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5)
* * *
낭군님께선 언제 돌아오시려나.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 황태자.
주인을 기다리는 침대 옆, 빈 의자에 앉아 황태자비는 꾸벅꾸벅 졸았다.
꿈속에서 그녀의 추억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운이…… 좋았지.’
황태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는 약혼녀가 있는 몸이었다.
율리아 게일포드.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
게일포드 가문은 신권파인 아르페지나 가문과 달리, 극렬 충성파 귀족 가문으로, 카이사리아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쁘고, 당당하고, 가문 배경도 완벽한 율리아라서, 그녀가 황태자의 약혼녀 자리를 잃을 염려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위나의 오라버니, 루진 아르페지나와 황녀 아스트리아가 파혼을 했다.
루진은 이세티아 영애 테오도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가문과 황실에 폐를 끼쳤다며, 루진은 죄스러워 했지만, 위나는 오히려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루진과 황녀 아스트리아의 약혼은 황태자가 추진한 것이다.
카이사리아의 안정만을 바라는 황태자가 아르페지나 가문에 화해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루진과 황녀의 파혼으로 정치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나는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 마치 아르페지나 가문이 카이사리아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 왕국이라도 세울 것처럼.
얌전하고 충직한 강아지보다는, 창밖으로 달아나길 좋아하는 고양이가 더욱 신경쓰이는 법이지.
황태자는 아르페지나 가문과 게일포드 가문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카이사리아의 안정을 위하여. 결국 황태자는 게일포드 가문과의 의리를 저버렸다. 율리아 게일포드와 파혼하고, 위나 아르페지나와 새롭게 약혼했다.
갑작스러운 파혼에 게일포드 가문도 꿈틀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과연 황가의 개. 주인에게 내쳐져도 스스로 돌아오게끔 되어 있었다.
반대로 위나는 얌전하다가도, 변덕스럽게 발톱을 꺼내들며, 황태자가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팽팽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 끝내 황태자는 결혼이 가능한 성인이 되었고, 그는 영원히 위나 아르페지나의 것이 되었다.
‘황태자비…….’
결혼식 당일, 황태자가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부터 부부네? 꼬마 황태자.’
성당에서, 성녀 에스텔 앞에서, 수많은 하객들, 증인들 앞에서.
위나가 먼저 황태자에게 키스했고, 그의 손가락에 족쇄처럼 반지를 끼워 주었다.
‘심술이나 괴롭힘 따위로 생각하면 곤란해. 나름 조, 좋아한다고!’
뒤늦은 사랑 고백이었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꺼낸 그녀의 진심.
황태자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 지었다.
‘응. 나도 좋아해. 누나.’
황태자비가 되었으니, 이제 손 많이 가는 고양이 흉내를 낼 필요가 없다.
위나는 꾹꾹 숨겨온 사랑을 드러냈다. 이에 황태자도 안심했는지, 예전처럼 맑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미움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었는데. 생각보다는 훈훈한 신혼 첫날이 시작되었다.
성당에서 나와, 지붕 없는 마차 위에서 황태자비로서 백성들에게 인사하고 갈채 받았다.
이어진 사교회의 파티에서 여타 귀족들에게 찬사 받고 목례하고, 외국 대사들에게 간지러운 아첨을 들었다.
그녀의 허영과 소유욕이 동시에 충족됨을 느꼈다.
위나는 얇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물빛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웃으며, 남은 손으로 황태자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피곤하지 않아?’
저녁 시간 즈음, 넌지시 황태자에게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몸이 달아 있었다.
결혼식은 올렸으나,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그것은 계약상으로만 황태자를 소유했다는 뜻.
완전히 황태자를 소유하려면 그와 살을 섞어야 했다.
나 처음인데 아프겠지?
두려움도 살짝 있었지만, 두려움보다 소유욕이 더 컸다.
‘나는…… 피곤한데. 이만 쉬고 싶어. 황태자.’
위나의 에두른 표현에,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청년인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가 아파? 두통이 있는 거야? 궁정의를 부를까?’
‘좀! 세상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왜 이런 건 못 알아먹는 거야!’
