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발밑에 모든 권력을-3화 (3/31)

〈 3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3)

* * *

“오라버니도…… 남자…….”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남긴 말이 황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모후 소피아 아르첼의 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황녀 아스트리아였다.

단아하면서도 애처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황녀에게 수많은 사내들이 추파를 던졌다. 황녀를 욕망했다.

그러나 부황 폐하가 모후 전하께 해온 만행을 보고 듣고 자란 황녀에게 남자들의 관심은 버겁고 더러운 것이었다.

왜 그들은 여성의 갈라진 빈틈을 비집고 아프게 만들고 싶은 것일까.

어찌하여 더러운 체액을 여성의 체내에 배설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직 여자의 기쁨을 못 누려본 아스트리아로서는 자신을 욕망하는 사내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오라버니도 남자. 그렇다면 오라버니께서도 여자를 안고 싶은 소망을 은밀히 품고 계시는 걸까?’

오라버니가 다른 여자와 살을 겹친다. 거룩하고 맑은 나의 왕자님께서?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오라버니는 여타 추잡한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신 것이다.

그럼에도 상상해 본다.

오라버니, 황태자 전하께서 옷을 벗으신다. 그가 여자와 살을 겹친다.

황태자 밑에 깔려 허덕이는 계집은 바로 황녀 자신이다.

“웁!”

방금 소름끼치는 상상을 했다. 미친 악몽을 꾸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스트리아는 얌전히 오라버니를 받아들이는 망상을 하고 말았다.

남매 근친의 거부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대체 무슨 끔찍한 상상을……”

똑똑.

“드, 들어오세요.”

다행히 아스트리아의 악몽은 노크 소리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였다.

“하늘의 영광이 황녀 전하께 있기를.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황녀를 방문한 이는 루진 아르페지나였다.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두고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초유의 사태. 더구나 상대는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의 친오빠인 루진 아르페지나.

황녀 아스트리아는 황실을 모욕하는 행동은 이제 그만 두라고 황태자비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황태자비는 절제를 몰랐다.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법. 황태자비가 멈추지 않겠다면, 그 오라비인 루진 아르페지나를 설득하면 돼. 루진이 위나 아르페지나에게 무르기 때문에 추잡한 소문이 퍼지는 것이야.’

루진은 여동생 위나와는 달리 무척이나 선량한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루진은 황녀 아스트리아에게 큰 빚을 하나 지고 있었다.

아스트리아는 그 빚을 이제 갚으라며, 루진을 독촉하였다.

“루진. 당신은 제 약혼자였잖아요. 고작 여동생이랑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서 저와 파혼을 한 건가요?”

루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현 아르페지나 공작께서 전대 공작이신 할아버지와는 달리 심약하다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인 것인지, 혹은 나쁜 일인 것인지.

“그, 그 일은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테오도라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오도라는 이세티아 공작 가문의 영애. 테오도라를 사랑한 루진은 황녀 아스트리아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깨트리고 말았다.

아스트리아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아스트리아는 만족했다.

그녀는 루진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아르페지나 가문은 그 대신으로 위나 아르페지나와 황태자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그렇게나 아내를 사랑하신다는 분이 어떻게 여동생과 그런 짓을!”

“사실이 아닙니다, 황녀 전하!”

루진은 서둘러 변명했다.

“왜 제 여동생이…… 위나가 그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비 저하의 침실에 오라버니인 제가 드나들었다는 소문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위나가 일방적으로 저를 몰아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황태자궁의 복도에서 강제적으로 키스를 당했을 뿐, 그 이상의 선은 넘은 적 없습니다.”

“그 말. 맹세할 수 있으신가요?”

“드높은 하늘의 영광에 대고 맹세코. 아르페지나 가문의 명예를 걸 수도 있고, 테오도라를 향한 제 사랑 또한 걸 수 있습니다.”

“좋아요. 당신의 진심을 믿기로 하죠.”

위나 아르페지나와 달리 루진은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근친상간의 금기를 저지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교회에서 아르페지나 남매에 관한 소문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공언하겠어요.

남매끼리 흔히 주고받는 친애의 키스를 황궁의 시녀들이 보고 오해한 것이라고.”

“크나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피곤하군요. 그럼 이만 물러가세요.”

루진은 허리 굽혀 절을 하고는 물러났다. 이것으로 문제는 ‘절반’ 정도는 해결된 것이겠지?

루진은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만, 안하무인 황태자비는 결코 멈춰 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본래 위나 아르페지나 대신 황태자비가 되었어야 할 인물, 게일포드 영애 또한.

