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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4화 (4/31)

〈 4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4)

* * *

붉은색. 황태자는 그 따뜻한 색채를 좋아했다. 그의 마음이 서리가 내린 듯 차갑고 황량했기 때문에, 언제나 따뜻한 온기를 바라였다.

아르페지나와 게일포드. 카이사리아의 양대 가문에 황태자가 황태자비로 선택할 수 있는, 혼기 꽉 찬 여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

한 명의 오만하고 화려한 금발 미녀. 또 한 명의 붉은 색채의 여기사.

황태자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 율리아 게일포드를 약혼녀로 선택하였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깊이 숨겨둔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율리아 게일포드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서. 왠지 따뜻할 것 같아서 그녀를 약혼녀로 삼은 것이다.

그 외에 딱히 황태자가 율리아 게일포드를 위해 한 일은 없다.

굳이 약혼자된 입장 상, 사교회에서 첫춤을 신청하거나, 검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명검을 선물해준 정도?

‘사랑해요……. 당신을.’

율리아 게일포드가 사랑을 고백했다. 기사된 자존심을 접고, 황태자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 흘렸다.

황태자가 약혼녀였던 율리아를 위해 의무적으로 베푼 모든 것들이, 그녀에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황태자가 위나 아르페지나를 황태자비로 들였음에도, 갑작스런 파혼과 배신에도 그녀의 마음이 접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 불꽃처럼 격렬한 마음. 그것은 사랑인가?

황태자는 생각했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가 사랑이라면, 자신은 율리아 게일포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겠지.

황태자는 감정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보다 높은 이상과 무거운 의무만을 생각했다.

‘보잘 것 없는 개인의 감정과 비교해, 수만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국가란 그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황태자의 관심은 오로지 인간 그 자체에 가 있었을 뿐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했고,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의무와 책임으로만 채워 넣었다.

평화와 안정.

그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하늘의 여제께서 바라고 계십니다. 성전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교도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성지를 회복하소서.

그것이 황태자 전하의 의무이옵고, 책임이옵니다.”

두 번째 알현. 율리아 게일포드를 달래어 내보냈더니, 이번엔 성녀 에스텔이 성전을 일으켜야 한다 지랄이었다.

“대체 어디로?”

“여제의 계시입니다. 동쪽으로 군사를 몰아 진군하십시오.”

에스텔의 하늘색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아. 본디 에스텔은 저런 광신도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는데.

과거의 에스텔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녀님이었다. 치유의 손길로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고 구원했다.

그랬던 그녀가 변해버렸다. 신성력이 바닥나버린 탓에.

에스텔은 자신의 믿음이 얕고 모자랐기 때문에 하늘의 여제께서 자신의 기적을 거두어 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에스텔. 신성력은 인간의 생명력을 기반으로 해. 인간의 생명이 유한한 이상, 신성력도 유한해.

어린 나이에서부터 기적을 펼쳐왔으니, 바닥날 때도 되었지.

너의 헌신은 너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과 눈썹으로 증명 가능해.”

과거의 많은 성자와 성녀들 또한 갑작스럽게 신성력을 잃었다.

그들이 전부 타락해서 신성력을 잃었겠는가.

오랜 가뭄에 우물물이 마르듯, 그저 순리였을 따름이다.

“아닙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 실망하시어, 하늘의 여제께서 기적을 거두어 가신 겁니다!

우리 죄인들은 속죄하여야 합니다! 하늘의 여제 신앙을 더 멀리 퍼뜨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건 오로지 성전뿐입니다!”

에스텔은 미쳐가고 있었다. 들릴 리 없는 여신의 신탁을 들었다며, 성전을 주장했다.

카이사리아의 동쪽은 마물들이 횡횡하는 야만의 땅. 더구나 폐지.

점령해봐야 농사조차 못 짓는, 하등 쓸모없는 허허벌판뿐인데.

‘신성력은 잃었으나, 과거에 쌓아놓은 신망이 너무 두터워.

제국 내의 성도들이 에스텔의 저 미친 주장에 찬동하고, 부화뇌동한다.’

또 전쟁 명분이다. 황제 아슬란이 바라고 바라는.

저 미친 짓거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스텔을 암살?’

구심점인 에스텔을 죽여 없애면 성도들이 얌전해지진 않을까.

구역질난다.

