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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13화 (13/31)

〈 13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3)

* * *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드디어 카이사리아 황실이 잃어버렸던 권리를 되찾는 날.

의회의 귀족들 전원이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임페라토르.

카이사리아의 지배자는 황제Kaiser란 단일 칭호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카이사리아 신민들의 보호자tribus plebis여야 했고,

귀족들 중 가장 고귀한 자Altezza Serenissima여야 했으며,

교단이 인정한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이자,

카이사리아 내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최고 군사령관Imperator여야 했다.

이중 최고 군사령관 칭호는 아르페지나 가문의 반란 이후에 상실한 카이사리아 황실의 칭호.

황제 아슬란은 황제군을 창설·소집·유지할 권리를 잃었다.

그러나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칭호와 권리는 2대만에 황태자에 의해 부활했다.

실질적으로 황태자는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태자 전하 만세.”

귀족들의 대표로서 루진 아르페지나가 외쳤다.

“부디 정의를 바로 세우소서.”

그는 정의를 말했다.

뒤이어 관료들의 대표로서 모렐 카니나가 외쳤다.

“황태자 전하 만세. 부디 공공의 안전과 만인의 평화를 추구하소서.”

공리. 황태자를 끝없이 옭아매는 사슬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는 거부하지 않고, 왕으로서 당연히 받들어야 할 소임으로 새겨들었다.

“황태자 전하 만세……. 부디 백성들을 ‘사랑’하는 현군이 되소서.”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본디 기사들의 대표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는데.

율리아 게일포드가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황태자비 자리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다는 걸, 황태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충성심보다 앞세워서는 곤란했다.

사랑이란 놈은 워낙 변덕스러워서, 언제 주인을 배신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 만세. 부디 진정한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검이 되소서.”

마지막으로 성녀 에스텔이 은빛으로 빛나는 직검을 가져와 황태자에게 바쳤다.

황태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성검을 받들었다.

황관을 대신해 받는 선물이었다.

이제 황태자는 견제가 사라진 카이사리아의 군권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되었다.

권력이란 이름의 검을 쥔 채, 황태자는 일어섰다. 그리고 귀족들 앞에서 연설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 어린 왕자는 무엇을 가장 소망할까.

피로 피를 씻는 복수일까.

흥청망청 주색에 빠져 국고를 탕진할까.

아니면 위대한 정복자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 군사를 몰아 이웃 나라로 진군할까.

황태자가 최고 군사령관 칭호를 되찾길 바랐다는 점에 착안하여, 귀족들은 불길한 미래를 상상했다.

드디어 황태자가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고. 그의 길은 피와 죽음으로 점철될지 모른다고.

하지만 오산이었다.

“나는 되찾은 나의 힘으로 나의 소중한 신민들을 지킬 것이다. 평화와 안정. 내가 바라는 것은 이 둘뿐이로다.”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면 반성해야 했다.

황태자는 귀족들의 비대해진 권리를 견제·축소만 했지, 굳이 그들을 지워버리려 들지 않았다.

정복욕에 불타 백성들을 사지로 몰지도 않았다.

단순히 임페라토르, 이 칭호가 필요했을 뿐이오. 황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과정이었을 따름이라네.

황태자는 조곤조곤 연설을 이어나갔다.

“왕이란 신민들의 슬픔을 덜어내는 존재라고 배웠다. 나는 우리들의 나라에서 굶주림과 억울함이 없도록 노력하겠다.

위임받은 통치권을 악용하여 영지민을 핍박하는 영주가 있다면, 법과 정의와 원칙대로 그를 벌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너희들의 백성들을 너그럽고 자애롭게 보살핀다면, 나의 검은 검집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을 것이야.

부디 나의 분노가 조용히 녹슬 수 있기를.

하늘의 여제시여. 가련한 우리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소서. 부디 제가 슬픔에 꺾이지 않고, 우리 신민들의 짐을 나눠들 수 있도록, 당신의 힘과 의지를 빌려주소서.

하늘의 영광이 당신께 있나이다. 천상의 제국이 이 땅에 도래할 때까지. 진실로.”

연설은 다짐으로, 다짐은 기도로 옮겨가 끝을 맺었다.

황태자의 연설이 끝나자, 의회 안에는 숙연함만이 감돌았다.

황태자가 펴 보인 진심에 귀족들은 걱정과 우려, 불만과 유감의 감정을 잊었다.

그는 여전히 사랑받아 마땅한 왕이었던 것이다.

“하늘의 여제께서 태자 전하를 축복하시기를.”

누군가 말했다. 이윽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박수를 치며 눈물 흘렸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황태자는 겸손히 미소 지었다.

‘당신께 배운 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도 기뻐하실까요. 어마마마.’

***

이 세상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우리들의 왕자.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는 왕자.

모두가 황태자를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칭송한다.

눈앞에선 말이다.

황태자는 과거 황실을 능멸한 죄인들을 용서했다. 피의 숙청을 피한 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태자의 자비를 찬양했다.

그러나 다 한 때뿐인 찬양이었다.

시간이 좀만 지나고 나면, 예전보다 축소된 권리에 불만을 토로하며 다시 기어오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황태자가 처음 섭정이 되어 황실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했을 때, 모두가 성왕의 탄생이라며 그를 예찬했다.

그러나 최근 2년째 흉년이 이어지자, 전부 황태자가 덕이 부족한 탓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이제는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도 먹이를 더 달라며, 떼쓰듯 황태자의 손을 물어뜯는다. 개처럼.

