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10)
* * *
정의와 공리. 이 둘의 충돌은 언제나 황태자에게 딜레마였다.
옳은 일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었다.
공공의 이익이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황태자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매일 밤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았다.
그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오명이라도 쓰겠다 결심한지 오래였다.
정의와 공리. 두 명제가 충돌한다면 당연히 공리가 우선이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당신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황궁 내부는 칼을 든 자들과 칼을 피해 도망치는 자들의 고함과 비명으로 아우성인데.
율리아 게일포드의 애절한 바람이 이질적인 불협화음으로 들렸다.
“미안하지만 들어줄 수 없어.”
율리아의 어머니는 황후 소피아 아르첼의 등장 이전에 카이사리아 최고의 미녀라 불리었던 세실리아 데 히스페리아였다.
어머니의 명성처럼 딸인 율리아도 지 어미를 닮아 아름다웠다.
기사 예복으로 몸을 가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인 체 하여도 그 아름다움은 숨겨지지 않는다.
불꽃같이 붉은 머리카락과 도도한 눈빛에 육감적인 몸매가 어우러져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자신을 평범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임을 내세울 때마다, 뭇 남성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한다. 황태자도 심미안이라는 것이 있었다.
율리아가 보기 드믄 미녀라는 것을 인정했고, 그런 그녀에게 사랑받는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인간이었다. 그는 율리아 게일포드가 불편했다.
“나는 결혼한 몸이다. 위나 아르페지나가 나의 정실이지.
옆방에서 루진 아르페지나가 우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이 신성한 집무실이 발정 난 남녀의 땀 냄새로 더럽혀지길 원치 않아.
게다가 황궁이 네가 풀어놓은 군사들 탓에 아비규환인 상태다. 먼저 군사들부터 물러.”
정의와 공리.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공리다.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와의 의리를 지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중에 한가할 때,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몰래 안아주마. 율리아 게일포드. 지금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은……”
“아까와 말씀이 다르십니다. 전하께서는 제가 세운 공에 맞춰 포상을 내리신다 하셨습니다. 저는 바로 지금 태자 전하께서 내리시는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이제 율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황태자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황태자 또한 여타 귀족들처럼 이해득실의 셈법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다만, 속물 귀족들과 다르게 백성들을 위한다는 그의 목적만이 순수할 뿐.
“태자 전하. 당신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안아주십시오. 저는 당신께 바치는 충성의 대가로 전하의 피와 살을 원합니다.”
쯧. 바빠 죽겠는데.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황태자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신음 소리 흘리지 마라. 루진에게 미안해지니까.”
“노력하겠습니다.”
드디어 황태자가 율리아의 눈을 마주보고 섰다. 율리아는 새삼 놀랐다.
키가 이렇게나 크셨던가? 작디작은 꼬마 아이셨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손을 다오.”
나긋한 중저음에 율리아는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황태자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율리아는 한 순간이나마 황태자를 오롯이 소유하고 싶다 하였으니.
그래서 황태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진심으로 율리아와 살을 맞댔다.
입술로 그녀의 피부를 느낀다.
손바닥도, 손등도. 기사답게 거칠다.
그녀가 지금까지 걸어온 여기사의 삶을 황태자는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찾으려드는 암컷의 본성 또한 인정해 주었다.
“흐윽♡.”
혀로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그대로 조금씩 입술과 혀를 부비며 손등을 타고 올라갔다.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그녀의 결실을 맛보았다.
입술에 옷소매가 닿았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못 올라간다. 잠시 입술을 뗐다가 율리아를 끌어당기며 그녀의 목덜미로 입술을 바로 가져갔다.
그대로 벽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하아♡ 하아♡.”
율리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갑하지 않도록 제복의 단추를 풀어주었다.
다음 순간 황태자는 율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하며 혀를 섞었다.
안정되었던 숨소리가 다시 단숨에 거칠어졌다. 숨이 한계까지 차오른 뒤에, 입술을 떼며 황태자가 물었다.
“여기까지 할까? 되돌리려면 지금뿐이야.”
“멈춰 설 거였다면 진작에 멈춰 섰을 겁니다.”
“오늘 일은 네 일생 내내 주홍글씨로 따라다닐 게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아도 좋다. 첩실, 애인이라도 족하다.
율리아는 진심이었다.
‘이상하군. 어마마마께선 남녀 간의 정사를 더럽다고 싫어하셨는데.’
황후 소피아 아르첼은 황제 아슬란이 밤에 찾아올 때마다 울었다.
황제와 밤을 보낸 후엔 황태자를 찾았다. 너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거라며 울부짖었다.
상처가 덧쌓여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되었다.
그것이 황태자가 여자를 멀리하고, 황녀 아스트리아가 남자에 질색하게 된 이유.
‘어마마마께서는 무사하실까?’
황후를 지키는(혹은 감시하는) 여기사와 시녀들이 있기는 하다만.
