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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7화 (7/31)

〈 7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7)

* * *

식물원의 유리벽을 타고 내려온 빛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졸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 눈이 감겼다. 황녀 아스트리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장악해버린 황궁인지라, 황녀는 자신의 침실에서조차 안정을 찾지 못했다.

또 위나 아르페지나가 자신을 덮칠 남자를 보낼까봐 무서워 덜덜 떨었다.

이제 그녀가 안심하고 잠들 수 있는 장소는 두 군데 외에 남지 않게 되었다.

오라버니의 품과 이곳 식물원.

꾸벅꾸벅 졸던 아스트리아는 결국 피크닉 테이블에 팔베개를 한 채로 잠이 들었다.

그날 밤의 악몽이 재현되었다.

‘무슨 짓이야, 모렐 카니나!’

‘아르페지나의 가신이 아닌, 네 오빠 친구로서 당연한 일은 한 것이다, 위나. 철부지 짓 좀 작작해. 언제까지 루진에게 폐가 될 행동을 골라할 작정이냐?’

모렐 재무관이 아스트리아를 구해주었다. 그가 찢어진 드레스의 황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그리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오늘 일은 부디 불문에 붙여주십시오.’

너도 똑같아, 모렐 카니나. 결국 나를 도와준 것은 내가 가련해서가 아니라, 네 주인 루진 아르페지나의 명성에 흠집이 날 것 같아서 그런 거였잖아.

황녀는 외톨이였다. 그녀는 무색무취했다. 황제는 황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황후는 자기 처지를 비관하느라 바빴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그녀를 업신여겼다.

니나와 발레리, 황태자비의 심복 둘이 힘없는 황녀인 아스트리아를 킥킥 비웃었다.

프리슬리드, 그 늑대가 그녀를 덮치려 했다.

율리아 게일포드가 황녀를 지켜주지 않았다.

황녀의 전속 시녀인 클로에 글로리쉬가 황태자비를 막아서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터주었다.

밉다. 어제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 모두가 밉다.

가해자들이 미웠다. 방관자들 또한 미웠다.

그와 그녀들 모두 강간당해 죽었으면 좋겠다.

아스트리아는 조용히 숨죽여 울었다.

“황녀 전하.”

볼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아스트리아는 퍼득 눈을 떠서는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아. 클로지아 마네.”

이 식물원을 관리하는 마녀이자 궁정의인 클로지아 마네였다.

어쩌면 황궁 내에 유일한 아스트리아의 친구. 스승.

그녀가 아스트리아에게 마법에 재능이 있다 알려주었고, 마력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쓸 수 있는 마법은 일시적으로 근력을 강화하는 것이랑 슬픔을 망각하게 하기 정도였지만.

“무슨 일이신가요오? 울고 계시던데. 혹시 나쁜 일이 있으셨나요?”

“아냐. 꽃가루 알레르기야.”

“하긴. 여긴 알록달록 겉모습만 예쁜 독초가 가득하니까요.”

그래. 황궁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독초들이 가득하다. 위나 아르페지나라던가.

아스트리아는 황태자비를 독살하는 상상을 했다. 궁정의 클로지네 마네에게 배워 황녀는 식물학에 정통했으니까.

그러나 아스트리아는 그 상상을 떨쳐냈다. 위나 아르페지나가 죽으면 카이사리아의 정치판이 요동친다.

카이사리아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오라버니, 황태자 전하께 누를 끼치고 만다.

오라버니. 나의 왕자님.

황녀가 불행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애틋해져만 갔다.

오라버니를 위하여. 황녀는 오라버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클로지아. 오라버니께서 식물도감을 편찬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너도 도와주지 않겠어?”

“이미 소식 들어 알고 있습니다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가 한가할 틈을 주지 않으시네요.”

“미안해, 클로지아. 너 외엔 맡길 사람이 없어.”

“아닌데요. 한 사람 더 있는데요? 어딜 황녀 전하 혼자 쏙 빠지려 하십니까? 스승이 일하는데 제자가 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요.”

그러나 아스트리아는 식물도감 편찬에 힘을 보탤 수가 없었다. 황녀는 씁쓸히 웃으며 사실을 고백했다.

“있지. 궁정에서 아침 조회 시간에 그 얘기가 나왔대.”

“무슨 이야기 말씀인가요?”

“나를 이만 시집보내는 게 좋겠다고.”

아마 위나 아르페지나가 벌인 짓. 그 미친 여자는 시누이조차 질투한다.

자기는 친오빠인 루진과 놀아나면서. 황녀가 황태자를 남자로 느끼도록 충동질했으면서.

“어디로 가십니까요?”

“북녘 고독한 섬 에일르네흐일까? 에일르네흐의 다섯째 왕자가 나랑 동갑이니까.”

“아쉽습니다. 그래도 황녀 전하께서는 아름다우시니 어딜 가나 사랑받으실 겁니다.”

클로지아. 너도 나를 붙잡지 않는구나.

황녀는 낙담했다.

그녀가 황녀이기 때문에 클로지아가 다정한 체 했을 뿐, 속으론 귀찮게 여기진 않았는지 의심했다.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순수가 악의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전부 밉다.

클로지아도 ……당했으면 좋겠다.

“후. 후후후.”

“황녀 전하?”

“아냐. 후후후. 행복해서 그런가? 갑자기 웃음이 다 나오네?”

황녀는 음산하게 키득거렸다. 클로지아가 이상을 느꼈으나, 다시 황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어느덧 황녀의 얼굴에선 어둠이 지워져 있었다.

