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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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 게일포드가 황제 아슬란을 위해 친위 쿠데타를 벌인 그날 밤.
공교롭게도 아르페지나 공작이자 제국의 재상인 루진이 앞서 황태자를 찾아왔다.
그는 황태자에게 존경을 표하며 말했다.
“아르페지나 가문의 영지와 재산, 권리를 황실에 기부하고자 합니다.”
미친 전쟁광 황제 아슬란에게 족쇄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권세가 큰 아르페지나의 가문이다.
그 가문의 힘을 스스로 포기하려면, 얼마나 많은 믿음과 용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가.
루진은 황태자를 믿었다. 황태자가 성왕이자 현왕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진의 할아버지도 황태자가 황제로 올라설 때, 그가 가졌어야 할 정당할 권리를 돌려드리라 유언까지 하셨다.
미약한 황권 탓에 황태자가 힘겨워하는 이 시기. 루진은 할아버지의 유언을 좀더 일찍 집행하기로 했다.
“본디 당신께서 가지셨어야 할 권리입니다. 기부 받으신 영지의 수입이 있다면, 전하께서 품으신 큰 뜻을 충분히 이루고도 남습니다.”
황실은 항상 돈에 쪼들렸다. 황태자는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을 돕고 싶어 했으나, 여력이 부족하여 포기한 사업도 많았다.
루진의 도량 넘치는 기부는 확실히 환영할 만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대가로 무엇을 원하지?”
황태자의 질문에 루진은 안타까워했다. 순수하게 호의를 받아들이기에는, 더러운 정치판에 황태자가 너무 부대끼며 살아왔다.
그리고 황태자의 의구심대로, 루진은 황태자에게 바라는 일이 진짜로 있었다.
“제 친구 프리슬리드와 여동생 위나의 사면을 청합니다.”
황태자의 평정심이 흔들렸다.
황태자는 황녀 아스트리아가 프리슬리드에게 강간당했다 믿고 있었다.
황녀를 질투한 황태자비 위나가 프리슬리드의 저 행동을 사주·승인했다고.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아느냐? 루진 아르페지나. 내 동생이 겪은 일을 네 여동생이 똑같이 당했다면, 너는 그 새끼를 용서할 수 있겠느냐?”
사생아를 낳은 아스트리아는 행동이 조신치 못한 처녀라며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황제 아슬란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강제로 아기랑 헤어져야 했다.
지금도 아스트리아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빈 요람을 흔들며 자장가를 부르고 있다.
망가진 여동생을 지켜봐야 하는 오라비의 심정이 어떠한지, 직접 설명해야 알아듣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루진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프리슬리드는 결코 황녀 아스트리아를 강간하지 않았다.
루진은 따로 프리슬리드와 위나를 만나, 그날의 일을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황녀 아스트리아에게 위협만 가했을 뿐, 진짜로 일을 벌이진 않았다고 진술했다.
루진의 또 다른 친구 모렐도 두 사람의 진술이 맞다고 보증해주었다.
황녀가 낳은 사생아의 아버지는 프리슬리드가 아니었다.
“그럼 프리슬리드 외에 누가 있는데? 너도 내 동생이 겉으로만 조신한 척, 뒤로는 남자들과 놀아나던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느냐?”
“…….”
황태자가 분노를 표출했다. 감정적으로 흐트러졌다. 황태자 말마따나 위나의 일이었다면, 루진도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기 때문에 루진은 황태자를 비난할 수 없었다.
“후우우. 미안하다, 루진.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군. 아스트리아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이상, 아기의 친아빠가 누군지 알 수 없어. 아스트리아가 진짜 강간당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고.
증거도 없으면서 프리슬리드에게 죄를 물을 순 없는 노릇이지. 내가 왕이라면 그래선 안 되는 거야.”
“태자 전하…….”
역시 황태자는 황태자였다.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 바른 판단을 해주었다.
루진 안의 존경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하지만 프리슬리드가 한밤중에 황녀의 침실에 침범한 건 사실이고, 황태자비가 이를 사주한 것도 사실이다.
프리슬리드는 국외 추방,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비 자리에서 폐함이 옳으나…….
그간 아르페지나 가문의 공적과 정성을 보아, 두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겠다.”
정의와 공리.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공리를 택해야 한다.
황태자는 아스트리아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멋대로 프리슬리드와 위나의 사면을 진행시켰다.
‘정말 못난 오빠지.’
황태자는 자책하며 쓰게 웃었다.
