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1)
* * *
또 눈이 내렸다.
요즘 들어 눈이 자주 내렸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별이 쏟아지는 듯하다.
별은 황태자의 얼굴 위로 쏟아지더니, 눈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차고 시리다. 그리고 슬프다.
이내 황태자는 홀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그락 사그락.
눈이 밟혔다.
길게 눈밭에 발자국이 남았다.
황궁 내 건축물 중에는 거대한 성당이 하나 있었다.
교단의 성자들이 신성력과 기적을 휘두르는 시대. 교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적이 눈앞에 현현함에도, 인간들은 신을 의심했다.
믿음보다는 돈과 권력이 우선이다.
신앙과는 거리가 먼 속물들만이 이곳 황궁에 우글거렸고,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성당은 사람 대신 적막함이 깃들었다.
황태자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이 적막한 성당이었다.
눈밭의 발자국이 이어지다 성당 앞에서 끊어졌다.
황태자는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이곳에는. 두 사람뿐이다.
“왔느냐? 태자.”
황제 아슬란이 물었다. 그는 뒷짐 지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머리 위의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더러워진 신발로 성당의 바닥을 밟았다.
차디찬 공기와 먼지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었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알려주고서야 알았지요. 아바마마께선 신앙과 거리가 있으신 분이시니까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시대는 신의 기적이 횡횡하는 시대.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무신론자가 존재했다.
황제 아슬란이 그러하였다.
“이용가치는 있으니까.”
“생각치도 못하였습니다. 황궁에는 위나 아르페지나가 심어놓은 끄나풀이 많지요.
쉴 새 없이 아바마마를 감시하고, 저를 감시하고, 게일포드 가문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황제군을 편성할 권리를 박탈당했고, 게일포드 가문은 여력이 없었습니다.
아르페지나 가문은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하고 있었을 겁니다.
헌데, 그렇다면 지금 황궁을 습격한 군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아르페지나 가문의 빈틈없는 감시를 피해 황제는 군사를 키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들 병사들이 율리아 게일포드의 지휘 아래서 친위 쿠데타를 벌이고 있었다.
왜 율리아 게일포드가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의 멸시를 견뎠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황실근위기사단장직을 유지해야만 쿠데타 때 황궁의 문을 열어줄 수 있으니까.
“아르페지나의 눈을 피해 키운 군사들. 그래, 태자. 이들 군사들이 어디서 온 것 같으냐?”
“정확히는 키운 것이 아니라 빌린 것. 정답은 교단입니다.”
무신론자인 황제가 이곳 적막한 성당을 찾은 이유. 성녀 에스텔이 이끄는 하늘의 여제교 교단은 성전을 준비한다며 십자군을 모으고 있었다.
황태자조차 혀를 차며 쯧쯧거리던 사안이었다. 귀족들도 정신병자들의 발광이라며 무시했었다.
제풀에 지쳐 흩어지거나, 황야로 진격하였다 마물들의 밥이 되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교단의 목표는 성전이 아니었다.
교단이 준비한 십자군들은 마물과 이교도들의 땅이 아닌 카이사리아의 수도 도시, 황궁으로 진격했다.
황제가 손수 마중 나가 수도 도시의 성문을 열고, 율리아 게일포드가 황궁의 정문을 열어 쿠데타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아직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세속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게 교단의 원칙 아니었습니까?
권력을 되찾은 황제 아슬란이 교단이 일으킨 성전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 정도 약속으로 교단이 움직일 것 같진 않았습니다.”
“무르구나. 태자.”
황제가 뒤를 돌았다. 드디어 아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성녀 에스텔의 신성력을 회복시켜 주기로 했느니라.”
황태자로선 사방팔방 수소문해도 영 알 수가 없는 방법이었는데. 황제는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아냈을까.
“신성력은 인간의 생명력이 근원이다. 그리 알려졌으나 실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신성력과 생명력이 정비례하는 관계였다면, 신성력이 바닥난 성자와 성녀들은 바로 죽음을 맞이했을 게다.”
“대부분의 성자들이 신성력이 바닥남과 동시에 죽지 않나요?”
에스텔은 예외지만. 눈썹과 머리카락이 희어졌을 뿐, 그녀는 살아있다. 앳되고 청초한 얼굴도 남아있고.
그것을 에스텔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자책했다. 그리고 자괴감에 서서히 잠식되다가 미쳐버렸다.
“태자. 생명력은 신성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수많은 성자와 성녀들이 자신의 생명까지 쥐어짜 기적을 일으키다가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들에겐 자기 목숨보다 신앙이 우선이었던 게야.
하지만 성녀 에스텔은 살아있다. 성 아론 이래로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일으켰던 에스텔이.
