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6화 (6/31)

〈 6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6)

* * *

또 꿈이다.

고아, 병자, 장애인, 노인 등등.

온갖 서글픈 인생들을 경험해본 황태자였으나, 오늘 꿈은 꽤나 유니크했다.

‘그어어어­­­!’

그는 마물이었다.

손가락은 4개. 눈은 하나. 인간보다 하나씩 모자란 마물.

그는 단 하나뿐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불타고 있었다.

‘아직 한 마리 남았네.’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어어어­­­.’

아름답구나. 소녀여.

피 묻은 성녀복이 어찌나 성스러운지.

성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에 황혼의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어린 성녀께 엎드려 경배 드렸다.

‘그어어어­­­.’

하늘의 여제께 은혜 받은 성녀시여. 당신께서 지닌 찬란한 빛에 경배 드립니다.

부디 용서할 수 없는 저희들을 용서하소서.

비록 마물로 태어났으나, 저희들은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한 적 없습니다.

단지, 숲에 먹을 것이 떨어져, 양식을 구하려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왔을 뿐입니다.

‘뭐라는 거야? 이 괴물이.’

그의 말은 닿지 않았다.

마물의 혀는 썩어 문드러져 있었으니까.

그의 말과 언어는 어눌한 숨소리 외엔 없었다.

성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철퇴를 쳐들었다.

‘그어어어­­­.’

부디 용서를.

비록 흉측한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저는

인간입니다.

‘죽어.’

철퇴가 내리쳐졌다.

그의 하나뿐인 눈을 짓이겼다.

그는 즉사하지 않았다.

울컥울컥 슬픔만을 안에서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었을 뿐.

‘에이미! 그만 노닥거리고 이만 돌아가자!’

‘응! 갈게!’

소녀들의 웃음이 들렸다.

그들의 목소리에선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들이 없앤 건 인간이 아닌, 마을을 습격한 마물이었으니까.

***

“크흑! 큭!”

잠에서 깬 황태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또 꿈이다.

이마가 쪼개질 듯 아팠다.

성녀에게 철퇴로 얻어맞아서 그런가.

“이름이 에이미랬나?”

공교롭게도 성녀 에스텔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견습 성녀의 이름이 에이미였다.

머리카락도 적갈색이었고.

“맞네. 신심의 성녀 에이미.”

에스텔의 소개로 한번 만난 적 있었다. 천진난만한 소녀로, 황태자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경어린 시선을 보내왔었다.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심이 깊은 만큼, 종교적 열정을 너무 과도하게 내비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믿음은 광신이 될 수 있다. 신심 깊은 성자와 성녀들이 이교도와 이단자들 상대로는 살육에 미친 학살자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에이미.

네가 죽인 마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꿈에서 마물이 되어본 황태자는 마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둥병 환자였다.

그는 인간이었다.

“성전을 막아야 할 이유가 또 생기고 말았군. 하다하다 인간 외 존재의 슬픔까지 짊어져야 하다니. 왕의 자격이란 이렇게나 고달픈 것인가.”

황제 아슬란조차 견디기 힘들어서 어린 아들에게 내팽개치듯 던진 의무였다.

무책임한 아버지처럼 황태자도 이 의무를 떨쳐버릴 수도 있었다.

여동생 아스트리아의 힘을 빌려 망각해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던져버리거나.

이 의무를 버릴 수 있는 방법쯤은 이미 두세 개 정도 찾아놓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버릴 수 없다.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 가여워서.

황태자가 그런 성격이라서 하늘의 여제는 공감이란 능력을 내려준 것인지도 몰랐다.

‘되었다. 어차피 평생을 껴안고 살기로 한 저주로다. 단지, 슬픔과 함께 찾아오는 무력감에 내가 꺾이지 않길 바랄 뿐.’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황태자는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를 찾았다.

사랑 없이 한 결혼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반려가 아닌가.

황태자가 충실할수록 위나도 황태자에게 협력적일 테고.

그러나 없다.

침대 옆을 더듬어 보았으나 빈 허공만이 만져질 뿐이었다.

그녀는 어디에 갔을까. 숨겨놓은 정부라도 만나러 갔을까?

최근 새로 시종장으로 임명된 프리슬리드 데 헤로즈가 위나의 정부라는 소문이 돌던데.

뭐, 위나가 오빠랑 놀던, 프리슬리드랑 놀던, 막말로 창녀촌에서 창녀인 척 하루 종일 손님을 받는 놀이를 한다 한들 황태자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 이해하니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인간은 외로운 존재거든.”

***

황녀 아스트리아 또한 퍼득 잠에서 깼다.

그녀가 황태자처럼 악몽을 꾼 건 아니었다.

악몽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히끅! 그만!”

이름 모를 사내가 그녀를 덮쳤다. 그가 황녀의 양 손목을 붙잡은 채, 집요하게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 남겼다.

“싫어!”

이대로 강간당할 순 없어. 황녀는 몸 안의 마력을 돌렸다. 연약한 황녀의 몸에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어이쿠!”

사내는 침대 바깥으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유들유들 이죽거리며 일어섰다.

“앙칼진 황녀님이시라니까? 다음 순간을 기대하게 만들어.”

“프리슬리드 데 헤로즈?”

황궁시종장 프리슬리드였다. 위나 아르페지나가 시집오면서 꽂아 넣은.

“그래. 맞아.”