암살 같은 치졸한 방법을 떠올린 황태자는 자괴감을 곱씹어야만 했다.

젊고 아리따웠던 청춘을 가장 낮고 더러운 곳에 임하여 보낸 에스텔이었다.

그 보상이 암살이라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좋아. 검토해볼게. 하지만 성전을 일으키기 위해선 의회를 설득하여야만 해.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겠어?”

“아아. 황태자 전하! 전하의 깊은 신심에 하늘의 여제께서도 축복을 내리실 것이옵니다!”

에스텔은 기뻐했다. 사랑 고백을 받은 처녀처럼, 뺨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속눈썹과는 다르게, 그녀의 피부는 이질적으로 투명했다.

아름답다. 맹목적인 믿음 외에 남지 않은 광신도가 되어버렸지만, 너는 아직 과거처럼 성스럽구나.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 에스텔의 신성력을 복구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미 황태자는 사람을 시켜 신성력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비록 전례는 없던 일이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위나, 율리아, 에스텔. 황태자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

꿈을 꾸었다.

가난한 시골에 마을 부모 잃은 삼남매가 있었다.

아버지는 전장에 끌려 가, 눈먼 화살에 맞아 죽었다.

어머니는 병에 걸렸다.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고는, 결국 유명을 달리하였다.

집에 어른들이 없었다. 가세가 기울었다.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사흘을 굶어 우는 동생들에게 미안해 큰아이가 산에 올라 풀을 캤다.

어떻게든 배라도 채우려고, 이름 모를 풀들을 물에 넣고 끓어 풀죽을 만들었다.

맛은 없었지만 잠시 동안이나마 배가 불렀다.

그날 밤 동생 둘이 죽었다.

산에서 캐온 그 풀들 중에 독초가 섞여 있었다.

홀로 남은 소년이 울었다.

그는 배앓이를 했고, 쓴물을 토했다.

몸에 힘이 빠진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고통, 괴로움. 또 고통.

살아서 고통받다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떠난다.

그것이 삶.

살아있다는 원죄.

왜 누군가는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하고, 병으로 고통 받아야 하며, 또 슬픔 속에서 죽어야 합니까?

대답해주십시오. 천상의 여제시여.

***

“크헉!”

황태자는 잠에서 깼다. 아직 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이 부들거리고 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부모를 잃은 슬픔. 무지하여 독초로 풀죽을 만들어 동생에게 먹인 죄책감.

그리고 죽음.

생노병사의 고통이 황태자에게 생생히 전해졌다.

그 이름 없이 죽어간 소년은 황태자 자신이었다. 황태자가 잠든 동안, 황태자는 소년이 되어 죽었다.

삶의 부조리가 나를 덮쳤다. 죽음이 나의 목을 졸랐다.

황태자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두려움에 떨었다.

“깼어? 또 악몽을 꾼 것 같던데.”

누군가 황태자에게 말을 걸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였다.

그녀는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황태자, 그가 잠든 사이, 몰래 어딘가 다녀왔던 것일까.

아니면, 밤새 내내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관찰하고 있었던 것일까.

모르겠다. 단지, 황태자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무칠 정도로 외로웠고, 당장 곁에 있는 여자가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뿐이라는 것.

“누나.”

그녀가 움찔했다. 뜻밖의 말이라는 듯.

어둠과 외로움에 익숙해진 황태자의 검은 눈동자가 위나 아르페지나에게 향하고 있었다.

“누나. 외로워. 안아줘.”

외롭고 쓸쓸하신 이 왕자님을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제야. 나를 봐주는구나. 황태자.”

기다렸다는 듯 황태자비는 옷을 벗었다. 황태자의 눈꺼풀에 키스하고 그의 품에 안겼다.

위나 아르페지나는…… 아름답지.

어머니와 똑같은 겨울의 미녀. 혀끝으로 맛보는 그녀의 향이 시리고, 차고, 부드러웠다.

“하악!”

황태자가 덮쳐누르자, 황태자비는 신음을 흘렸다.

그가 자신의 비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눈꽃처럼 황태자의 혀끝에서 녹아버렸다.

“거칠어♡ 이제 그만 애태우고, 넣어줘. 안아줄게.”

도도했던 겨울의 눈꽃이 녹아 암컷이 되었다. 황태자와 하나가 되고 싶다며 아양을 떨어댔다.