그녀가 믿음이 모자랄까. 천만에. 그녀는 역대 어느 성자, 성녀들보다도 신심이 깊다.
에스텔이 살아있는 이유는 단 하나. 신이 그녀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네가’ 에스텔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성소의 성녀가 살아있는 것이다.”
무신론자 황제의 입에서 신이란 단어가 나왔다. 황태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신이 존재합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었다면 이렇게나 불균형하고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황태자 또한 무신론자였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신에 도전한 인간은 있었다. 그는 온 세상의 슬픔을 껴안고 세계를 떠받쳤다.
그러다 지쳐 쓰러졌다.
분명 그는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에게 그의 의지가 이어져, 그의 후손들은 세계의 근심을 홀로 껴안아야 하는 의무를 받들게 되었다.”
황태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심장에 손을 얹고, 지친 듯이 물었다.
“그게 저입니까?”
“그래. 신이되 신이 아닌 자. 신이 되다만 인간. 불완전한 이 세계를 떠받드는 기둥.
우리는 그를 이렇게 부른다. 하계의 왕자.”
하늘 아래 세상을 우리들은 하계라 부른다. 왕이 되지 못한 왕의 후예를 왕자라 부른다.
그래서 불완전한 세계를 다스리는 불안정한 존재를 우리는 이렇게 칭한다.
하계의 왕자.
“태자. 신성력이란 곧 신의 사랑이다. 왜 교단이 교리로 성녀들은 결혼하지 못하게 하고, 순결을 지키길 강요하는지 아느냐?”
“육욕을 멀리하고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봉사하라는 뜻으로 압니다.”
“아니다. 성녀들은 너의 후궁들이다. 신앙에 몸을 판 창녀들이다.
네가 그녀들을 사랑할수록 그녀들의 힘은 더더욱 강해지겠지.”
황제의 말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황태자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단단히 쥐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황태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교단에게서 군사를 빌리는 대신, 교단에게 너를 주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팔아넘겼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니까.
“짐이 아니었으면 너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짐이 황제가 되던 날, 짐은 짐의 황위에 눈독 들이는 황족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이는 옳은 판단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프리울드 아르페지나는 짐을 대신할 황족이 없으니, 차마 짐을 끌어내릴 생각일랑 못했다.
너도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짐의 품에 안긴 너를 보는 순간 짐의 생각이 바뀌었다.
네가 너무도 소중했다. 그래서 네가 지금껏 살아있는 게야.”
그러니 이제 키워준 은혜를 갚아라. 이런 말뜻일까.
소피아 아르첼을 강간해주어서 고맙다. 나는 이렇게 답해드려야 하는가.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아바마마.”
앞으로의 행동 지침을 묻는다는 것은 평생을 황제의 도구로 살아온 황태자, 그의 어쩔 수 없는 관성일까.
아직 황태자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확인한 황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성녀 에스텔을 안아주어라, 태자. 몸매는 빈약하지만 얼굴은 제법 반반한 계집 아니더냐? 네게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진짜 그것으로 에스텔이 신성력이 회복된답니까? 교단이 납득은 하였습니까?”
“세간에 퍼지면 신앙이 무너질까 두려워 숨긴 교단의 금서고가 있다.
그곳 금서에 버젓이 적혀 있는 내용이다. 교단 고위층도, 성녀 에스텔도 모두 동의했다.
그들도 아는 게지. 너와 살을 겹치면 바닥났던 신성력이 돌아온다는 것을.”
의무를 물려주었으니 권리도 따라오는 것은 당연지사. 황태자는 교단의 성녀들을 안을 권리가 있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곧 신께 사랑을 받는다는 것. 이 말뜻이 고작 그런 의미였던 겁니까?”
성자들보다는 성녀들의 신성력이 더 강하게 발현되는 경향이 있었고, 수많은 성녀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아리따움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질 하더니 본질은 하찮았다.
킥킥.
하찮아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에스텔의 믿음만은 진실되었었습니다. 그 믿음과 신앙을 짓밟는 것 같아 마음이 쓰라립니다.”
지친 듯 황태자는 아버지의 가슴에 이마를 파묻었다. 가끔은 그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이용가치가 있는 도구이기보다는 그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이고 싶었던 때도 있었는데.
“싫은 것이냐? 아니면 더러워 보이느냐. 싫든 좋든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태자.”
“압니다. 정의와 공리 중 하나만 골라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제 선택은 언제나 공리여야 했습니다.
아마 이번이 저의 마지막 어리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태자는 황제 앞에서 재롱을 피워본 적 없었다. 인형의 관절처럼 딱딱하게. 황태자는 어색한 애교를 아버지께 꺼내보였다.
계집들이 내 앞에서 교태부릴 때 어떻게 하더라?
