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D-day♥
“……뭔가 휑하네.”
난생 처음 와보는 장소다.
진짜 영화처럼 한없이 넓은 크루즈 야외 라운지.
진짜 영화처럼 멀미날 것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
진짜 영화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칵테일을 서빙하는 직원들.
헌데 영화처럼 두근거리진 않는다.
파격적인 수영복 복장이나 대부분 동성에다가 죄다 아는 얼굴이다.
아무리 예쁘게 꾸며봤자 그걸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흥미가 식기 마련인가보다.
모처럼 준비한 크루즈를 통째로 빌리는 파격적인 여행인데 전혀 들뜨지 않는다.
“응? 좋지 않니?”
크루즈의 강한 뙤약볕 아래, 나란히 앉은 썬베드 옆좌석에는 엄마가 앉아있다.
파라솔 그늘 아래에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잔뜩 신난 아이처럼 양손에 글라스 잔을 쥐고 홀짝인다.
“…와야 할 중요한 사람이 빠졌잖아, 엄마.
반대로 엄마는 왜 그렇게 신났는데?”
“하지만 엄마는 이런 곳 처음이니까…
아! 한 잔 더 주시겠어요?”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직원이 보이자 엄마는 체리가 올라간 칵테일 잔으로 리필한다.
불그스름한 얼굴로 실실 웃으면서 홀짝거린다.
하기야 엄마는 이런 호사는 못 누려봤으니 모든 풍요가 신비롭게 느껴질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봐도 딸보다 순진한 엄마 같다.
한편 비슷한 나이의 다른 아줌마는,
“너무 조바심내지 않는 편이 좋아.”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성.
내 옆에, 의도적으로 한 칸 떨어져 앉은 연수 아줌마가 있다.
파격적인 노출의상에 이런 여가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이 평온하게 즐긴다.
밑에는 배가 나와있는데 말이다!
그것도 감출 수 없는 커다란 배가!
……안타깝게 똥배는 아니지만.
“저… 딱히 댁과 말 걸고 싶지 않지만, 아줌마는 뭐가 그렇게 태평해요?”
내 질문에 슥, 선글라스를 내리는 아줌마.
쌍꺼풀 집힌 눈빛으로 게슴츠레 바라본다.
탱탱한 피부.
타고 났는지, 아니면 갈고 갈았는지 나보다 넓은 골반과 허벅지.
솔직히 나이와 아랫동아리 배를 빼면 전혀 아줌마 같지는 않긴 하다.
“내 말은, 너희 엄마처럼 현재를 즐기는 편이 좋다는 뜻이란다.”
“……지금 오빠와 선화 언니는 둘이서 신혼 분위기로 알콩달콩 노닥거리고 있을 텐데요?
둘이 비행기 타고 슝~ 날라서 우리는 이렇게 붕- 떠버렸는데도 참으라구요?”
“그렇다고 변할 건 없잖니.
고집쟁이 공주님도 신혼을 즐기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싫다는 거예요! 선화 언니는 욕심만 많아선…!
다 같이 여행가자고 합의해놓곤.”
“조바심 내봤자 너만 손해지.”
콧방귀 뀌면서 받아치곤,
“그래도 계속 애처럼 불평불만을 할 거면 조금 떨어져서 해줘.”
“예?!”
난데없는 날 선 디스.
황당해서 감탄사를 내지르자, 아줌마는 한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램프의 지니를 소환하듯이 아주 사랑스럽고 정성스레 문지른다.
“태교 중인데 그렇게 떠들면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갈지도 모르잖아?
사랑에 빠진 여중생 같은 불만은 다른 곳에 가서 해줘♡”
선글라스를 도로 올리고 후훗 웃는 아줌마.
켁! 재수 없어.
배가 나올수록 점점 더 아닌 척, 자부심을 내비친다.
어차피 승자는 나라는 듯이 배를 쓰다듬는 꼴이 여간 눈 꼴 시리다.
“칫!”
나도 함께 있기 싫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환기시킬 겸,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에 들어서니 다른 그룹과 조우한다.
실내지만 비키니 차림인 핑크머리 유나 언니와 미나 언니, 미역머리 언니에 한정아 매니저님까지 끼어있었다.
북적북적 뭉쳐서 이 배의 선장으로 추정되는 외국인과 뭔가를 조율하고 있었다.
“? 다들 뭐하는 중이에요?”
