카니나였다.

황태자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모렐의 질문에 답했다.

“이미 오전 중에 다 끝내두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모렐은 한 뭉치의 서류를 황태자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두었다.

휴식 시간이 끝난 것이다.

창밖의 황태자비가 황태자의 시선을 눈치채곤, 가볍게 윙크를 날렸다.

황태자도,

‘이따 봐.’

세 글자짜리 수화로 화답하곤, 이만 본업으로 돌아왔다.

보고. 작년 몇 명의 아이가 태어났는가. 또 몇 명의 사람이 죽었는가. 올해 몇 명의 사람이 성인이 되었는가.

사람. 사람. 사람.

전부 사람의 일. 태어나고, 살고, 죽어버리는.

황태자가 인간의 일을 숫자화하여 머릿속에 새기는 동안, 모렐 카니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황태자비에게서 눈을 뗀 황태자 대신, 황태자비를 관찰했다.

“요즘 위나 아가씨께서…… 실수. 정정하겠습니다. 황태자비 저하께서 많이 행복해보이시는군요.”

집중력이 깨진 황태자는 짜증을 냈다.

“나의 황태자비에게 관심 있나?”

“아니오. 황태자비 저하께서 행복해 하실수록, 오히려 당신께선 고독해 보이시니, 혹여나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자 전하께옵선 지금 이대로의 상태가 만족스러우십니까?”

세상 무관심한 듯한 회색 눈빛과 달리, 모렐 카니나는 눈치가 좋은 인간이었다.

가끔씩 황태자는 모렐 앞에서 벌거벗은 듯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황태자는 손바닥을 펴보였다.

“느껴지나?”

나날이 짙어지는 검은색 기운. 황태자가 홀로 끌어안은 고민이자 근심.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모렐은 성자도, 마법사도 아니었다. 신성력과 마력을 갖추지 못한, 그저 머리가 좋을 뿐인 일반인. 황태자를 휘감는 검은 기운을 볼 수 없었다.

“태자 전하의 고뇌. 황태자비 저하 앞에서 거짓된 사랑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특출난 관찰력으로 황태자의 이상 상태를 간파해냈다.

그 말 그대로. 황태자는 고뇌하고 있었다.

슬프고, 우울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전부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근심을 끌어안아야 하는 그의 의무, 체질 탓이었다.

더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영혼에 금이 가서는, 줄줄 근심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나는 부서진다. 내가 부서지면 세계도 같이 붕괴한다.

어떻게든 영혼의 그릇을 수복하거나, 하다못해 한계 이상으로 들이닥치는 근심을 덜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방법을 모르겠다.

임시방편으로 황태자비에게 자신의 검은 기운을 일부 떠넘기려 했으나, 그녀가 못 버티고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곤, 황태자는 이 비상수단(화풀이)마저 단념하기로 했다.

“…….”

“…….”

황태자가 긴 침묵에 빠져든 동안, 모렐은 조용히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

아직 그는 질문의 답을 받지 못했다. 황태자는 무엇을 고뇌하고 있는가.

이윽고 황태자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모렐, 자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

모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꼬리와 눈매가 비대칭인 것이, 물음표를 의인화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뭔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라고 말해도 황태자는 이해하기로 했다. 다행히 절제심 강한 모렐은 냉랭한 무표정으로 금방 돌아왔다.

안경을 가운데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모렐은 답했다.

“저는 돈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의 신이요, 저의 우상이며, 신앙입니다.”

모렐은 호주머니를 뒤적여 금화 하나를 꺼내더니, 황태자가 앉아있는 집무실 책상 위에, 탁 하고 올려놓았다.

황태자는 모렐의 우상을 저 멀리 책상 끝으로 밀어두었다.

“돈은 사람이 아니잖나?”

“제가 독신주의자란 걸 뻔히 아시는 분이, 영 괴상한 질문을 하셔서 드린 말씀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필요하다면 괜찮은 영애를 하나 소개시켜 줄까?”

“거절하겠습니다. 연애 따윌 했다간, 일하는 시간이 줄어버리고 말겁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재무관이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법이 정한 만큼의 돈을 에누리 없이 거두어 들였다.

모렐을 두고, 가난한 이들은 고혈을 짜내는 거머리라고, 부자들은 정당한 부를 빼앗아가는 도둑이라고 말한다.

사교회에서는 모렐을 돈이 아까워 결혼조차 하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라고까지 일컬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알고 있다.

일견 차가워 보이는 외견과 달리, 모렐 카니나는 무척이나 따뜻한 사람임을.

모렐 카니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 돈은 수단이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은 이 나라, 카이사리아였다.

이는 황태자와 모렐의 근본적인 차이점이기도 했다.

의무이기 때문에 카이사리아를 떠맡은 황태자와, 진정 카이사리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재무관 직을 자청한 모렐 카니나.

누가 더 선하며, 누가 더 도덕적이라 할 수 있는가?

모렐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모렐을 조금 질투하게 되었다.

“온전히 카이사리아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네가, 몹시도 부럽군. 나도 결혼 따윈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 모렐 재무관. 최근 들어 내가 피곤해 보였다면…… 착각이 아닐세. 매일 밤마다 황태자비가 나를 껴안고 놔주질 않거든.”

전과 다르게 상냥히.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와 조심스럽게 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슬픔을 떠넘길 생각일랑 버렸지만, 그래도 황위를 물려줄 후계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황태자비와의 동침은 필요악이었다.

