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6)
* * *
창문 옆 모래시계가 빙글 돌아갔다.
황태자가 발명한 기계 장치인데, 정확히 2분 30초마다 반 바퀴 빙그르르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12바퀴를 돌면 1시간. 모래시계의 숫자판 4개가 딸깍거리며 동시에 돌아갔다.
00시 00 분. 자정.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침실의 문이 열렸다.
황태자가 돌아온 것이다.
덕분에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도 잠에서 깨어, 현실로 이끌려 나왔다.
“귀청 떨어지겠네. 문 좀 살살 열지?”
신혼의 달콤함은 결혼식 아침부터 초야 직전까지만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쭉 갈등 상태였다. 황태자는 위나를 외면했고, 위나는 황태자를 도발하며 괴롭혀왔다.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증오라도 받겠어. 증오도 관심이니까. 이러한 생각으로.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껏 흐트러진 황태자에게 위나는 비아냥을 날렸다.
“꼴을 보아하니 싫은 사람을 만난 것 같네. 황녀 아스트리아를 만나러 갔었어? 아님 황후 소피아 아르첼?”
“그 입 닥쳐.”
아무래도 정답인 듯.
황제는 실종 상태고, 황후는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아들을 증오·혐오했으며, 여동생인 황녀는 자기가 낳은 사생아랑 강제로 헤어진 탓에 폐인이 되었다.
황태자는 가족을 잃었다.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외톨이 신세였다.
어쩌면 부부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될 지도 몰라. 계산이 선 황태자비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척 황태자를 달래었다.
“상처 입을 게 뻔한데, 왜 자꾸 엄마와 여동생을 만나려 하는 거야?
혹시 위로가 필요해? 내가 대신 해줄 수 있는데.”
네가 나를 다시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나는 내 영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너에게 내어줄 수도 있는데.
“어쨌든 내가 너의 황태자비잖아?”
“큭큭큭. 뭐? 황태자비?”
황태자의 입에서 음습한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위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은 비웃음보다도 더욱 음침하였고.
‘저 차가운 눈……. 과거의 순수했던 너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니? 울고 있던 나를 꼭 끌어안아주던 너는 이제 사라져 버린 거니?’
두렵다.
그럼에도 위나는 허세를 부려 황태자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었다.
“그래. 황태자비야. 내가 너의 정실부인이지.”
“안타깝게도 그렇더군.”
위나 아르페지나를 황태자비 자리에서 내쫓지 않는다. 그것은 루진과의 약속이다.
정말 마음씨 착하고, 여동생 걱정이 많은 오라비를 둔 덕분에,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비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망할 계집. 내 여동생을 망가뜨리고, 어머니를 모욕한 개년.’
황태자 안의 증오가 더욱 커졌다. 어떻게든 상처 입히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루진이 그러더군. 슬슬 우리 둘 사이에 애가 들어설 때가 되지 않았냐고.
루진의 말이 맞아. 황손이 필요해.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되면, 다음 후계자는 아스트리아니까.”
착한 여동생이지만 아스트리아는 정치력이 형편없었다. 더군다나 현재 폐인 상태. 미래의 여제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조카 클로비스 플랑섀넌도 있긴 하나, 아직은 어린애. 게다가 황태자의 기대에 걸맞게 성장한다 쳐도, 아비를 모르는 사생아란 꼬리표가 따라다닐 게 뻔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다.
결국 정통성을 지닌 황손이 필요하단 결론이 나온다. 황태자비는 황태자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카이사리아의 미래를 위하여.
“그래서 소식은 있어? 황태자비.”
“있을 리가 있겠어? 네가 나를 마지막으로 안아준 게 언젠지나 알아?”
“나는 모르지만 네 정부들은 알겠지. 황궁 안팎으로 소문이 쫙 퍼졌어.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색녀라서, 시종과 기사들은 물론, 자기 오라비까지 침실로 끌어들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황궁 밖으로 변장하고 나가선, 창녀인 척 하루 종일 손님을 받는다고.”
“야! 너 말 다했어!”
그딴 소문. 전부 거짓이었다.
위나 아르페지나의 행실이 나빠 그런 소문이 났다? 천만에.
거짓 소문이 먼저였다.
“걱정마라. 전부 이해한다, 위나 아르페지나. 네가 네 오라버니랑 물고 빨던, 시종과 기사들을 침실로 끌어들이던, 창녀촌에서 몸을 팔던.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황태자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어차피. 너 따위 사랑하지도 않았으니까.”
그저 정략결혼이었을 뿐이니까.
분한 마음에 위나는 자신의 푸른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구겨 잡았다.
“황태자 너는…… 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도 좋다는 거야?”
“상관없지. 오히려 귀찮은 짐을 덜어주어, 감사하기까지 하군.”
황태자는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사랑의 감정을 몰랐다. 사랑에서 파생되는 질투와 독점욕조차 가지질 못했다. 한 여자를 오롯이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분하고 서러워서 온몸의 핏줄이 전부 터져버릴 듯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황태자비는 빽 하고 소리 질렀다.