그들이 제대로 어마마마를 지키고 있을까? 율리아 게일포드가 끌고 온 병사들에 놀라 전부 도망치진 않았을까?
이 난리 통에 흑심을 품은 병사가 어마마마의 내실에 몰래 침입했으면 어쩌지?
너무 늦게 생각이 닿았다고 황태자는 자책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율리아를 만족시키고, 이만 병사들을 물리게 만들고 싶었다.
황태자는 여성을 존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애무에 공을 들이는 대신 율리아 게일포드의 하의 바지만을 벗겨냈다.
그리고 깨끗하게 드러난 그녀의 하반신, 다리 한 쪽을 들어 올리고는, 그 사이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었다.
“크흣! 아하앙!”
“나의 피와 살을 가지고 싶다했으니, 가져가거라.”
신성한 집무실이 여자의 신음으로 가득 차는 게 싫다. 황태자는 율리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크흡! 읍!”
교성인지 소리 없는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밑으로도 살 겹치는 소리가 났다. 남녀의 둔덕이 맞닿아 있을 때 나는 그 추한 소리.
시끄러워 짜증이 났다.
황태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율리아를 관통하는 분노도 더욱 단단해졌다.
황태자는 그녀의 왼쪽 가슴을 잡고 비틀었다. 너무 꽉 붙드는 바람에 율리아는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심장이 답답한 만큼 아래쪽이 비좁아졌다.
“좋으냐? 율리아 게일포드. 이런 걸 바라였느냐?”
어머니를 능욕했던 아버지처럼 황태자도 율리아 게일포드를 능욕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꼴에 남자라고 자신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반항하며 밀어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율리아는 두 팔로 황태자의 목을 감싸 안았다.
황태자는 들이박기 좋게 자세를 고쳤다. 율리아의 등을 벽에 붙인 후, 그녀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받쳤다.
“아하앙♡ 깊어♡!”
황태자는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는 혐오하는 행위를 또 누군가는 좋아한다. 어머니께선 더럽다고 하신 이것을, 율리아는 바라며 졸라왔다.
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거람?
“괜찮아요. 더. 어서.”
율리아가 헤픈 것이 아니다. 사실 율리아는 남자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 이상의 벌어짐과 관통의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허나 놓치기 싫었다. 황태자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황태자를 움켜잡았다.
어떻게 해서든 황태자를 만족시키리라. 오늘이 지나도 또 언젠가 황태자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더럽다. 헌데 허리 아래가 간지러워 웃음이 난다.’
‘허리 밑으로 너무 아프다. 하지만 채워지고 있다.’
더러운 욕망과 순수한 사랑은 공존할 수 있는가.
어느덧 황태자의 욕망이 율리아에게로 옮겨가는 순간이 왔다.
“읏♡ 으흐윽♡”
마지막 순간에는 율리아도 아픔을 잊고 즐겼다. 그리고 퍼부어지는 생소한 감각.
드디어 율리아는 황태자에게서 바라고 바라던 피와 살, 그리고 채워지는 쾌감을 받아내었다.
“이만 놔라.”
황태자가 먼저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미련도 여운도 없이 율리아에게서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율리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읏♡”
움찔움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계속해서 황태자와 이어져 있고 싶었다. 황홀경이었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저는 황태자 전하께 안길 겁니다.”
주저앉은 채로, 집무실의 양탄자를 애액과 흘러나온 정액으로 더럽히며, 율리아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시 이 순간이 반복되길 바란다고. 내일. 모레. 일주일. 한 달 뒤. 1년 뒤. 10년 뒤. 100년 뒤. 다음 생이 존재한다면 다음 생에서까지.
“저는 당신의 암캐일 겁니다.”
“타락했구나. 율리아 게일포드.”
황태자는 혀를 찼다. 율리아와 다르게 황태자는 쾌락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현재의 쾌락보다 미래의 근심에 매달려 사는 인간이었으므로.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다음 생에선, 네가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했으면 좋겠군.”
냉정한 주인은 열렬한 사랑을 내비치는 암캐에게 냉소만을 들려주었다. 여전히 바닥에서 헐떡이고 있는 율리아를 외면하며, 황태자는 무심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언제 이곳에서 남녀 간의 정사가 있었냐는 듯 홀로 정리된 이후에, 황태자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만족했으면 이만 병사들을 물러. 그리고 아바마마는 지금 어디 계시지?”
율리아 게일포드는 사자가 아니다. 그녀는 사자의 사냥 도구. 사자가 숨겨놓았던 발톱.
머리와 몸통, 심장은 당연히 황제 아슬란일 테지. 검은 사자 아슬란이야말로 이번 친위 쿠데타의 주역.
잃어버린 권리와 함께 황제의 의무도 모조리 놓아버리셨으면서, 권력의 달콤함을 못 잊어,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 하신다.
오로지 권력만을. 책임 없이 권리만을. 대체 어디까지 추해지실 작정이신지.
황태자는 서둘러 아버지를 찾아뵙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더 이상 늙은 흑사자가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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