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8화 (8/31)

〈 8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8)

* * *

어둠 속에서 아기 품은 요람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머니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Dou­ ce­ment s'en­ dort la ter­ re.”

흐느끼듯 섧은 가락의 자장가였다. 하지만 아가는 어머니의 자장가가 싫지만은 않은지,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쉬며 잠이 들었다.

착하기도 하지.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아스트리아는 자기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트리아.”

황태자는 그런 여동생과 조카아이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니? 황녀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비천한 남자인 것이냐?

하지만 괜찮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스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은 요람을 밀고, 입술은 자장가만을 머금었다.

다시 황태자는 말했다.

“혹시 강간이라도 당한 것이냐? 말해다오. 설령 그렇다면 내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네 순결을 짓밟은 자에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남겨줄 것이야.그러니 대답해다오.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1년이나 지난 일이지.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저 멀리 이웃나라와 오가던 혼담도 취소되었다.

아스트리아는 황궁에, 오라버니 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애욕에 눈멀어 오라버니의 신성을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아비가 누군지 결코 밝힐 수 없는 아이를 낳았다.

“부디 아무 것도…… 묻지 말아주세요. 오라버니.”

요람을 흔들던 손이 멈추었다. 아스트리아는 조용히 눈물 흘렸다.

어머니가 일으킨 꿈의 파도도, 자장가도 없다. 사랑의 부재를 알아챈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려 했다.

황태자는 아기바구니로 다가갔다. 그는 요람에서 조카아이를 건져, 품에 안았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자신을 안아든 남자가 외삼촌이자 친아버지임을.

아기는 울음을 터트리려다 말았다.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옳지. 착하구나. 착해.”

황태자는 잠든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기의 머리카락은 황태자처럼 검은색이었다. 카이사리아 황가 특유의, 햇빛 아래서도 푸르슴하게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이나, 황녀의 아이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나는 이 아이를 나의 조카아이로 받아들일 것이야.

그러나 사생아를 황가의 일원으로 인정할 순 없는 노릇이지. 전례가 없는 일이야.”

아스트리아가 평생을 품고 지내야 할 비밀 탓에 아기는 정당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아들임을 주장할 수 없었다.

엄마가 미안해.

아스트리아는 눈물어린 사과를 속으로 삼켰다.

“오라버니의 조카이지만 황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아이라니. 제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새 이름을 줄 것이야. 클로비스 플랑섀넌. 이제부터 이 아이의 이름이 될 것이며, 공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것이야.”

클로비스는 영광스런 전사라는 뜻. 황태자는 조카에게 기사의 운명을 쥐어주려는 것이었다.

헌데 플랑섀넌이란 단어는 아스트리아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체 플랑섀넌이란 무슨 의미일까?

하여 아스트리아는 되물었다.

“플랑섀넌은 무슨 뜻인지요? 오라버니.”

“봄의 그림자란 뜻이다.”

봄은 따사로운 계절이지. 그런 봄의 뒷면이란.

사무치게 춥고, 어둡고, 절망적이겠지.

즉, 겨울.

사람들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계절.

죽음과도 같은 시간.

클로비스란 존재는 황태자에게 겨울과도 같았다. 그에게 시련을 주는 존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황태자는 황녀 아스트리아에게 그의 결정을 통보하였다.

“클로비스는 원죄를 타고났다. 본의 아니게 그 존재만으로 황가의 권위를 뒤흔들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아스트리아. 현 시간부로 너는 클로비스를 만날 수 없다. 유모와 함께 저 멀리 북방으로 보낼 것이야.

클로비스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수도 영지에 발을 들일 수 없다.”

황녀와 아기를 영원히 찢어놓는다. 그것이 황태자의 판결.

물의를 일으킨 황녀에 대한 벌이자, 아기가 지닌 원죄에 대한 처벌.

“안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어요! 아기만은…… 제 아기만은……. 오라버니…….”

아스트리아가 울며 빌었다. 여동생이 울 때마다 등을 토닥이며 달래던 오라버니가, 지금은 여동생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황가의 일이란 정으로 통용될 수 없는 것.

“미안하구나. 아스트리아.”

아스트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황제 아슬란이 노발대발했다.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한 아스트리아를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부정한 존재인 클로비스를 죽여 없애겠다 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황태자는 묘수를 짜내야만 했다.

아스트리아의 임신을 알고, 아기를 출산하기까지 7개월. 그 7개월간의 고민 끝에 나온 해답.

동생을 지키고, 조카를 살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어미와 자식을 찢어놓는다.

어머니의 모성애를 짓밟고, 아들의 그리움을 난도질하는 정도의 벌이 아니라면, 모자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었다.

“미안하구나. 클로비스. 나의 조카아이야.”

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지 모르겠다.

황태자 또한 가슴 먹먹해지는 슬픔을 느꼈다.

단순히 조카랑 헤어지는 것뿐인 일인데도.

그는 눈물과 함께 조카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여동생에게서 멀어졌다.

