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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외전. 천 년 전의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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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융단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하얀 문. 하얀 문 주위로 튤립 꽂힌 화병과 말린 포인세티아를 엮어 만든 화환이 장식되어 있었다.
튤립의 주황빛 진한 향과 포인세티아만의 뜨거운 붉은 정열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는 손수 양여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누군가의 침실.
하얗게 한 서린 입김과 한 여인의 흐느낌으로 가득했다.
“찾으셨습니까? 어마마마.”
그는 침대 위에서 흐느끼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은실로 직조한 듯한 그녀의 머리카락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죄스럽게도, 수컷을 유혹하는 카나리아처럼 매혹적이었다.
가슴은 탐스럽게 익은 가을날의 과실 같았다.
허리는 장인이 빗어낸 도자기 같았다.
엉덩이와 다리의 라인이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탱그르르 부드러워 보였다.
아. 그녀는 나의 어머니이신데.
황태자는 죄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태자…….”
“네. 어마마마.”
“고개를 드세요.”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황태자에게 고개를 들라 명령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친아들의 마음마저 뒤흔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여 황태자는 검은 유혹에 자신이 꺾이지 않도록,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 똑바로 뜨지 못해?”
황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어머니의 명령이시다. 결국 황태자는 눈을 뜨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눈앞에 있었다.
튤립과 포인세티아가 그 색과 향을 부끄러워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무채색의 미녀. 달빛을 머금은 은방울꽃 소피아 아르첼.
헌데 이 아름다운 장식품에 금이 가 있었다.
엷고 투명한 분홍색 입술에 피딱지가 묻어 있었다.
그녀의 하얀 살결에는 곳곳에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에서는 비릿하고 탁한 정액이…… 검은 폭군 황제 아슬란의 정액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요, 태자?”
“…….”
황태자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황태자의 목이 돌아갔다. 철썩철썩. 뺨 맞는 소리가 침실 가득 퍼졌다.
황후 소피아 아르첼에게선, 천사 같은 미소가 더 없이 잘 어울릴 것 같은 미모와는 전혀 걸맞지 않은 표독스런 분노가 감돌았다.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황태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냈다.
황태자는 어머니의 분노를 묵묵히 감내하였다.
한참 뒤에야 황후 소피아 아르첼이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네. 어마마마.”
그는 착한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불합리한 분노를 묵묵히 감내한 그는 이내 어머니의 침실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아스트리아. 내 동생.”
“어쩌면 좋아! 어마마마도 참 너무 하세요!”
황후의 침실 바로 앞에서 황태자의 여동생, 황녀 아스트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황후의 내실을 방문한 다음날이면, 황후는 으레 황태자를 소환하곤 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황후가 황태자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것을 아는 황녀라서 오라버니를 걱정하며 문밖에서 기다렸다.
차마 용기가 모자라 오라버니와 같이 어마마마의 침실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황태자는 그런 여동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빠를 걱정해주는 황녀의 마음씨를 칭찬했고, 더 나아가 자신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 황후를 옹호하였다.
“가련한 분이시니까. 나만이라도 이해해드려야지.”
맑은 성품을 지닌 황태자였다. 황후가 내터트리는 불합리한 분노를 홀로 받아내고 있었다.
소피아 아르첼은 황제 아슬란이 실프러시아를 멸망시키면서 가져온 전리품.
황후라고는 하나, 그것은 황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황제가 어쩔 수 없이 던져준 은관일 뿐.
소피아 아르첼은 여전히 황제의 전리품이었다.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황제에게 사랑 없이 범해지는 성노예.
“어마마마의 손목에 난 상처를 본 적 있니? 그 깊고 짙은 상흔을.
진짜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분이셨어. 하지만 우리를 임신한 걸 아시고는 자살할 생각을 단념하셨지.
어마마마께서는 나와 너, 우리 남매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단다.”
“하지만요! 오라버니를 아프게 만드시잖아요!”
“마음에 화가 넘쳐흘러서 그래. 이해해드리렴.”
어머니의 폭언과 학대를 그저 참고 견디라는 뜻으로 들리진 않았을까.
