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6 D-day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하늘을 비추던 카메라 앵글을 쭉 내려 까무스름한 점을 콕 찍으면 그곳에 내가 서있다.
머리만큼이나 검은 턱시도와 리본형 타이를 단 채로 멍하니 있다.
딱히 연초도 안 태우면서 흡연소에서 한숨이나 쉰다.
“후우…”
찾아와준 하객들에게 허리를 굽히고 잠깐 쉬는 호텔 앞.
곧 있을 신랑입장을 앞두고 잠깐 나와서 바깥 공기를 마신다.
“거참 기분이 묘하네.”
결혼은 그냥 누구나 한번쯤 거쳐 가는 이벤트라 생각했지만 막상 당일로 닥치니 은근히 떨린다.
여태껏 나름 미친 짓거리는 골라서 해왔는데 이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이 떨림이 나의 간을 조리게 만든다.
“여, 여기 있었네요…!
신랑분, 곧 시작하니 어서 대기실로 들어오실게요!”
“아, 넵.”
다급하게 회전문을 뛰쳐나온 호텔의 여성 스태프가 부르자 뒷머리 박박 긁는다.
초조하게 보일까 최대한 여유롭게 계단 한 칸 씩 밟으며 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여유로운 흐리멍텅한 표정을 내세워도 손끝은 여전히 떨린다.
정말로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
찾아온 대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의 입이 고층빌딩처럼 떡 벌어졌다.
연락이 두절되다시피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청첩장을 보낸다 싶더니 외견이 많이 바뀌었다고 턱을 뺐다.
허나 바뀐 점은 외견뿐만이 아니다.
아무래도 가장 놀란 이유는 이번 결혼식 규모 때문일 거다.
선화가 경고했듯이 억! 소리나는 결혼식.
높디높은 천장에 북적거리는 인파, 여기에 케이블채널 3칸만 돌리면 바로 나올 법한 유명인마저 초청했다.
한바탕 벌리는 일이 얼마나 좋았는지 일반적 결혼식과는 스케일이 확연히 달랐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냐?
─그래서 도대체 얼마 벌었는데?
─신부 슬쩍 보고 왔는데 완전 미쳤던데? 연예인 아니야? 뭐하는 사람이야? 웬만한 모델들 다 후려갈기겠더라.
─너… 혹시 신부쪽 하객들이랑 잘 아는 사이냐?
때문에 출입문 입구부터 질문러시가 시작됐지만 일일이 설명하긴 귀찮아서 “코인 대박쳤어.”, “로또 터졌어.”, “사실 결혼 상대가 중동 석유 재벌 딸이야.” 같은 갖은 구라와 장난으로 넘겼다.
열 받게 말을 빙빙 돌리니 애들이 적당히 웃어넘기더라도 묘하게 태도는 서글서글했다.
아무래도 신부 하객석에 앉은 미인들과 때깔 나는 양복에 혹여나 잔칫날에 챙겨갈 콩고물이 있을까 더 친한 척하는 느낌이 강했다.
“미안. 나머진 다음에 알려줄게.”
허나 나는 그런 곳에 포커스를 맞춰줄 여유가 되지 못했다.
곧 내게 들이닥칠 미래에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자자, 양측 준비가 완료됐다니 수다는 이쯤하죠.
그럼 고전대로 갈까요? 신랑, 입장!』
그래, 지금 이 순간 말이다.
어떤 드라마 OST로 추측되는 행진곡에 맞춰 입장한다.
턱을 바짝 조이고, 오직 정면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먼저 와서 연습할 때는 정말 설렁설렁 잘만 걸었는데, 지금은 각목보다 뻣뻣하다.
각진 기계팔과 기계발목을 거칠게 스윙하며 뚜벅뚜벅 전진한다.
허나 이 긴장감은 많은 하객들 앞이라는 무대 공포증 탓이 아니다.
곧장 이어질 다음 턴 때문이다.
『음… 오늘 신랑 쪽은 풋풋한 새신랑 느낌이 강하네요.
하기야 익숙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겠죠?』
사회자 멘트에 조명 꺼진 하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퍼진 뒤,
『그럼 신부 쪽은 어떨까요? 신부, 입장!』
이번에는 고전식이었다.
지구인이라면 알법한 익숙한 딴딴다단 리듬에 맞춰 두 사람이 입장한다.
배웅을 하는 장인과, 그 옆에 내 신부가.
─와...
─세상에...
─얼마를 들인 거야?
─플레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있어...
─드레스가 엄청 기네
─아 답답해. 얼굴이 좀 보였으면 좋겠는데
두근두근
주변의 웅성거림보단 튀어나올 심장고동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분명 저 멀리서 다가오는데 전혀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뿐사뿐 높은 단상 위로 카펫을 밟고 올라와도 나만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다.
“음, 자네.”
“아, 넵!”