“아, 신사랑님. 지금 기존 항로를 변경하려고 교섭중입니다.”
눈길조차 안 주고 기계적으로 답하는 매니저님.
꺼낸 핸드폰과 함께 선장과의 대화에 집중한다.
쏼라쏼라 현지영어를 꽤 능숙하게 하는지 몰라서 놀랐다.
“항로가 왜요? 무슨 문제 있데요?”
“음… 아뇨. 다름 아니라 기존의 계획을 틀어서 선우님이 있을 방향으로 조타를 돌리려는 거죠.”
“? 오빠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내 질문에 옆태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는 매니저님.
“부끄럽지만…”이라는 운을 띄우고, 손에 쥔 핸드폰을 내게 내민다.
거기엔 영어로 찍힌 지명… 아니, 다시 보니 영어가 아니다.
한국어 번역으로 아테네라고 적혀있다.
“사실 비상시에 무슨 일이 닥칠까 사장님의 핸드폰에 추적 장치를 붙여뒀습니다.
사장님과 선화님은 우리들 시선을 피해서 그리스로 숨은 모양이군요.”
“저, 정말요?!
……가만. 오빠도 이거 알아요? 앱으로 추적당한다는 걸 알면 저쪽도 눈치 채잖아요.”
매니저님은 나긋나긋한 미소로 안경을 치켜 올린다.
“걱정 없습니다. 추적기를 내장시켜놨거든요.
낮잠 주무실 때 커버 뜯어내고 다시 깔끔하게 붙여두느라 좀 고생했죠.”
“……안에 심었다구요?”
“네!”
범죄행위를 상큼한 미소로 답하는 매니저님.
…의외로 무서운 사람이었네.
하지만 나의 감상과는 별개로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진다.
“역시 언니 최고!”
“좋아, 만나면 선화 그 년은 내다버리고 선우만 태우자!”
“……각오해 금발머리년.”
그렇게 <분노의 추적자> 혈맹이 결성된다.
…분명 선빵은 선화 언니가 쳤지만 이래도 될지 모르겠다.
말릴까 생각해봤으나, 나는 그냥 나만의 처세술을 쓰기로 한다.
‘모른 척하다가 그때 와서 착한척하면 오빠한테 점수 따겠지.’
오빠의 첩실연합.
적일 땐 성가시지만 아군이 되면 꽤나 든든한 집단이다.
***
“하아… 비행기에서 야한 짓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야, 야. 왜 들어오자마자 붙고 지랄이야.”
호텔에 체크인하자마자 선화 등 뒤에 붙었다.
찰거머리처럼 붙어 코를 킁킁거리며 살결을 느낀다.
목덜미에 입을 처박고 꼬옥 끌어안는다.
“어쩔 수 없잖아. 좁은 비행기에 있는 내내 이게 그리웠다고.
정말이지… 왜 일반좌석을 선택한 거야. 비즈니스랑 퍼스트 클래스는 어디 갔어?”
“도망치는 중에 그럴 여유가 있을 거 같아?
빈자리라도 감지덕지해. 앱으로 택시에서 간신히 예약한 거라고.”
“애초에 도망치지 않으면 될 것을…”
“……왜? 계집애들 많은데 나랑만 있으니 꼽냐?”
고생을 사서 한다는 뉘앙스로 중얼거리자,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돌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여왕님.
어째 목소리에 약간 서운함이 묻어난다.
현재 단둘이 있는 자신을 강조하며 내 눈치를 본다.
결혼식 돌발행동에 나름 켕기는 점이 있는지 평소다운 자신감이 없다.
“참나.”
쪽♥ 쪽♥ 쪽♥
“야, 야…♥”
틱틱대면서도 속은 너무나 순진무구한 여왕님.
나름대로 여린 면이 있는 이 여왕님에 대해서 완전히 알게 되니 너무나 사랑스럽다.
툭 튀어나온 볼때기가 뽀뽀를 부른다.
“선화랑 단둘이 있는데 세상 뭐가 더 부럽겠어.”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이렇게 애정공세 하는데 말뿐만 아니라는 걸, 또 보여줘야하나?”
“……♥”
말 맺음과 동시에 절로 감겨오는 두 남녀의 혀와 입술.
“쪽♥ 쪽♥ 쭈웁… 쪼옥♥”
이제부터 서약까지 한 진정한 부부가 된 두 사람.
더는 서로 없이 못 살 것처럼 진득하게 얽힌다.