허리를 끌어안고, 상대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그리고 키스. 입술과 입술로.
“무슨 짓이냐! 계집애도 아니고.”
기분 나쁘다는 듯 황제가 황태자를 밀어냈다. 황태자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가 되었다.
“그냥. 한번쯤은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이 이러니, 역시나 징그러운 모양입니다.”
천천히 허리 굽혀 인사 올린다. 황제의 마지막 길. 확실히 기억에 새겨 넣었다.
황태자는 뒤돌아 나갔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이만 때가 되었다는 듯 잠시 멈춰 섰다.
“쿨럭……!”
아버지께서 피 섞인 기침을 하셨다.
“살펴 가십시오. 아바마마.”
클로지아 마네가 은방울꽃에서 추출한 특제 독이다. 가련하고 아름다운 꽃이나, 은방울꽃이 피어난 골짜기는 금세 죽음의 골짜기가 된다지.
은방울꽃의 이슬을 들이킨 검은 사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황태자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핥았다. 그러나 황태자에게는 은방울꽃의 은은한 향기만이 느껴질 뿐 죽음의 그림자는 드리워지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몸인 것이다.
황태자는 천천히 성당을 빠져나왔다.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희미해진 발자국을 정반대로 밟아주며 황태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빈 요람을 천천히 기울여본다.
삐그덕. 삐그덕.
“Dou cement s'en dort la ter re.”
섦은 가락. 아기 잃은 어머니의 자장가.
겨울은. 춥지.
내 아가 클로비스는 괜찮을까?
북방은 이곳보다 더 추울 텐데.
감기에 걸리진 않았을까.
엄마가 없다고 울고 있진 않을까.
온갖 걱정이 한이 되어 맺혔다.
“dans le soir tombant…….”
문득 황녀 아스트리아의 노래가 끊어졌다.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방금 죽음의 정령 벨릴라가 그녀의 그림자를 밟고 사라졌다.
가까운 친족 누군가가 죽은 것이다.
대체 누가.
내 아기 클로비스가?
“오라버니…….”
방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주인 잃은 방으로 들어왔다.
“아스트리아…….”
황태자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그의 손이 시뻘겋게 굳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스트리아는 금이 간 황태자의 신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단단한 유리병에 두 줄기의 실금이 그어져, 그 사이로 황태자가 꾹꾹 눌러두었던 슬픔이 새어 나왔다.
하나는 아스트리아가 새긴 것이다.
남은 하나는 이제 막 새겨진 것이다. 황태자 본인의 업보로 인하여.
“지워주렴. 이 슬픔을.”
황태자는 처음으로 망각하길 바랐다.
오라버니의 슬픔이 절절히 느껴져, 아스트리아는 입을 가리고 눈물 흘렸다.
“오라버니……. 어째서…….”
“불가항력이었어. 아스트리아.”
황제가 전쟁을 바라였으니까.
“이상한 일이지. 요즘 들어 많이 피곤하다. 자꾸 눈이 감기고, 어느덧 잠이 들어 악몽을 꿔. 그리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지.
1년 전까지만 해도 견딜 만 했는데, 이제는 미칠 것 같아.”
황태자도 슬슬 한계였다. 대량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간, 못 버티고 터져나갈 것 같았다.
차라리 황제를 죽여 허울뿐인 평화를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될 만큼.
“미안해요……. 오라버니.”
황태자의 그릇을 깨트린 건 아스트리아였다. 그 때문에 황태자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실을 고백했다간 오라버니께서 자신을 미워할 것만 같아, 아스트리아는 조용히 눈물만을 흘렸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아스트리아.”
황태자가 세계의 슬픔을 품고, 그 슬픔을 아스트리아가 지우는 것이 본래의 역할인데.
역할이 바뀌었다.
아스트리아가 울고, 황태자가 아스트리아를 껴안고 토닥였다.
“미워도, 싫어도 아바마마는 아바마마였지. 네게서 아이까지 모자라 아버지까지 내가 앗아가 버렸구나. 미안하다. 내 동생. 아스트리아.”
“아니옵니다! 그런 게 아니옵니다……. 오라버니…….”
아스트리아는 전부 잊고 싶어졌다. 오라버니를 잠재우고, 몰래 그 허리 위에 올라탔던 그날 일을 없는 것으로 하고 싶어졌다.
허나 그녀가 망각의 마법으로 현실을 도피한다 하여도, 그녀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황태자의 영혼은 금이 가 있을 것이고, 지금은 가라앉아있는, 황녀가 지닌 근친상간의 욕망이 다시금 타오를 테니까.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주워 담을 수 있다하여도 타는 목마름에 마셔버리고 말 테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스트리아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후회하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