마음이 차디찼다.

***

시집가지 않은 황녀가 아이를 낳았다. 아비 없는 아이를.

덮고 싶다고 하여 덮어질 수 있는 추문이 아니었다. 게일포드 가문은 이를 수면 위로 건져내어 정치화했다.

귀족들이 모두 모인 궁정에서 율리아 게일포드는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와 시종장 프리슬리드를 고발하였다.

“클로에 글로리쉬가 증언하였습니다. 황태자비가 시녀 클로에를 협박하여 무단으로 황녀의 침실을 침범하였습니다.

시종장 프리슬리드 데 헤로즈를 동반하고서 말이지요. 밤중에 황녀의 내실을 방문할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그리고 약 10개월 뒤 황녀 전하께선 사생아를 생산하셨습니다.

틀림없이 황태자비의 비호 아래서 시종장 프리슬리드가 황녀 전하를 욕보인 겁니다.”

그만하라.

황태자는 나직이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창문을 향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 무슨 무례지? 율리아 게일포드. 아무런 증거도 없이 모함이라니!”

“제가 황태자비 전하와 함께 황녀 전하의 내실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오나, 황녀 전하를 욕보인 적은 없습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벽난로 위에 먼저 오른다고, 황녀 전하께서 앞에선 순진한 척, 뒤로는 남자들과 문란하게 놀아난 것이 어찌 제 탓이란 말입니까?”

시종장 프리슬리드가 겉과 속이 다른 황녀의 행실을 비난했고, 아르페지나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맞장구치며 동조했다.

“그만하라.”

황태자는 낮게 속삭였다. 그의 손등이 미미하게 떨렸다. 조용히 끓고 있었다.

“천박하오! 프리슬리드! 경의 방금 발언은 황실 모독이오! 태자 전하. 언제까지 아르페지나와 그들 가신 가문이 벌이는 만행을 묵과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만 닥치라 하지 않았느냐!”

황태자는 황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가 궁정 안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귀족들의 소근거림이 멈추었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끓는 듯한 분노가 한숨이 되어 흩어졌다.

오라버니로서 여동생의 행실이 어쩌네 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황녀가 침묵하고 있으니, 증거도 없이 아르페지나 가문과 프리슬리드를 처벌할 수 없다.

벌써 7개월째 되풀이하는 말이 아니던가.

남의 가정사에 이만 관심을 끊어주었으면 좋겠다. 황태자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귀족들을 한 데 불러 모은 것이다.

“또 눈이 내리고 있다.”

황태자는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소복히 함박눈이 쌓이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 첫눈이 내렸다. 올해 초봄에도 눈이 내렸다. 가을에 거두어야 할 밀이 이른 서리에 얼어 죽었고, 봄밀은 언 땅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감자도 보리도 말라비틀어졌다.

올해도 작년처럼 겨울이 길어질 듯싶다. 교단에선 나의 덕이 모자라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 말한다.

하늘의 여제께서 성전을 바라시는데, 내가 여신의 뜻을 부정해서 이 사달이 일어났다고 나를 비토하고 있다. 경들도 이에 동의하는가.”

“…….”

궁정 안이 고요해졌다. 그가 분통을 터트렸을 때보다도 더.

혹시 그들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황태자의 다음 발언에 대한 귀족들의 반응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여기 있는 귀족들 모두에게 특별세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 돈으로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할 것이야.

그리고 병사들을 빌려다오. 해군을 편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고기를 낚게 할 것이고, 또 엽병을 편성하여 산과 들에서 고기를 제공할 짐승들을 사냥하게 할 것이야.”

경들의 뜻은 어떠하오.

황태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난과 반대를 위한 반대가 궁정 안을 가득 채웠다.

“불가합니다! 봉신법 위반입니다!”

“황제는 군림하되 지배할 수 없어야 합니다! 이는 황실과 봉신 간의 약속입니다!”

구국공 프리울드는 폭군 아슬란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황권을 최소화했다.

황실은 군대를 가질 수 없다. 귀족과 의회의 동의 없이 증세할 수 없다. 정당한 이유 없이 귀족을 체포, 사형할 수 없다.

황태자는 약해진 황실의 권위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때,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황녀의 불유쾌한 임신 사건을 빌미로 반대파를 찍어 누를 생각만 하지, 진정 백성을 위하려 하는 자들은 없었다.

‘아르페지나의 치부를 덮어줘. 그러면 협력해줄게.’

나를 상대로 거래하려 들지 마라, 위나 아르페지나.

‘아르페지나 가문을 역도들로 규정하고 영지와 재산을 몰수 하십시오. 아르페지나의 영지에서 비축해놓은 작물과 재산이면 충분히 백성들을 구휼하고도 남습니다.’

그 전쟁이 단기간에 끝난다는 보장이 있느냐, 율리아 게일포드.

“신물이 난다.”

카이사리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탕평책을 고수해왔는데.

이제 진짜로 아르페지나와 게일포드,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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