“나도 이만 황태자비가 내 아이를 낳아주길 바라고 있어. 나를 쏙 빼닮은,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를. 확고부동한 정통성을 지닌 후계자를.”

아들인 황태자와 달리, 황제 아슬란은 세계의 슬픔을 느끼거나, 모으는 체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편한 무언가’가 씌여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자격을 황태자에게 던져버렸다.

그렇다. ‘왕의 자격’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

똑같이 황태자도 자기 아이에게 왕의 자격을 물려줄 심산이었다.

“더 늦기 전에 말이지.”

“마치 죽을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역시 모렐 재무관은 눈치가 빨랐다.

자신의 저주와 수명의 상관관계에 대해, 황태자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구구절절 신세한탄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황태자는 모렐을 신뢰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태자는 모렐 재무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자네가 대부가 되어주지 않겠나?”

유능한 인물.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따뜻한 인간. 황태자는 모렐 재무관에게 카이사리아의 미래를 맡겼다.

***

우리들의 왕께서 고뇌하신다.

왕의 자격에는 권리와 의무가 따라온다.

모렐은 왕의 의무를 보았다. 의무의 무게를 느꼈다.

겉으론 무심하고 차갑게 굴었으나, 내심 모렐은 황태자를 가엾게 여겼으며, 또 존경했다.

그래서 황태자의 간곡한 부탁을, 차기 섭정의 자리를 선뜻 수락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렐과 같은 건 아니었다.

왕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왕관의 휘황찬란함만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테오도라 이세티아가 그러하였다.

그녀는 루진 아르페지나의 부인이었다.

남편이 좀만 더 야심이 있었더라면, 황위에 욕심을 내주었더라면, 자신이 카이사리아의 황후가 되었을 거라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테오도라는 카이사리아 황궁의 시녀장이기도 했다.

본래 황궁 시녀장 직은 백작급 가문의 여성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전임 시녀장인 에크모르도 나나이젤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데 왜 이세티아 공녀이자, 아르페지나 공작부인인 그녀가 시녀장이 되었는가.

테오도라는 황태자를 암살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테오도라는 황태자를 상대로 온갖 독이란 독은 전부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믿을 수 없게도 황태자는 독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태자 전하. 차를 내왔나이다.”

“여기 두게.”

테오도라는 포기를 몰랐다. 황태자가 독살당하면, 바로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질 게 뻔한 이 순간에도.

황태자와 모렐 재무관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받는 공간에 난입해, 차를 따랐다.

“저는 괜찮습니다.”

모렐 재무관은 차를 거부했다. 테오도라가 영 못 미더운지 차가운 눈빛을 건넸다.

테오도라 시녀장의 차 타는 솜씨가 시원찮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귀부인께서 손수 내온 차를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닐세, 모렐 재무관.”

반면, 황태자에게선 의심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황태자는 차를 후­ 후­ 두어 번 불고는, 한 모금 목구멍 너머로 삼켜 넘겼다.

“오늘은 차 맛이 괜찮은데?”

황태자는 한 쪽 입꼬리만 들어 씨죽 웃었다. 테오도라가 종종 차에 독을 탄다는 사실쯤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테오도라가 품은 헛된 욕망을 조롱했다.

루진 아르페지나의 얼굴을 봐서 진실을 묻어두는 것이다. 그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황공하옵니다, 태자 전하.”

테오도라는 겉으로 태연자약함을 가장했다. 겉모습만은 우아한 귀부인. 알맹이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독사.

그게 테오도라 이세티아였다.

“이제사 차 타는 솜씨가 좋아졌는데,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이라는 게 아쉽네.”

“결혼한 부인이 시녀장 직을 유지하는 것도, 공작급 영애가 시녀장 직을 맡은 것도 전부 관례에 어긋납니다.

본래 제가 있을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심려치 마십시옵소서. 태자 전하.”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테오도라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녀도 테오도라의 헛된 수작질을 알고 있던 것이다.

어차피 테오도라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음모에 질린 참이었다.

최악의 의견 일치로 인해, 테오도라는 드디어 시녀장 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

“내일이면 은퇴했던 에크모르 나나이젤이 돌아올 겁니다.”

나나이젤 가의 노부인은 확고부동한 충성파 귀족이지.

궁정 내 정보 수집과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시녀장의 자리가 신권파 파벌의 손을 떠난다.

가벼운 인사 이동이지만 황실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졌다.

그 점만은 테오도라도 아쉬워했다.

“맛은 없지만, 독특한 매력이 있는 이들 차와는 영영 안녕이군.

앞으로 알량한 수작질은 관두고, 좋은 아내로 돌아가길 바라네, 아르페지나 공작부인 테오도라.”

“네. 전하.”

절반의 경고를 담은 최후의 관용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황태자의 관용에 감읍해하지 않았다. 시답잖은 아량에 감격해 포기할 야심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오늘 내온 차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았다. 거듭된 고민의 결과, 테오도라는 지금껏 사용해 보지 않았던, 흔해빠졌지만 치명적이기로 유명한 이 맹독을 써보기로 했다.

아마 이것은…… 황태자에게 잘 들어먹을 것이다.

자. 질문이다. 입으로 마실 수도 없고, 코로 들이쉴 수도 없는데, 어느덧 중독되어 헤어 나올 수 없는 이 독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보다 태자 전하. 황후 전하께서 태자 전하를 찾으십니다.”

정답은 그리움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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