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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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섭정으로서 치세를 이어간 기간이 어언 8년째.
그러다보니 다들 잊고 있었다.
아직 카이사리아의 주인은 황제 아슬란임을.
송곳니가 뽑혀나간 사자이나, 발톱은 남아 있었다. 황제 아슬란이 숨겨놓았던 발톱을 꺼냈다.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오늘밤 황제 폐하를 배신한 역도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아르페지나, 이세티아, 랜시나, 카밀라니엔, 헤로즈, 카니나. 이들 가문원들을 모조리 체포, 구금한다.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신병을 확보한다. 반드시 안전하게 모셔야 한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휘하 기사와 병정들에게 명령했다. 명을 받은 부하들이 제각기 황궁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친위 쿠데타라고 하지.
율리아는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카이사리아의 국정을 농단한 신권파 파벌을 일거에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마침 귀족 증세 문제로 황태자가 의회를 소집했고, 손익에 민감한 귀족들은 특별세 제정을 막기 위해 저 멀리 시골 귀족까지 전부 수도로 상경해 있었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황실근위기사단장이기에, 황궁에서 그녀를 막아설 이도 없었다.
시기가 절묘하다. 이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
아르페지나 가문의 감시를 피해 가며 키운 강병들이 황궁을 급습했다.
황궁 곳곳에 숨어있는 배신자 쥐새끼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이세티아, 랜시나, 카밀라니엔 공작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아르페지나 가문과 혼인 관계로 묶여 있는 가문들이다.
테오도라 이세티아가 루진 아르페지나의 부인. 다니엘레네 랜시나가 아르페지나 남매의 어머니. 카밀라니엔 공작부인이 아르페지나 남매의 고모.
“황궁시종장 프리슬리드 데 헤로즈를 체포했습니다. 황실재무관 모렐 카니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탈출한 것 같습니다.
“모렐 카니나를 놓치다니. 아쉽게 되었군. 뭐, 프리슬리드를 잡았으니 되었어. 그자에게는 빚이 많지. 도망치지 못하게 두 다리를 잘라두도록 해.”
프리슬리드에게는 황녀를 능욕한 죄가 있었다. 율리아가 일부러 황녀를 방치해, 이런 사태를 유도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쨌든 그것으로 친위 쿠데타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냈다.
황녀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은 맞으나, 옳은 일을 위해서였다고, 율리아는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황궁 내 사용인들을 중앙 홀에 모조리 가두어 두었습니다.”
“소수의 아르페지나 가문 출신 기사들이 저항하여, 사살하였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부하들이 계속해서 쿠데타 진행 사항을 보고해왔다. 아직 성공 유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와 ‘그녀’를 잡기 전까진.
“죄송합니다.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의 신병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율리아의 부관 카트린느 에스프리드가 직접 비보를 알려왔다.
루진은 이번 쿠데타의 1순위 목표 중에 하나였다. 그가 아르페지나 가문의 영지로 달아나게 되면, 쿠데타는 실패나 다름없다.
루진 아르페지나가 자기 가문의 사병을 동원한다면, 세력이 미약한 친위 쿠데타 세력으로선 결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에이잇! 무능한 것들! 당장 수색대를 편성해서 루진 아르페르나를 찾아!”
상관의 질책에 카트린느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루진을 놓치게 되면 카트린느 자신도 죽은 목숨이란 걸, 머리 나쁜 그녀라도 이해하고 있었다.
카트린느는 황급히 변명을 했다. 나쁜 소식 뒤에 바로 희소식을 가져와야, 자신의 무능함을 감출 수 있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루진 아르페지나는 놓쳤으나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불행 중 다행이군.”
카이사리아의 황실을 모독한 주범이자, 율리아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았던 아르페지나 영애.
인질로 써야 해서 당장은 살려둬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예측대로 집무실에서 홀로 정무를 보고 계셨습니다.”
역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왕자.
그는 이번 사태를 미리 예측하였다는 듯, 칼을 들고 찾아온 병사에게 조용히 나가라 손짓하고는, 일에 다시 몰두하였다고 한다.
만약 침실에서 황태자비와 같이 있다 발견되었었더라면, 율리아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기분을 맛봐야 했을 것이다.
“태자 전하……. 정말로 무사하신지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목소리에서 독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며, 율리아는 여기사에서 다소곳한 귀족 영애로 되돌아왔다.
반역자 위나 아르페지나만 처벌하고 나면, 그녀의 자리가 되돌아온다.
황태자의 곁을 다시 율리아 그녀가 채우게 된다. 본디 황태자의 약혼녀였던 사람은 율리아였다.
“왔느냐?”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찾아온 율리아를 황태자는 무미건조하게 맞아들였다.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율리아는 서둘러 변명하였다.
“전부 대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모두 다 당신을 위해서.”
오늘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였다면, 황태자는 율리아를 반하게 만들어선 안 되었다.
그녀가 여기사가 되던 날. 황태자는 충성을 맹세하는 율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축하한다. 그리고 기대하고 있다. 율리아 게일포드.”라고 말해주었다.
그때부터 율리아의 영혼은 황태자에게 완전히 속박되고 말았다. 황태자가 건넨 축하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율리아는 황태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거 아나? 위나 아르페지나도 나에게 항상 사랑한다고 말해.
구국공 프리울드 아르페지나의 장례식날, 나는 위나에게 위로 한 마디와 함께 꽃을 건넸지.
그때부터 위나 아르페지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더군. 내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것도 전부 내 관심을 사기 위해서라고.
사랑받지 못할 거면 차라리 증오라도 받고 싶어서, 그 모든 기행을 벌인 거라며 변명하지.”