***

아르페지나와 게일포드. 이 두 가문을 카이사리아의 양대 기사 가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같은 기사 가문이라 할지라도, 가문의 기조는 전혀 달랐다

영광의 백기사 가문 아르페지나. 전대 아르페지나 공작 프리울드는 폭군 아슬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반란까지 일으켰다.

카이사리아의 미래를 위해서 주군인 황제에게 칼끝까지 겨눌 수 있는 가문.

그것이 아르페지나 가문이었다.

반면, 게일포드는 카이사리아 제일의 충신 가문. 미쳐 날뛰는 황제 아슬란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다.

아르페지나 가문이 반란을 일으켜 검은 사자 아슬란을 벼랑 끝까지 내몰 때조차, 게일포드 가문은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와의 의리를 지켰다.

‘아르페지나는 카이사리아의 검이고, 게일포드는 황가의 방패.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잃는 순간 나의 운명도, 의무도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야.’

황태자는 조용히 속으로 뇌까렸다.

카이사리아 최대의 권신 가문으로 올라선 아르페지나와는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황가의 열렬한 지지자인 게일포드 가문은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루진 아르페지나­황녀 아스트리아, 율리아 게일포드­황태자’ 라는 약혼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인데.

어느 철없는 도련님의 그깟 사랑 놀음 때문에 이 모든 구도가 무너지게 될 줄이야.

“위나 아르페지나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이는 황실 모독입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태자 전하.”

황태자의 눈앞에는 게일포드 영애 율리아가 서 있었다.

황태자비이면서 황태자를 배신한 위나 아르페지나를 폐해야 한다면서 열변을 토했다.

지끈지끈 머리가 울려왔다.

“헛소문일 따름이야. 루진 아르페지나가 직접 그 의혹을 부정하였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거짓말을 못하는 루진의 성품을 율리아 또한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율리아 게일포드는 흔들리지 않는 충심으로 유명한 아버지, 레온 게일포드 공작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셈이 빠르고 이해득실에 민감하다.

본래 자신이 가져야 할 황태자비 자리를 위나 아르페지나가 훔쳐갔다 여겨서는 독이 바싹 올라 있었다.

겉모습만은 붉은 머리카락의 당당한 여기사이건만, 속은 왜 이리 옹졸한 것인가.

“이만 물러나라. 일이 바쁘다.”

“허나……”

“이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율리아 게일포드. 또 다시 카이사리아를 전쟁의 불꽃 속으로 던져 넣을 생각인 것이냐?

이제야 겨우 아물기 시작한 카이사리아의 상처다.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이 그간 겪은 참화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무딘 생채기에 불과해.”

황제 아슬란이 아르페지나 가문에게 복수하길 원한다.

여기서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의 행실을 문제 삼아 그녀를 폐하려 한다면, 카이사리아는 다시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된다.

“카이사리아를 위한다면 입 다물고 침묵하라. 아바마마께…… 황제 아슬란에게 전쟁을 할 명분을 쥐어주어선 안 돼.”

아르페지나 가문의 반란. 구국공 프리울드와 검은 사자 아슬란이라고 하는, 두 명의 위대한 전략가가 맞붙은 내전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 카이사리아의 정예 기사 절반이 죽어나갔다.

그 내전의 여파를 섭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며 절절히 체험한 황태자였다.

위정자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카이사리아의 신민들이 죽어나가는 사태를 또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나만 참으면 되는 일이야.”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방금 황태자가 ‘자신만 참으면 되는 일’이라 하였다. 루진은 믿어도,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는 못 믿는다는 것이다.

황태자궁의 복도에서 대놓고 지 오라비와 키스하는 여자다.

황태자비의 음탕한 추파가 오빠에게만 향했겠는가. 황실의 기사, 시종, 관료, 음유시인 등등. 황태자비가 침실로 끌어들일 수 있는 남자들은 도처에 널리고 널렸다.

“부디 당신의 상처를 돌아보아 주십시오.”

“율리아…….”

율리아가 황태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왜 그녀는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사랑해요……. 당신을.”

그래. 율리아 게일포드는 황태자의 전 약혼녀였다.

루진과 황태자의 여동생 아스트리아가 파혼할 적, 황태자는 아르페지나와 게일포드 가문 사이에서 고민하다 아르페지나를 택했다.

황가의 개라고까지 불리는 게일포드 가문이었다. 황태자가 배신해도, 게일포드 가문이 그 충절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있었다.

황태자의 계산은 정확했다. 율리아는 충심을 아득히 넘어서는 애틋한 감정을 황태자에게 내비쳤다.

“미안하다.”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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