슥슥♥
이 기회를 틈타 스멀스멀 뒤에서부터 음흉한 마수를 뻗는다.
“……잠깐.”
헌데 내 애무에 선화는 잠깐 브레이크를 걸었다.
원피스 속에 감춰진 보댕이에 손을 올리자, 그 손 위를 포갰다.
힘줄이 새겨지는 손에는 축축한 땀이 느껴진다.
“왜?”
“아니…… 해도 문제는 없는데, 오늘부턴 조금 살살해줘.”
“왜? 갑자기 긴장했어?”
“그, 그게 아니라……”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말이 잘 안 나오는 것처럼 시간을 끈다.
우물쭈물 입술을 말았다가 내빼기를 반복하다 위를 바라본다.
가슴이 벅차서 도무지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지 눈을 마주쳐 대신한다.
상기된 뺨에 약간은 떨리는 눈빛.
그러면서 더 굳세게 나를 잡는 가느다란 손.
미세하게 떨리면서도 내게 의지하는 백금발 머리.
신기하게도 그것만으로 전해졌다.
“설마?!”
벼락처럼 스쳐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선화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감히 추측할 수 있었다.
“……응.”
내 감탄사에 곧장 인정하는 선화.
“엄마아빠 데려다 준 후, 몸이 영 이상해서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 그랬더라….”
“─!!!”
혈류가 팽 도는 순간이다.
사실 남자로서, 수컷으로서 가장 흥분하는 순간이 이때가 아닐까 한다.
손이 근질거린다.
연수 때처럼 들고 헹가래라도 쳐야하나 떨린다.
안절부절하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앞선다.
꼬옥♥
“♥”
허나 꾹 눌러서 참는다.
이 근질거리도록 넘치는 에너지를 그저 선화를 꼭 안아주는 것에만 매진했다.
당장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은 이 존재를 가득 품어준다.
이윽고 얼굴을 향긋한 정수리에 파묻고, 다소 진정될 때 속삭인다.
나지막이 아내와 단둘이 무드를 잡는다.
감히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달달함이 맴돈다.
“선화야.”
“응.”
“평생 행복하게 살자.”
“……응♥”
품속에서 배시시 웃는 귀여운 여왕님.
그렇게, 귀여운 부인을 신혼여행에서 종일 독점했다.
이건 내 인생의 최고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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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의 연속이다.
낯선 이국땅에서 함께 공연을 보고, 유명한 공원에서 로맨틱하게 산책을 했다.
그렇게 온종일 즐기다 함께 벌거벗은 침대에서 문득 떠올린다.
“아참!”
줄곧 까먹고 있던 그것.
“우리 수하물은 어떡하지?”
잔뜩 호들갑을 떨었으나, 선화는 누워서 덤덤하게 대꾸한다.
“그거? 여기까지 3일이나 걸린다기에 그냥 한국으로 도로 보내라고 했어.”
“옷은 어떡하고?
일주일동안 같은 옷만 입을 순 없는데….”
“카드 있으니까 그냥 현지조달로 사면되잖아.
다른 급한 문제라도 있어?”
“아니……”
옆머리를 북북 긁다가,
“사실 공항에서 급하게 옷 갈아입느라 가방에 핸드폰까지 뒀거든.”
아쉽게 입맛을 다신다.
핸드폰과 함께 멀리 떠나간 우리들의 짐가방.
더구나 핸드폰에는 세상에 둘도 없을 귀중한 해킹툴이 깔려있다.
하지만 따져보니 사실 그것보단 거래처의 연락이 걱정된다.
떠올려보니 이제 해킹툴에 의지하던 시절은 지나간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잖아.
급하게 오느라 우리들도 정신 없었으니까.”
“……그렇지.”
씁쓸하게 맞장구친다.
따져보니 딱히 급할 것도 없고, 신혼무드가 깨질 수 없으니 오히려 좋을 수 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린다.
“그래도 미국 가는 짐이 그리스까지 갈 게 뭐람.”
우리들 실수로 휴대폰과 함께 떠나버린 화물.
하지만 이 사소한 실수 때문에 차마 웃지 못할 추억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귀국했을 때 왠지 내 핸드폰을 손에 넣은 그녀들의 표정과 사연을 듣고 그야말로 폭소했다.
이런 식이었다.
가을 낙엽 위에 낙엽이 포개지듯 추억에 추억이 덧씌워지며,
6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