황태자는 여동생의 오해를 걱정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용서해드리렴. 대신 이 오라버니가 어머니의 몫까지 사랑해 줄 테니까. 너는 내 하나뿐인 여동생이잖니?”
“네. 오라버니.”
황녀 아스트리아는 안타까워했다.
불쌍하신 우리 오라버니.
홀로 자신의 상처를 껴안고 있으면서도, 그것도 모자라 또 어머니와 여동생의 상처까지 포용하려 하고 있다.
‘그런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오라버니.’
황태자의 품에 안긴 채로 황녀는 조용히 홀로 읊조렸다.
***
한 음유시인은 아래와 같은 시 구절로 황태자의 성품을 칭송하였다.
기다리던 우리들의 왕자.
가련한 우리들을 사랑해준 왕자.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카이사리아. 지치고 힘든 신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이가 바로 폭군 아슬란의 적장자인 황태자였다.
황태자는 황실의 창고를 열어 가난한 빈민들을 구휼했다.
카이사리아 곳곳에 구휼원을 짓는다. 개간 안 된 토지를 개간한 자에게 면세 특권과 소유권을 준다.
악독한 귀족들이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한다.
황태자가 내정에 무심한 아버지 대신 섭정으로 치세를 이어간 기간이 약 12년.
황태자의 세심한 손길 아래서, 카이사리아는 과거의 활력을 되찾았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을 사랑한 왕자.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는 왕자.
하지만 모든 이가 여기 이 성스러운 황태자를 사랑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황태자비 위나 아르페지나가 그러하였다.
‘시시한 남자.’
너그럽고 다정다감한 황태자를 위나 아르페지나는 평가 절하하였다.
카이사리아 최대의 권신 가문인 아르페지나의 적녀였던 데다가, 오만방자하기로 유명했던 그녀였다.
정치적 거래로 인하여 황태자비가 되었을 뿐, 위나 아르페지나는 황태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태자가 아니라 자극과 짜릿함을 사랑했다.
“루진 오라버니!”
황태자궁의 복도에서 감히 황태자비는 오라버니인 루진 아르페지나에게 키스했다.
“무슨 짓이야, 위나!”
여동생인 위나 아르페지나와는 달리 루진 아르페지나는 상식인이었다.
그는 여동생의 유혹을 떨쳐냈다.
“제발 그만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황태자 전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괜한 걱정을 왜 하신답니까? 오라버니. 우리 아르페지나 가문의 권력이 황실을 압도하고 있는데.”
위나 아르페지나의 할아버지, 프리울드 공은 폭군 아슬란의 전횡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셨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 끝에 아르페지나 공작은 간신히 폭군 아슬란을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명예로운 프리울드 아르페지나는 황위를 탐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 아슬란을 폐하지 않았으며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제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구국공 프리울드는 길들여질 것 같지 않았던 검은 사자 아슬란에게 족쇄를 채우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황제조차 마음대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프리울드 아르페지나 공작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명예로운 기사라는 것이었다. 그는 명예롭게 전쟁이 사라진 카이사리아와, 성군의 자질을 내비치는 황태자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고는, 만족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프리울드는 설마 아르페지나 가의 권력을 등에 업은 손녀가 전횡을 일삼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손녀가 겨우 회복 되어가는 카이사리아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을 줄은 몰랐으리라.
위나 아르페지나의 황실 모독은 도를 넘었다.
할아버지의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루진은 여동생을 나무랐다.
“위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셔. 폭군 아슬란과는 달라. 그 분께서 이 카이사리아를 보다 행복한 나라로 만드실 거야.”
그러나 황태자비는 비웃음으로 응답했다.
“그러니까 시시한 남자라고요, 황태자는. 그는 카이사리아의 안정과 평화만을 바라고 있어요.
자기 권리 하나 못 챙기는 나약한 남자는 질색이에요.”
위나는 오라버니의 목에 팔을 걸어 매달렸다. 루진은 여동생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우유부단하며 시시한 남자인 것은 그나 황태자나 똑같았다. 그러나 위나에게 루진은 사랑받고, 황태자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쪽이 더 짜릿하잖아요? 루진 오라버니.”
황태자를 남편으로 두고서 바람을 핀다. 그것도 자기 친 오라버니와.
그 스릴을 사랑한다고 위나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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