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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5화 (5/31)

〈 5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5)

* * *

아침 일찍 어마마마께 문안 인사를 올린다. 그리고 뺨을 맞는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외치는 말은 한결같았다.

너 따위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황태자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거르고 바로 섭정 업무를 시작했다.

황태자에겐 정치에 완전히 손을 뗀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돌볼 책임이 있었다.

별로 힘들지 않아.

황태자는 이 삭막한 집무실에서 아늑함을 느꼈다. 묵묵히 일을 하고 있을 때마다, 자신의 원죄가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아, 오히려 행복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많다. 그들과 비교해 벨벳 망토를 걸치고, 아늑한 황궁에서 거주하는 나는 얼마나 큰 사치를 누리고 있는가.

이 은혜에 나는 답해야 한다. 내가 위임받은 권력은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황태자는 새로운 예산안을 짰다. 이 예산으로 식물학자들을 고용할 것이다. 그들이 약초와 독초를 구분하는 식물도감을 편찬할 것이다.

무지한 소년이 독초가 독초인 줄 모르고, 그것으로 풀죽을 끓여 동생들에게 먹이는 일이 없도록.

전날 밤의 악몽을 황태자는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황태자비, 금발 푸른 눈의 미녀 위나 아르페지나를 안았음에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었다.

황태자는 망각을 몰랐다. 죄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망각이 아니라, 속죄에 있었다.

“오라버니?”

“아스트리아.”

잠시 방해가 껴들었다. 황녀 아스트리아가 황태자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일하는 오빠를 방해한 것이 미안한지 수줍어했다.

“일을 방해받는 거 싫어하시는 거 알지만요……. 하지만 아침을 거르셨다고 들어서요. 쿠키를 조금 구워왔어요.”

“간식인가? 좋지. 마침 휴식하려던 타이밍이었어.”

아스트리아는 쿠키가 담긴 접시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라버니.”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말을 삼갔다. 다소곳이 인사드리고 진짜로 물러나려 했을 때.

“섭섭하구나. 분명 내가 휴식하려 한다 했을 텐데.”

“읏! 오라버니…….”

돌아가려 하는 아스트리아를 황태자가 붙잡았다. 그는 황녀를 무릎에 앉히고, 그의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부비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남들이 보면 오해해요.”

“그런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구요…….”

황태자는 여동생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놓을 이가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여동생 외엔 없을 뿐.

“내 체질 알지? 또 악몽을 꾸었어.”

카이사리아의 황실에는 특별한 능력이 전해내려 온다. 국가와 백성들을 잘 다스리도록 하늘의 여제께서 내린 특별한 힘이라고들 한다.

황태자가 받은 능력은 공감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자기 일처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황태자는 체질이라 하였지만, 체질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수백, 수천, 수만의 슬픔을 홀로 끌어안고 있으시니, 그 눈물들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버거우실까.

아스트리아는 얌전히 오라버니께 어깨를 빌려드렸다.

“아스트리아. 오늘따라 더. 외롭구나.”

황태자는 나약함을 드러냈다. 자리와 자세를 바꾸었다. 동생을 의자에 앉히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은 부계로부터 이어져온 피의 특성이었다.

하지만 아스트리아의 얼굴은 황후 소피아 아르첼을 몹시 닮아 있었다.

황태자는 아스트리아에게서 어머니를 느꼈다.

“어마마마…….”

그는 황녀 앞에서 무릎 꿇고, 황녀의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스트리아는 나약함을 드러내는 오라버니를, 그의 머리를 상냥히 쓰다듬어 주었다.

“지워드릴까요?”

황태자가 공감의 능력을 지닌 것처럼 황녀도 특별한 힘이 지니고 있었다.

온 세상의 슬픔을 느끼는 오라버니와 대칭을 이루듯, 그녀는 타인의 슬픔을 일시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안 돼. 지워선 안 돼. 내가 짊어진 슬픔들은 나의 책무이자 이정표니까.

잠시 이렇게 있어주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황태자는 아스트리아가 제안한 망각의 선물을 거절했다.

자신 안에서 슬픔을 지워버리면, 그의 의지도 꺾일 것만 같아서.

“대신에. 만일 이 오빠를 위한다면……. 진실로 돕고 싶다면……”

아스트리아의 능력은 패시브인 것 같다.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 망각의 마력이 온기가 되어 황태자를 어루만져 주었다.

황태자의 기억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채로, 우울함의 껍데기만을 벗겨냈다.

우울함이 지워지니 현실감이 돌아왔다. 황태자는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다.

“게일포드 가문의 팔남 쥴리안 게일포드가 아직 미혼이라지.

내 의견은 어떠하니? 아스트리아.”

순간, 오라버니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황녀의 손이 멈춰 섰다.

“싫어요!”

자신도 모르게 아스트리아는 날카롭게 외치고 말았다. 그러고는 무안한 듯 떠듬떠듬 변명했다.