***
이것이 위나 아르페지나가 여전히 황태자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황태자비 자리만 가까스로 지켰을 뿐, 그간 벌인 기행 탓에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사교회에서 황실을 도발하는 발언을 하거나, 황태자가 추진하는 정책에 반기를 들거나.
아르페지나 가문 내에서도 과하다는 반응이 나올 만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오라버니인 루진 아르페지나가 감싸주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심 목이 날아갈 뻔했다.
뭐, 괜찮아. 어찌됐든 살아남았으니.
황태자비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에 위나는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이 근신처분이란 녀석이 몹시 따분했다.
위나는 침실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이따금씩 그녀의 수족인 니나와 발레리가, 그녀의 안부를 물어왔다.
시녀들은 위나가 심심하지 않도록 책을 가져다주었다.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 이딴 걸 가져다주다니. 멍청하기는.’
너무 지루해서 몇 장 넘기다 말았다. 로맨스란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이런 지어낸 이야기 따위론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떠올렸다. 차츰차츰 추억에 젖어 들었다.
‘그 때가…… 벌써 7년 전인가?’
위나의 할아버지, 프리울드 아르페지나 공작이 죽었다. 주인을 배신한 반역의 기사란 오명이 따라다니시지만, 할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었다.
아르페지나 가문은 기사된 영광을 강조하는 가문인지라, 기사의 전통이 어느 가문들보다도 강했다.
보수적이었다. 아르페지나 가문의 남자 아이들은 모두 기사로 키워졌고, 다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거꾸로 말해, 기사가 될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위나는 반항아였다. 선천적으로 오만하고 약삭빠르게 태어난 탓에, 가문의 운영에 적극 개입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의외로 할아버지께서 좋아해 주셨다. 아르페지나 가문원들은 돌머리들이 너무 많아 곤란했다며, 위나가 있어주어 다행이라 해주셨다.
종종 위나가 남자 아이였었더라면, 하다못해 첫째로 태어났었다면 좋았을 거란 말씀도 하셨다. 그랬다면 위나에게 아르페지나 가문을 물려주셨을 거라고.
진심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장손이자 위나의 오라비인 루진 아르페지나를, 할아버지께선 무척이나 아끼셨으니.
농담 같은 덕담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프리울드 아르페지나는 손녀딸 위나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식 날, 위나는 아르페지나 가문 본가의 적장녀답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빈틈을 보이면 아르페지나의 적들이 우리들을 물어뜯으려 들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다분히 감정적이고 눈물 많던 오라버니를 대신해, 위나가 할아버지의 유산 상속 문제, 지분 정리와 유언 집행을 빈틈없이 처리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 안심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위나는 산책을 나갔다. 그날 그 계절은 여름이었었는데, 정원에 글라디올러스 꽃이 피어 있었다.
할아버지를 닮은 꽃이었다. 평생을 기사로 살아온 그분을 닮은, 올곧은 검과 같은 꽃이었다.
그 순간 꾹 눌러온 눈물이 터졌다. 뒤늦게 눈물이 터져선, 도저히 멈추지가 않아선, 정원 한가운데서 엉엉 울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한참을 흐느꼈다.
‘누나. 울지 말아요.’
불쑥 손수건을 내민 손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의 아이는 위나가 감정을 전부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최악이야!’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남자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다니.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러웠다.
‘괜찮아요, 누나.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
그 아이는 위나의 곁에 앉아, 맑은 미소를 그려보였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
그 아이가 곁에 있을 때면, 슬픔의 감정이 날아가 버린다.
상실의 감정 대신 추억이, 그래, 할아버지께서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던 추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귀엽고 똑똑한 손녀가 있어서 기쁘다고 하셨다.
‘그랬구나. 행복하셨겠다.’
어느새 그 꼬마 놈이 위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다 괜찮을 거라고 해주었다.
‘까불지 마! 어른인 척 하지 말란 말이야! 땅꼬마 주제에!’
그땐 솔직하지 못했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위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토닥여준 아이가 바로 황태자였다.
뻔하디 뻔한 로맨스 소설 같은 이야기.
하지만 소중하고 애틋한 그녀만의 추억.
슬픔이 지워지고 난 자리엔, 사랑의 감정만이 남아 있었다.
“좋아해. 황태자.”
그리고 망가져 있어서 미안해.
네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증오라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차라리 증오가, 무관심보단 훨씬 나으니까.
“후. 후후훗…….”
그 선택은 옳았다.
결국 황태자비는 위나 아르페지나, 그녀가 되었으니.
아직도 카이사리아의 황태자비는 위나 아르페지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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