황태자는 사랑이란 감정을 몰랐다. 태어났을 적부터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란 황태자인지라, 사랑이 얼마나 따스한 것인지 겪어보려야 겪어볼 수 없었다.
가련한 신민들을 사랑하는 왕자? 그는 사랑을 모른다. 다만, 버림받은 슬픔에 공감할 뿐.
사랑이 아니라 의무감과 채무감에 기대어 정사를 돌본다는 왕자를 그 누가 이해하랴.
“그 말씀은…… 저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
“왜 황태자비 자리 따위에 집착하는지, ‘너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가문의 번영을 원한다면 공을 세우면 되는 일이야. 나는 신상필벌이 확실하니까. 외척이라고 챙겨주는 일은 일절 존재하지 않아.
남자를 원하는 거라면 딴 놈들에게 부탁하여라. 너희들은 젊고 아름답잖아?
너희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 중 아무나 골라잡으면 되는 것을, 굳이 바쁜 나에게까지 성가신 사랑 들이대지 말라 이 말이다. 알아들어?”
실연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하기엔, 황태자가 내리꽂은 가시가 너무나도 차갑고 시려웠다.
율리아는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의 자긍심마저 꺾여버려선,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전부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인데…….”
황실의 실추된 권위를 바로세우고, 국정을 원활히 진행할 원동력을 황태자에게 쥐어주는 일이다. 이 친위 쿠데타란 것은.
황태자가 율리아의 공을 공대로 포상하겠다고 한다면, 그녀가 황태자비 자리를 대가로 바라여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거라면 한 발 늦었다.”
황태자는 집무실로 바로 통하는 옆방의 문을 가리켰다.
“루진 아르페지나……. 모렐 카니나…….”
율리아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집무실의 옆방은 궁정백과 시종, 시녀들이 황태자의 부름에 바로 달려오기 위해 존재하는 곳.
율리아의 부하들은 황태자의 존재 탓에 그곳을 뒤지고 싶어도 뒤질 수가 없었다.
황태자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르페지나 공작과 모렐 재무관이 이 난리 통에도 한가롭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율리아가 찾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차례대로 나와 황태자에게 서류를 건넸다.
“아르페지나 공작령의 일부를 황실에 기증하겠습니다. 작년과 올해 영지 수입과 지출 목록을 정리해 제출하오니, 내년 영지 운영에 참고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지금 있는 관료들로는 가중되는 업무를 전부 소화하기 어려울 겁니다. 양질의 관료들을 선발·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관련 예산안을 편성하였사오니, 검토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진은 가문의 영지를 일부 기증한다 하였으나, 사실 일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알짜 중에 알짜들만 모아 놨다.
루진은 황태자의 이상에 공감하는 관료들 중 한 명. 그렇기에 그가 카이사리아의 재상인 것이고, 여동생 위나가 황태자비일 수 있던 것이었다.
“수고했네. 이만 퇴근하라 말하고 싶지만 지금 황궁이 매우 어수선하군. 잠시 옆방에서 기다려 주겠나? 금방 해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루진은 돌아가며 율리아를 힐끗 바라 보았다. 눈에 안타까움이 스며있었다.
그가 황태자와 여동생 위나를 위해 한 모든 행동이 결과적으로 율리아에게 상처가 되었다.
한 가문의 가주가 가문의 영지를 내놓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희생이다. 가문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희생한 루진을 위해, 황태자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줄 것이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용서받고 황태자비 자리를 유지할 것.
율리아 게일포드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친위 쿠데타의 의미가 사라졌구나, 율리아.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은 그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였다.
기부 받은 영지에서 난 곡물과 수입으로 나는 나의 백성들을 구휼할 생각이다. 내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어.”
그러니 이만 군사들을 물러라. 그런 뜻이렷다.
하지만 황태자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황태자의 적이 아르페지나 가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태자 전하. 이기적인 카이사리아의 귀족들은 두고두고 당신의 발목을 붙잡을 겁니다.
이 기회에 불공정한 봉신법을 뜯어 고치셔야 합니다. 다시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핑계로 태자 전하의 개혁 정책을 훼방 놓지 못하도록.”
그가 바라는 것이 이것이라면 나는 그의 바람을 실현하겠다.
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
율리아는 황태자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직 그녀는 황태자를 사랑하니까.
“글쎄. 균형이 중요해. 내가 언제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고, 너희들의 기대대로 내가 변치 않는다 하여도, 나의 후계가 제대로 된 황제가 된다는 보장도 없다. 황제를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카이사리아는 신권이 너무 막강합니다. 더구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위임받은 권력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기는커녕 가렴주구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시야에서 카이사리아의 황권과 신권의 균형을 논하기에는, 지금 당장 거대화된 신권의 패단이 큽니다. 이를 방치하시렵니까?”
황태자가 사랑이 아닌 이상을 논한다면, 율리아도 그와 발걸음을 맞춰야겠지.
좀더 사랑하는 쪽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황태자는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의회를 소집해. 대헌장을 수정해야겠어.”
황태자의 허가가 떨어졌다. 하지만 율리아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었다. 자신은 신상필벌이 확실하다고. 율리아는 대가를 먼저 받아 챙기기로 했다.
“늦은 밤이옵니다. 아침이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사옵나이다.”
“그래서. 또 무슨 말은 하고 싶은 게냐?”
“이제 황태자비 자리에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대신에…… 부디 마지막 정을.”
하룻밤의 정이라도 좋았다. 율리아는 단 한 순간이나마 황태자를 소유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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