“쥴리안 경은 책임감 없는 사람이래요. 저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 싫어요.”

“그렇구나…….”

황태자는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싫은 결혼을 여동생에게 강요하기도 미안했다.

희생으로 얻은 평화는 깨지기 쉬운 편이니까. 황태자와 위나 아르페지나의 결혼 생활이 그러하듯.

“아스트리아. 너는 어떤 남자가 좋으니?”

어떤 남자가 좋으냐고? 아스트리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진심을 고백했다.

정말로 싫은 새언니 위나 아르페지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덕분에 알게 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저는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좋아요.”

이 마음이 전해졌을까. 금기임을 알고도 전한 이 마음을.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황녀 앞에서 무릎을 펴고 섰다.

황제 아슬란에게 물려받은, 달조차 뜨지 않은 밤처럼 검은 머리카락.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림자처럼 검은 눈동자에 푸르슴한 샛별 같은 생기가 맺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황녀의 심장이, 눈앞의 사람이 오라버니인 사실조차 잊고 두근두근 뛰었다.

“응석받이. 이 오라버니가 좋다니, 몸만 컸지 속은 여전히 어린 아이로구나.”

슬픔은 알아도 사랑을 모르는 왕자는 여동생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친애의 키스를 아스트리아의 왼쪽 뺨에 남겨버렸다.

불에 데인 듯하다.

지워지지 않을 사랑의 각인이 아스트리아의 가슴에 새겨졌다.

‘오라버니도…… 남자. 난 그를 사랑하고 있어. 오라버니를 가지고 싶어.’

아스트리아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오라버니.”

황녀는 황태자를 끌어안았다. 아니, 매달렸다. 흐릿해진 눈으로 오라버니의 입술에 키스를……

“아.”

쨍그랑!!!!

복도 바깥에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덜렁이 시녀 하나가 차를 내오다가 넘어졌나보군.”

황태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제, 제가 나가볼게요!”

이성이 돌아온 아스트리아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황급히 오라버니의 곁에서 떨어졌다.

‘오라버니는 나의 이상을 눈치 챘을까? 어떡해. 나는 몰라!’

이제 과거의 평범한 남매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적어도 아스트리아는.

황녀는 오라버니의 집무실을 벗어나, 복도로 빠져나왔다.

“이것은……”

아스트리아는 얼굴에 몰렸던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복도에는 부서진 쿠키 조각과, 깨진 접시와 찻잔, 그리고 푸른색 벨벳 부채가 떨어져 있었다.

그래.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항상 들고 다니던 그 벨벳 부채가 말이다.

***

봤다. 내가 봤다.

황태자와 황녀 아스트리아가 키스하려던 모습을.

이 위나 아르페지나가 보았단 말이다.

“후. 후후. 후후후후…….”

맹렬한 분노가 위나 아르페지나를 휘감아 왔다.

감히 자신에게서 황태자를 빼앗아가려는 맹랑한 계집, 황녀 아스트리아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아스트리아의 목을 조를 수 없는 양손이 허전함으로 욱씬거렸다.

그 년의 목 대신 부채라도 비틀어 버릴까 했는데.

아 참. 화가 너무 난 나머지, 쿠키 접시와 함께 바닥에 던져버렸지 뭐야.

“죽여버리겠어.”

아니. 죽음보다도 더한 상처를 주겠다.

위나 아르페지나에게는 황녀 아스트리아를 벌할 자격이 있었다.

넌지시, 간접적으로 그녀에게 경고했었다.

더 이상 황태자 앞에서 ‘여자’인 척 행동하지 말라고.

‘내가 왜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루진 오라버니에게 키스했겠어.’

황태자도 질색하고, 황녀 아스트리아도 기겁했다 들었다.

근친상간이란 거. 실제로 보면 역겹거든.

보고, 듣고, 느낀 바가 있다면 황태자 남매는 서로를 남녀로 보아선 결코 아니 되었다.

“하지만 황녀도, 황태자도. 나처럼 스릴을 사랑하나 보네. 금기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아무래도 벌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황태자에게선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그의 이상을 빼앗아 더럽혀 주리라.

황녀에게선 그녀가 은밀히 숨겨온 순수한 사랑을 빼앗아 짓밟아 주리라.

현실을 알려 주리라. 카이사리아의 권력은 이미 오래 전에 아르페지나 가문이 탈취하였고,

이름뿐인 카이사리아 황실은 아르페지나 가문의 양해를 받아 권력을 얻어 써야만 하는 처지란 것을.

“할아버님께서 좀더 욕심을 내어 황제가 되셨다면, 내가 황녀가 되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벌이는 모든 사건들은…… 정당한 권력 행사인 셈이지.”

황녀 아스트리아가 누리는 온갖 사치들은 본래 위나 아르페지나가 가졌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녀 아스트리아에게서 황태자를 되찾아 오기로 했다.

조금은 비겁한 방식으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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