세상 모든 이들의 슬픔은 돌볼 줄 알지만, 여자의 속사정은 모르던 나의 황태자.
위나는 애가 타서 황태자를 이끌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킥킥 웃으며, 황태자 부부의 퇴장을 지켜보았다.
위나의 오빠, 루진이 복잡미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의 전 약혼녀 율리아는 와인 잔을 깨트렸다.
황녀 아스트리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둘을 지켜보았다.
위나는 반대로 뒤로 고개를 살짝, 승리감을 내비쳤다.
바야흐로 기나긴 첫날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자. 어떻게 할 거야?’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위한 침방. 위나는 침대 위에 앉아 새삼 내숭을 떨었다.
조신한 척, 목석처럼 앉아 황태자를 기다렸다.
이쯤 되니 황태자도 위나의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부부라면…… 어쩔 수 없이…….’
뭔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던 걸까. 황태자는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어 위나 앞에 섰다.
어른이 된 황태자가 위나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아플지도 몰라. 하지만 내 슬픔을 누나가 나눠가져 갔으면 좋겠어.’
황태자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남녀의 정사란, 남자는 기쁘지만 여자는 아픈 것.
남자는 슬픔을 여자의 안에 쏟아낼 수 있어 만족하지만, 여자는 쓰디쓴 남자의 눈물을 받아내야 해서 아플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꽤나 시적인 표현이라서, 하마터면 위나는 웃을 뻔했다.
‘나는…… 괜찮아.’
진지한 황태자에게 위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괜한 핀잔으로 분위기를 깨는 짓을 하지 않았다.
‘고마워. 내 슬픔에 공감해주어서.’
상처가 깊었던 왕자. 황태자가 자신의 상처를 위나에게 옮겨주기 시작했다.
천천히 황태자가 위나의 옷을 벗겼다. 처음은 어깨에서부터.
그녀의 어깨에 입 맞추고, 코르셋의 끈을 천천히 풀었다.
‘흑!’
‘왜? 싫어?’
‘아니야. 간지러워서.’
황태자의 입술이 부드럽고 촉촉했다. 뜨거운 입김이 위나를 끊임없이 간지럽혔다.
어깨와 목. 그녀의 뺨과 이마. 위나를 세례하듯 황태자가 축복의 키스를 남겨주었다.
뜨거우면서도 달콤했고, 그가 더 없이 사랑스러웠다.
잠시 눈을 뜨고, 황태자의 검은 눈을 마주보았다.
밤하늘처럼 검은 데도, 위나의 실루엣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기까지 했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지. 황태자는 검고 투명한 영혼을 지녔다.
여기 순수한 왕자님께서 위나의 입술에 짙은 사랑의 감정을 남겨주셨다.
성당에서의 키스와 달랐다. 그때는 소녀가 주는 키스. 지금은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키스.
혀가 얽히며,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았다.
‘하아아.’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위나 아르페지나 그녀는 어린 황태자에게 반하고, 어른인 황태자에게 반하고, 남편인 황태자에게 새삼 또 반했다.
‘위나…….’
그녀의 주인께서 그녀의 살과 피를 제물로 원하고 계셨다.
기나긴 애무와 키스의 시간 동안, 코르셋의 끈이 풀렸고, 상의는 벗겨져 위나의 가슴이 드러났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황태자의 그윽한 눈빛에 압도되어, 위나는 황태자에게 처음으로 존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하다.’
짧은 감상평을 남기곤, 황태자가 위나의 가슴에 입을 가져갔다.
모유를 찾는 아기 같다.
황태자가 위나의 분홍색 유두를 깨물고, 혀로 핥았다.
‘아윽!’
강렬한 자극이었다. 위나의 허리가 절로 뒤로 젖혀졌다.
부드러운 바람이었던 황태자가 성난 사자로 돌변했다. 더럭 겁이 난 위나는 황태자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위나의 허리를 껴안고 놔주지 않았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양, 더듬더듬. 허리와 엉덩이의 감촉과 맛을 충분히 즐긴 후에야, 황태자가 위나의 젖꼭지에 입을 뗐다.
위나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말했잖아. 아플 거라고.’