에이. 잘못 봤겠지. 클로지아는 가까스로 불길한 감상을 떨쳐내었다.

여전히 황녀의 입가에선 순진하고, 소심하고, 별꽃처럼 청초하기만 한 미소가 감돌뿐이었다.

그 미소야말로 황녀에게 죽음을 부르는 검은 튤립이라는 명성을 부여한 혼돈의 매력.

“그보다 클로지아. 요즘 오라버니께서 불면증에 시달리시는 것 같은데, 좋은 약재가 없을까?”

황녀가 다시금 입가에 요염함을 머금었다.

***

“오라버니. 차 드세요.”

“응. 그쪽에 둬.”

아스트리아가 차를 내왔으나 황태자는 일하느라 바빠 여동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스트리아는 고양이처럼 황태자의 집무실 책상에 얼굴 반쪽과 여섯 개의 손가락을 빼꼼 내밀었다.

황태자는 여동생을 힐끗 보고는 애써 웃음을 감추었다.

일부러 장난치듯 무시하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바쁘신가요?”

결국 아스트리아가 먼저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황태자는 하하 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미안해. 아스트리아. 오늘은 진짜 바빠.”

“그래서 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정말로 무시할 생각이신가요?”

“음……. 10분 정도라면 시간을 내줄 수 있지.”

황태자는 여동생의 머리에 손을 척 하고 올렸다. 아스트리아는 오라버니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겼다.

황태자의 손은 황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가다 뺨으로 옮겨갔다.

“오라버니. 키스해주세요.”

황태자가 황녀의 애교에 녹아버렸다. 그는 황녀에게 친애의 키스를 건넸다. 단, 그녀의 왼쪽 뺨에만.

오라버니의 입술이 뺨에 닿는다. 촉촉하다. 아스트리아의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오라버니…… 저…… 안아주세요.”

황태자는 여동생의 목소리에서 흐릿한 떨림을 느꼈다. 걱정스럽게 여동생과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느냐?”

“악몽을 꾸었어요. 오라버니.”

“무슨 꿈?”

“오라버니랑 영영 헤어지는 꿈.”

그제야 황태자는 아스트리아를 진심으로 바라봐주었다. 다 큰 여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끌어안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러고 있으렴.”

황녀는 인형이었다. 고양이였다. 그리고 아기였다.

오라버니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존재.

오빠의 품에 안겨 여동생은 서글프게 속삭였다.

“오라버니……. 이러고 있는 걸 남들이 보면 오해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남매인데.”

“하지만 저도 여자인걸요? 가슴도 봉긋이 솟아올랐고, 허리도 가늘어요.

다들 저보고 아름답다 말해요.”

“그래. 아름답더구나. 여동생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나는 네게 반했을 게다.”

마음이 어긋났다. 황녀는 오라버니를 더 이상 오라버니로 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황태자는 황녀를 여동생으로만 보고 있었다.

억지로 욕망을 누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만히 오라버니의, 황태자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두근. 두근. 두근.

그의 심장 소리는 평화를 노래하는 카나리아 같이 조용하고 나긋했다.

붉게 타오르는 정열처럼 붉어진 황녀의 마음과 대조되었다.

서걱서걱.

황태자는 황녀를 품은 채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카이사리아를, 온 세계를 둘러보고 있었다.

고민 끝에 사인하고, 고심하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황녀는 차가 넘어가며 울렁대는 황태자의 목울대를 지켜보았다.

“후. 후후후.”

아스트리아가 낮고 교태로운 비음을 흘렸다. 이제 순진한 여동생인 척 내숭을 떨 필요가 없어졌다.

황태자는 잠들어버렸으니까.

방금 황태자가 마신 차에는 수면제와 황녀의 피 한 방울이 들어 있었다.

황녀의 피가 황태자의 몸속에 들어가서는 그의 맑은 정신을 어지럽혔다.

아스트리아는 기억과 망각의 마녀였다. 마력의 원천은 증오.

위나 아르페지나를 증오하며 단기간에 마력이 강해졌고, 그것으로 황태자의 신성을 더럽힐 수 있었다.

“아아. 오라버니. 나의 왕자님. 나의 황태자 전하.”

황녀는 황태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져보았다. 마치 밤을 손에 쥔 듯 했다.

그의 눈썹도 만져보았다. 그의 귓볼도. 뺨도. 턱 선도.

“멋있어요. 오라버니.”

아름답다는 건 신께 사랑받는다는 것.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황태자가 아름다운 건 필연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잘생긴 나머지 여동생의 마음마저 흔들어 놓았다.

아스트리아는 이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나. 오라버니랑 하나가 될래요.”

잠든 오라버니께 키스하며, 목덜미를 핥으며, 황녀는 그의 무릎 위에서 속옷을 벗었다.

신성이 더럽혀진 황태자는 꿈속에서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욕망을 일으켰다.

아스트리아는 오라버니의 허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아♡ 둘로 갈라졌던 피가 이제서야 하나가 되니, 이는 운명이라.

오라버니는 모르실 거예요.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그와 키스한다. 그의 혀는 내 것이다. 달디 단 침을 삼키며, 아래쪽으로는 오라버니를 품었다.

아프지만 힘냈다.

아끼고 아낀 처녀를, 순결을 오라버니께 줄 수 있어 기뻤다.

가시덤불처럼 조이고 얽힌 끝에, 황녀는 오라버니의 정과 기를 얻을 수 있었다.

영혼은 꿈속에. 육신은 근심 속에. 황태자는 금기를 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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