인간의 생리가 그러하다. 은혜는 빨리 잊어버린다. 매로 다스리면 바짝 엎드려 자비를 구걸하는 것들이, 진짜로 자비를 베풀면 어느새 기어오르려 든다.

하지만 황태자는 인간의 비겁함마저도 이해하려 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완전히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

황태자는 최대한 인간의 선한 면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희망을 가지려고.

그러면서도 인간의 추악한 면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선의를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슬픔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야.

나의 신민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사랑에 굶주린 왕자는 황궁의 복도 벽을 한 손으로 쓸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의회가 파하고 연회가 열렸었다. 협잡꾼들의 온갖 아부에 적당히 맞장구치며, 술을 들이켰다.

그들의 욕망을 어르고 달래다보니, 어느덧 자정이었다.

피곤해진 황태자는 이만 침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머니의 침실로.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침실로.

오랜만에 어머니를 뵙고, 칭찬받고 싶었다.

“들어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한 시녀가 황태자를 막아섰다.

“황후 전하께선…… 주무시고 계십니다.”

플리아네 셰르링. 그런 이름으로 기억한다. 와인빛 머리카락의 시녀는 황태자가 황후의 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밤은 황제의 시간. 지금처럼 늦은 밤에는 황제 아슬란 외엔 황후를 만날 수 없었다. 설령 황태자라 할지라도.

“비켜.”

그러나 황제 아슬란은 죽었다. 공식 발표는 안 났지만. 죽은 아버지 따윈 이젠 무섭지 않았다.

흉흉한 안광이 플리아네를 향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줄은……

낯선 두려움에 플리아네는 몸이 굳어버렸다.

황태자는 플리아네를 밀어버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잠들어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푸른 달빛이 창을 넘어 와, 황후를, 어머니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아름답다.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겨울에 창을 열어놓으시다니.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고.’

포근한 겨울 공기가 불어와 침실을 메웠다. 성녀 에스텔이 겨울을 지워버렸기 때문에 훈풍이 불었다.

바야흐로 봄이었다.

더군다나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저 멀리 북녘 실프러시아 출신인지라, 추위를 잘 타지 않았다.

그녀에겐 지금의 이 온도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했으리라.

“어마마마…….”

황태자는 조심스레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매만져보았다.

은빛의 폭포가 손 안으로 쏟아지는 듯했다.

아름다움을 넘어서, 숭고하기까지 했다.

이분이 바로 나의 어머니. 내게 생명과 영혼을 주신 분. 황후 소피아 아르첼.

황태자는 은빛 머리카락을 쥔 손에 뺨을 부비었다.

너무도 소중한 분이라서, 머리카락을 함부로 만지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달빛이 지나가던 구름에 이지러질 때까지, 황태자는 한참을 눈을 감고, 어머니의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고 있었다.

“누구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는 눈을 떴다.

달빛 속에서 황태자의 눈동자가 빛났다.

황후는 그 안광, 푸르슴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흐윽! 오지 마! 제발…… 제발 나를 놔줘!”

황후 소피아 아르첼을 질겁해서는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여윈 어깨를 안고 울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밤에 이 침실을 찾아올 사람은 황제 아슬란밖에 없다. 그 검은 짐승은 소피아의 가족들을 전부 죽이고, 전리품 삼아 이곳 카이사리아로 끌고 왔다.

그는 소피아를 유린했다. 전장의 일로 궁을 비우는 때가 아니라면, 소피아를 찾아와 그녀를 찌르고 할퀴며 가지고 놀았다.

아르페지나 가문이 검은 사자에게 족쇄를 채우는 데에 성공했을 때.

카이사리아는 평화로워졌지만, 그만큼 그녀는 지옥에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분명 그녀는 매일매일 자살충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못했다.

황태자의 존재 때문에.

“어마마마.”

아침이 되면 황후는 으레 황태자부터 찾았다. 황제에게 입은 상처와 분노를 황태자에게 쏟아냈다.

못된 어머니라고 다들 흉을 보았다.

저기 침실 밖,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전속 시녀인 플리아네 셰르링조차도.

황후가 내지르는 폭력과 학대는, 도를 넘어도 한참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믿었다. 이렇게 굴욕을 딛고 살아주신 것만으로도, 어머니께 감사드렸다.

“어마마마. 저예요. 당신의 어린 샛별입니다. 황제 아슬란은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황태자는 어머니께서 해방되었음을 비로소야 알려드릴 수 있었다.

사라진 짐승의 밤. 두려움으로 헐떡이던 어머니의 가슴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태자?”

황후가 황태자를 알아보았다.

“네. 어마마마.”

황태자는 울듯 미소 지었다.

부친살해라는 금기를 범하였지만, 이는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짐승에게서 풀려난 어머니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리라.

그리고 아들을 꼭 안아주시리라.

황태자는 어머니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어머니께 자신을 사랑해주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가.”

그러나 그 믿음은 너무도 빨리 깨지고 말았다. 황후는 아들인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그녀는 황태자에게 황제 아슬란을 겹쳐보았다.

머리카락도, 눈빛도, 황제 아슬란을 닮았다.

황태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 사자의 피에 은방울꽃이 동요했다.

기대가 무너진 황태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참으려고 했는데도,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네. 어마마마. 소자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황태자가 밤 인사를 드리고 뒷걸음질 치는 동안, 황후는 끝까지 황태자와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한 마디를 툭 뱉었다.

“소름 끼쳐.”

어머니의 말씀이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뽑아내려니, 검은 피가 콸콸 쏟아질 듯하다.

비틀비틀 황후의 내실을 벗어났다.

복도 중간. 아무도 없는 장소에 다다라서야. 황태자는 오열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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