황태자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위나의 눈가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그만 하자.’ 라던가, ‘포기할래?’ 따위의 양해는 구하지 않았다.
위나를 쓰러뜨렸다.
황태자는 거슬리기만 한 옷가지를 마저 벗어버렸다.
이제 두 사람 모두 알몸이었다.
‘용서하라. 위나 아르페지나.’
황태자가 위나의 양 가슴 사이에 작은 성호를 그었다.
부디 행운을 빈다.
그런 뜻일까.
황태자는 흑기사가 되어, 창을 들고 돌진했다.
‘하으윽!’
위나의 방패는 나약했다.
황태자의 창이 그녀의 여리고 작은 방패를 손쉽게 깨트려버렸다.
그녀는 상처입고 찢어져선, 붉은색 순결의 피를 흘렸다.
그녀의 하반신이 고통을 못 이기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파? 위나, 네가 아픈 만큼, 반대로 나는 기쁘군. 이 부조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참으로 불합리하지.’
황태자는 위에서 바닥에 깔린 위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마치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아르페지나 공작령은 실프러시아 지방과 맞닿아 있지.
북녘의 처녀인 만큼, 피부가 눈처럼 하얗고, 머리카락은 황금처럼 눈부시고, 눈 색이 새벽하늘처럼 푸르렀다.
황태자비에 손색없는 미모의 그녀.
황태자의 욕망이 위나의 처녀를 머금고 기뻐하였다.
‘좀더 나를 받아들여줘.’
황태자는 다시 허리를 굽혔다. 양손으로 위나 아르페지나의 가슴을 쥐고, 몸을 들썩였다.
‘아! 으!’
여자를 안는다는 것은 이런 맛이로군. 중독되어버릴 것만 같아.
황태자는 어째서 숱한 왕과 영주들이 여자에 빠져, 나라를 멸망시켰는지 깨닫게 되었다.
위나 아르페지나의 속 깊은 면이 황태자의 심신을 위로하고 달래주었다.
살살 어르기도 하고, 짓궂게 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매끄러웠다.
마치 과거의 추억 속에 빠져들듯,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에게 취해버렸다.
‘아! 아파……. 하윽!’
황태자는 황홀경에 취해있었지만, 반대로 위나는 첫경험의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이 정도로 아플 줄은 꿈에도 몰랐지.
용광로에서 막 꺼낸 듯, 단단하고 뜨거운 장창이 위나의 하복부를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그것도 모자라 상처를 헤집으며, 짓밟고 더럽히길 반복했다.
그만 멈춰줘.
간곡한 애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하지만…….
‘많이 슬펐구나. 황태자.’
홀로 카이사리아를 지탱하다시피 하던 황태자였으니까. 그 슬픔에 무게를 더한 사람들 중 하나가 위나 그녀였다.
이제사 여자를 안는 즐거움을 깨닫고 열중하는 황태자를 보고선, 황태자의 외로움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이 아이는 위로가 필요하다.
애써 하복부의 고통을 외면하며, 위나는 황태자를 끌어안았다.
‘이리와.’
위나는 좀더 다리를 벌렸다. 한결 여유로워진 황태자는 더욱 집요해졌다.
‘윽. 으윽. 으흐윽!’
위나의 고통어린 신음도 더욱 커졌다.
그리고.
‘하앙♡.’
처음으로 느꼈다.
아마 체질이라 생각된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체질.
그렇기 때문에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의 고통에 손쉽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모른다.
‘흐응♡ 흑♡ 흐윽♡.’
황태자가 찌르는 대로 느끼며 그녀는 교성을 내질렀다. 황태자가 더욱 기뻐하리라 여겨선, 질압을 높이고 빨아들였다.
천천히 황태자의 움직임이 더디어졌다.
어째서? 이제 막 느끼기 시작했는데. 왜 하지 않아도 될 배려를 지금 하는 거람?
위나가 흐린 두 눈으로 멍 하니 올려다보니, 황태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부정형의 생물체와 생애 처음 마주친 것처럼.
‘왜 좋아하는 거지?’
황태자가 물었다.
신혼 첫날밤이 엉망이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