네가 바라는 대로.

황태자는 위나 아르페지나의 비부를 벌렸다. 고고한 설원에 홀로 우뚝 선 외로움을 꽂아 넣고, 따뜻한 온기를 바라였다.

“으음♡.”

너는 모른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을.

“하악♡.”

너는 모른다. 내가 느끼는 슬픔을.

“아아♡ 좋아♡ 좀더 아래. 깊숙이. 좀더♡ 좋아해. 사랑해, 황태자!”

나는 모른다. 사랑의 기쁨을.

그의 법률상의 아내는 좋다고 헐떡였지만, 황태자의 외로움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어찌하여 판이하게 다를 수 있는가.

흥이 식은 황태자는 점차점차 느려지다 정지해버렸다.

“왜 그래?”

가기 직전이었는데. 위나가 다리로 허리를 감아왔다. 황태자가 끝까지 해주길 바라였다.

“아무 것도.”

황태자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의무적으로 허리를 놀리다, 어느 순간 외로움의 끈을 놔버렸다.

위나의 갈라진 빈틈이 가득 찼고, 황태자는 잃은 만큼 허무해졌다.

“하아♡ 하아♡.”

그녀는 만족했을까. 잔여운에 몸을 떠는 황태자비를 두고, 황태자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기분이 착잡했다.

위나 아르페지나. 전대 아르페지나 공작 프리울드의 손녀딸. 현 아르페지나 공작 루진의 여동생.

본 약혼녀였던 율리아 게일포드와 파혼하고, 위나 아르페지나를 황태자비로 맞이한 것은 그녀의 정치 감각 때문이었다.

능수능수한 협잡꾼인 이 여자는 아르페지나 가문을 가지고 놀 줄 알았다.

가문의 여론을 홀로 좌지우지하며 자기 뜻대로 부렸다.

그녀만 협력적으로 나와 준다면, 국정을 좀더 원활히 돌릴 수 있을 텐데.

의회의 반발을 아르페지나 가문의 힘으로 무마해 줄 테니까.

“무슨 생각해?”

위나 아르페지나가 뒤에서 황태자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황태자는 솔직히 말했다.

“카이사리아의 미래.”

카이사리아 백성들을 위한 구휼 정책을 좀더 확충하고 싶다. 산과 들판에 널린 풀들을 식용 가능한 것과 독초인 것을 정리, 구분한 책을 펴내고 싶다.

그러나 이 모두가 돈. 지금 카이사리아 황실에는 돈이 없다.

“치이. 재미없어.”

위나 아르페지나가 투덜거렸다. 무드 없는 부부 관계에 실망했다. 좀더 황태자가 사랑을 속삭여주길 바랐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특별히 도와줄게.”

아르페지나 가문이 카이사리아 황실에 막대한 기부금을 건넬 것이다.

이유는 아무 거나 갖다 붙이면 될 일. 아르페지나가 움직이면, 다른 가문들도 눈치를 보며 소정의 기부금을 건네올 것이다.

“부디 뜻대로 마음껏 사용하세요. 우리 귀여운 왕자님.”

그 동안 냉랭했던 부부 관계가 회복된 기념이라고나 할까.

황태자가 자신만 똑바로 바라봐 준다면, 언제든 현모양처로 돌아올 준비를 황태자비는 하고 있었다.

“대신에……”

황실근위기사단장 율리아 게일포드를 해임하길 바란다. 또 현직 황궁시녀장인 테오도라 이세티아를 황궁에서 내보냈으면 좋겠다.

황녀 아스트리아를 이만 시집보내고, 매일 아침 황후궁에 들러 황후 소피아 아르첼에게 아침 인사 올리는 일도 이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욕심이 많아, 위나. 황태자비.”

빈자리를 아르페지나 가문원으로 채워 넣으려고? 얼마나 더 큰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야 네가 만족할까.

“불안하단 말이야.”

황태자비는 율리아 게일포드가 아직 황태자를 못잊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황태자 주위의 여자들을 전부 정리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새 기사단장은 아서 아르페지나가 좋을 것 같아. 멍청하지만 충직한 인물이야.

황궁시녀장은 은퇴한 에크모르 나나이젤을 복직시켜.

네 생각은 어때? 황태자.”

황태자는 미지근했지만,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뜨거웠다.

물과 불.

황태자는 올가미에 씌인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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