대답은 프리슬리드가 아니라 푸른 드레스의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의 입에서 나왔다.

그녀의 뒤로는 니나와 발레리. 황태자비의 심복인 시녀 둘이 키득거리며 아스트리아를 비웃고 있었다.

황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과 치밀어오는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율리아 게일포드는 황태자비가 매일 밤 정부를 만난다는 헛소문에 낚여, 그 헛소문을 쫓느라 바쁘시지. 멍청한 계집이라니까?

클로에 글로리쉬는, 훗, 비키라 한 마디에 벌벌 떨며 물러나던데?”

황궁 경호를 담당하는 율리아 게일포드는 위나 아르페지나가 저지른 부정의 증거를 찾는데 혈안이었다.

위나 아르페지나만 내쫓을 수 있다면, 황태자비 자리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산 착오. 아르페지나 가문원들로 가득 찬 황궁에 율리아 게일포드마저 없으면, 황녀는 양치기 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어린 양이 되어 버린다.

게다가 황녀 전속 시녀인 클로에 글로리쉬마저 황녀를 배신했다.

눈앞에는 독사 셋과 늑대 하나. 황녀는 사냥감이 되었다.

“너. 짜증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독사가 말했다. 그녀가 독니를 드러내며 황녀를 위협했다.

아스트리아는 장미처럼 조그마한 가시를 드러내며 독사에게 맞섰다.

“위나 아르페지나. 당신이 지금 벌이는 짓은 황실 모독이에요. 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

“뭐? 황실 모독? 아하하! 웃기지도 않아. 황제의 전리품 소피아 아르첼의 딸년인 주제에.

네 어미가 전리품이듯, 너도 매상품이야. 팔려나가길 기다리는 황가의 특산품. 너 아직 처녀라며?”

“그게 뭐 어때서요? 위나 아르페지나. 당신 같은 걸레보다는 내가 나아요.”

탁. 위나 아르페지나가 부채를 접었다. 그리고는 뱀처럼 씨익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스트리아는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말았다.

실수였다. 기 싸움에서 밀리고 말았다.

“남자 경험이 없는 것이 자랑이라니, 어쩔 수 없네. 내가 호의를 베풀어, 여자의 기쁨을 가르쳐줄 수밖에.

니나. 발레리.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렴. 황녀가 여자가 되는 순간을 말이야.”

악취미였다. 황녀를 능욕하는 것뿐만 아니라, 니나와 발레리를 시켜, 그 소문까지 퍼트리겠다고?

“프리슬리드. 어서 시작해. 계집년들 먹고 버리는 게 네 특기잖아?”

“예이예이. 아가씨 말대로 합지요. 저런 미녀를 안게 해주시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프리슬리드가 다시 접근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죽음을 부르는 검은 튤립. 황녀님의 별명이라지요?”

황녀는 남자를 싫어하니까. 온갖 기사와 영주들이 구애해도 황녀는 무덤덤했다.

그러나 황녀의 미모는 남자를 멀리하고 싶어도 멀리할 수 없게 만드는 유혹이었다.

황녀의 관심을 사려 무리수를 둔 남자들 몇몇은 그들 자신의 과오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했다.

하여 황녀 아스트리아의 별명이 죽음을 부르는 검은 튤립.

치명적인 유혹.

“당신 같은 미녀랑 잘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프리슬리드가 황녀의 두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침대에 억지로 눕혔다.

반항하려 해도, 그녀가 쓸 수 있는 마법은 슬픔을 지우는 망각 마법과 근력 강화가 전부였고, 마력조차 아까 크리스타드를 떨쳐내면서 바닥이 나버렸다.

그녀는 아직 마녀가 아니라 연약한 황녀님이었다.

“누가…… 제발 누군가……. 도와줘요. 오라버니…….”

아스트리아는 두려움에 떨며 울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랐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위나 아르페지나의 냉소와 재촉. 프리슬리드는 황녀의 눈물에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억센 두 손으로 황녀의 잠옷을 찢어발기느라 바빴다.

검은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져나가고, 드디어 드러난 하얀 속살은 투명하니 맑았다.

프리슬리드는 입으로 황녀의 연약한 속살을 애무했다. 그의 욕망도 불끈 솟아나 황녀의 순결을 찢어놓을 준비를 했다.

“그만해, 프리슬리드.”

아직 하늘의 여제께서는 황녀를 사랑하는가. 황녀를 비극에서 건져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방을 한 바퀴 휘감았다. 방해를 받은 프리슬리드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볼멘소리를 냈다.

“제길. 오늘은 날이 아닌가? 왜? 네가 먼저 하고 싶냐? 모렐 카니나.”

황실 재무관 모렐 카니나였다. 하지만 황녀로선 반갑지 않은 흑기사였다.

모렐 카니나는 크리스타드와 루진 아르페지나의 친우, 위나 아르페지나의 심복이었으니까.

“남자가 둘이 되었네? 오히려 잘 되었어. 모렐. 크리스타드와 함께 황녀를 범해. 아르페지나의 주인인 나, 위나 아르페지나의 명령이야.”

잊을 수 없는 밤으로 만들어주마. 황녀 아스트리아. 다신 황태자에게 꼬리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지.

위나 아르페지나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가씨의 명령을 받든 모렐은 안경을 치켜 올렸다.

“부디 지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모렐은 냅다 위나 아르페지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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