“그래! 나 오빠랑 잤다! 프리슬리드하고도 잤고, 모렐 카니나하고도 잤다! 이 황궁에서 나랑 자지 않은 시종과 기사는 하나도 없을 걸?
그것도 모자라 거리로 나갔어. 스스로 동화 하나에 몸을 팔았어. 네가 없는 동안……”
그녀는 말을 끝까지 잊지 못했다. 이 이상 거짓말을 하다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서.
‘제발 질투해줘. 차라리 화를 내. 넌 분하지도 않니?’
목이 메여 진심을 속으로만 삼켰다. 황태자는 다 알겠다는 듯,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인간은 외로운 존재니까.”
억장이 무너져 위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황태자가 동정의 눈빛을 보내온 탓이다.
“그런데 이젠 네 정부들과 전부 헤어져야 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네게 걸린 악소문이 너무 퍼져버려서, 나도 곤란할 지경이거든.
해결책은 단 하나야. 네가 나 닮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아이를 낳는 것.”
정통성에 전혀 하자 없는 황손이 필요하다.
마음 같아선, 안 좋은 소문이 가득한 위나를 내쫓고, 새로 황태자비를 세우고 싶을 정도다.
헌데, 루진과의 약속 때문에 위나를 황태자비 자리에서 쫓아낼 수 없다.
“결국 네가 낳아야 해. 나의 아이를. 너의 태반으로.”
“그래서 나보고 어떡하라고?”
“옷 벗어. 물론 거부권 따위는 없다.”
“…….”
역시 억지를 부려서라도 황태자비 자리를 손에 쥔 보람이 있었다.
결국 황손의 필요성 때문에 황태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과연 의무와 소임만으로 영혼이 꽉 차버린 황태자다웠다.
“정말이지 모래시계 같은 인간.”
모래시계는 때가 되면 빙글 돌아가지. 시간을 잰다는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황태자도 똑같았다. 그는 국가와 역사를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기계 장치였다.
‘원한다면 나도 모래알갱이가 되어주지.’
황태자비는 자조했다. 황태자에게 모욕당했으면서도 순종했다.
천천히 옷을 벗었다.
키스도 애무도 없다. 황태자는 조각상을 관찰하듯, 눈으로만 위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
예술가가 혼을 담아 만든 걸작은 누가 봐도 감탄하게 된다.
그녀의 하얀 나신에 황태자도 살짝 동요했다.
하얀 대리석 같은 피부. 가을의 과실과도 같은 몸매.
황태자의 열망을 읽은 황태자비가 어렴풋이 살짝 웃었다.
“어때? 조금은 욕정했어?”
일부러 뒷짐을 쥐며 허리를 살짝 굽혔다. 가슴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내 목적은 쾌락이 아니라 생식에 있다. 시시한 장난질은 관둬, 위나 아르페지나.
침대에 엎드려 자위해. 빨리 끝내고 싶군. 피곤하니까.”
마지막 유혹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위나는 괜찮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만 생기면, 황태자의 방황도 끝날지 모르지.
아이가 생길 때까지 살을 계속 겹치다보면, 속정이라도 들지 모르고.
이를 위해 황태자비는 꾸준히 준비해 왔다. 아름다운 인형으로 남기 위해, 미모와 몸매를 가꾸었다.
위나는 황태자의 명령대로 침대 위에 엎드렸다. 엉덩이를 쳐들고, 스스로 비부를 문질렀다.
그녀의 육신이 황태자를 바랐다.
바라는 만큼 벌어져, 그녀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그가 나를 사랑했던 한 순간이여. 부디 내게 돌아오라.
위나의 열망만큼 그녀는 달아오르고, 그리움만큼 젖어들었다.
“아♡.”
위나는 신음을 흘렸다.
“상스럽긴. 시끄러우니까 입 틀어막아.”
황태자는 여자의 교성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위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를 가까스로 유지했다.
황태자가 다가왔다.
두 손가락으로 위나의 비부가 잘 젖었는지 확인했다.
“흑♡.”
황태자의 손길 따라 전기가 흘렀다. 가볍게 가버렸다. 쉽게 젖고, 쉽게 가버리는 체질.
그래서 더욱 황태자에게 집착했던 암퇘지.
황태자가 위나를 덮쳐눌렀다.
“흐으읍♡ 읍♡.”
신음을 참으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안아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당장이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 사랑한다 말하며, 헐떡이고 싶었다.
“닥치라고 했을 텐데.”
짜증난다는 듯 황태자는 위나를 억눌렀다. 탈구될 듯 팔을 꺾고, 허리를 압박했다.
그리고 왕복했다.
움직임이 거칠다.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칠수록 위나는 더욱 젖어만 갔다. 비부가 달아오른다.
찔걱거린다. 애액을 내뿜으며, 매끄럽게 빨아들였다.
“하앙♡ 더♡ 더♡.”
위나는 이성을 잃었다. 좀더 깊숙이 박아달라며 애원했다.
아플수록, 채워질수록 그녀는 기뻐하며 울부짖었다.
황태자는 더욱 거칠어졌다. 엉덩이를 때리며, 목에 이빨로 상처를 냈다.
닥치라는 뜻이다.
하지만 위나의 몸은 황태자의 명령을 거부했다.
단지.
너를 원해.
안아줘.
부디 나를 사랑해줘.
“짜증나네.”
그가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증오하게끔 하라. 위나를 증오하는 황태자는, 위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기 위해, 더더욱 왕복 운동에 열을 올렸다.
골반이 쪼개질듯 아팠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허리 들어.”
이제 마지막이었다. 위나는 허리를 들고 동굴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본능 따라 꾸욱 조였다. 타이밍 맞게 황태자의 씨앗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아♡ 하아♡”
“…….”
여전히 달아올라 있는 황태자비와는 달리, 황태자는 차가웠다.
여운조차 즐기지 않고, 그의 물건을 회수했다.
그러다 잠깐 변덕이 생겨, 위나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강제로 상체를 일으켰다.
“빨아.”
위나에게도 이성이 돌아왔다.
“싫어.”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위나 아르페지나는 호기를 부렸다.
황태자는 위나의 거절을 거절했다. 어거지로 위나의 입에 자신의 물건을 처넣었다.
“읍! 읍!”
황태자의 물건은 그의 마른 몸과는 다르게, 크고 두텁고 길었다.
배려 없는 침입자는 위나 아르페지나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려 했다.
토할 것 같아.
위나는 고통에 겨워, 고개를 저었지만, 오히려 황태자는 집요해졌다.
그는 위나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즐기는 듯했다.
아랫입으로 달래주는 것보다, 진짜 입으로 먹어주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일까.
위나는 힘겨워하며, 혀와 뺨과 입천장으로 황태자를 만족시켰다.
“큽! 읍읍!”
왈칵.
“케엑! 콜록콜록!”
처음 먹어본 정액의 맛은 비리고 썼다. 속이 뒤집어져선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흐윽! 흑!”
위나 아르페지나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졌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눈물샘이 터져선, 창피하게도 황태자 앞에서 울었다.
오만한 황태자비 연기도 이제 한계였다. 그녀 또한 사랑에 목마른, 흔하디흔한 여자였다.
“왜 나를 아프게 하는 거야?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첫날밤에 느껴버린 것이 잘못이야? 걸레처럼 보였어?”
거듭 말하지만 위나는 처녀였다. 황태자에게 준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치며 오열하는 위나를, 황태자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미안.”
사과의 말을 남기곤, 황태자는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
침실 밖에서 가만히 손바닥을 죔죔 오므렸다 펴보았다. 어둡고 탁한 기류가 손가락을 타고 흐르다 사라졌다.
‘살짝 흐려진다 싶었더니, 다시 짙어졌군.’
모후 소피아 아르첼을 찾아뵙고, 황제 아슬란의 죽음을 알렸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어머니는 황태자를 거부했다.
상실감이 컸다.
커져버린 상실감만큼, 황태자에게 걸린 저주도 커져선 짙어졌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여자를 안으면 증세가 나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성녀 에스텔의 조언이었다. 부친 살해 후 흐트러진 황태자였으나, 에스텔과 잠자리를 가진 후에 나아졌다.
경험에 의거한 결론을 황태자는 좇았다.
단적으로 말해, 위나 아르페지나에게 ‘화풀이’했다.
중간까지는 에스텔의 조언이 정답이었던 듯, 황태자는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데 위나 아르페지나가 눈물을 왈칵 쏟는 순간, 황태자를 옭아매던 검은 기운이 다시 강해졌다.
‘여자를 안는다는 것은 슬픔을 덜어내는 행위다. 정확히는 떠넘기는 것이지.
그런데 중도에 위나 아르페지나가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녀의 슬픔이 거꾸로 내게 전이되어, 검은 기운이 강해진 게 틀림없다.
이거 참. 본말전도로군.’
황태자는 이 세계의 슬픔을 모아 가두기 위한 존재. 거대한 슬픔의 모래시계.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자각했다.
그가 최후의 모래시계인 만큼, 다른 사람에게 슬픔을 전이시켜선 안 되는 것이라고.
‘위나 아르페지나에게 미안한 짓을 해버렸군.’
내일부터는 상냥해지자. 좋은 남편이 되자. 죄 많은 그녀도 용서받고, 행복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나만 희생하면 돼.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지니까.’
최후까지 세계의 근심을 끌어안으리라. 나의 그릇이 깨질 때까지.
정의와 공리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공리가 우선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복과 전체의 행복을 저울질해야 한다면, 전체가 우선이다.
황태자 개인의 행복과 카이사리아의 안정. 둘 중에 황태자는 후자를 택했다.
‘하나의 질서. 내가 내세운 기준 아래서, 누구나 예외 없이 평등해야 한다. 그게 정의니까.’
공리 앞에선 황태자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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