그러다 정신이 지구로 돌아온 순간은 장인이 큰 손으로 내 어깨를 잡을 때였다.
장인은 키가 나보다 조금 작을 뿐, 등빨이 있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내 어깨를 툭 건들자 비로소 코앞에 있다는 걸 인지한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미소가 퍼진다.
“볼 때마다 듬직하군. 딸을 앞으로 잘 부탁하네.”
“……네!”
평소라면 대충 늘어진 대답을 했겠으나 오늘따라 성실하게 대답한다.
고개까지 연신 흔들며 열혈청년이 된다.
장인이 만족스러운 미소 짓고 자리로 돌아가자, 스포트라이트 아래에는 단 둘 뿐이었다.
나와, 하얀 면사포 속에 얼굴을 감춘 선화였다.
…….
나는 가만히 서있는 신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잘 보이지 않는 면사포 커튼 속에 감춘 얼굴을 관찰하다, 순서에도 없는 짓을 저질러 면사포 전면을 커튼처럼 넘겨버린다.
이유는 잘은 모르지만 저질러보고 싶은 일이다.
그리고 결과는,
“……푸훗!”
열자마자 조소한다.
시원하게 웃으면서 평소다운 얼굴로 돌아온다.
“왜 빠게.”
“오늘처럼 좋은 날에 표정이 왜 그렇게 뚱해?”
여전히 아름다운 백금발.
레이스 속의 고운 피부는 선녀의 날개옷보다 윤기가 흐른다.
허나 이 아름다움을 담는 얼굴에는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도톰한 입술이 있다.
여자들이 손수건 물어뜯으며 부러워할 엄청난 스케일의 결혼식 주인공이면서 몹시 불만족스러워 안면을 찡그리고 있다.
“……너라면 좋겠냐?”
“이번에는 어떤 불만인데.”
“저거. 니 눈에는 안 보여?”
가벼운 턱짓에 무슨 의미인지 대강 알아먹는다.
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선화의 컴플레인을 파헤치기 위해선 어떤 한 테이블을 주목하면 된다.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게 눈이 가는 테이블, 몹시 소란스러우며 남자들 이목을 빨아 당기는 테이블.
“오빠! 오빠! 유나 여기 있어요!”
“오빠! 사랑이 이쪽이에요! 이쪽 보세요!”
“자기, 긴장하지 마~”
“대단하네요, 이런 결혼식. 아예 저는 못해봤는데……”
“사장님, 출항시간은 넉넉하니 차분하게 즐기십시오.”
“주인님! 후딱 해치우고 어서 같이 밥이나 먹어요!”
“……선우랑 놀러가게 빨리 끝내줘.”
각양각색의 미인들이 그곳에 모여있다.
결혼에 참석한 다른 귀여운 연인들이 그곳에 있다.
신부 하객석에 있으면서, 내게 야유 섞인 러브콜을 보낸다.
아무래도 주변에선 서로 아는 지인이고, 신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음… 요란스럽긴 하네.”
차마 손은 못 흔들어주겠고, 쓴웃음 지으며 무마한다.
그리고 다시 불만 가득한 신부에게 눈을 옮겨간다.
예쁘게 집힌 긴 속눈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들었지?
저것들, 밥 먹고 신혼여행까지 따라올 작정이라고… 멋대로 여행코스까지 정해둬선…!”
“어쩔 수 없었잖아?
나는 나름 변호했는데 안 통했고. 연수도 이번만큼은 꽤 완고하더라고.”
“그래, 이 사단이 난 건 전부 바람둥이랑 결혼하고 이것저것 약점을 잡혀버린 내 탓이겠지? 앙?!”
“음, 그런 의미는 아니고.”
분명 화를 내는데 이젠 전혀 무섭지 않다.
더는 내 눈에는 여왕이 아니라, 그냥 귀여운 공주님 같아서 뺨을 쓰다듬어준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그냥 즐기자는 거지.”
“흥, 퍽이나.”
화가 났지만 찡그린 인상 외에는 어째 평온하다.
본인 결혼식이라 성질을 죽이는 건지, 슬슬 단념한 건지 모르겠다.
신부를 달래주기 위해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
그리고 보니 어느새 내 떨림은 멈췄다.
선화와 평소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미세한 진동이 멈춰있다.
아마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인지 못한 새로운 스텝에 대한 두려움.
좋든 아니든 이 나이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할 나름의 무게감.
하지만 전부 기우였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엄청 달라지진 않는다.
만약 아이가 태어나고, 또 내가 멍청한 사고 쳐서 선화한테 등짝 맞더라도, 이 평소 같은 일상은 이어질 거다.
함께 사는 북적북적한 집안에서 소란이 일어나도 결국에는 넘어갈 거다.
저기 밑에 테이블에 보이는 모두와 함께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할 일이 생각났다.
“선화야.”
“응?”
“키스해도 되지?”
“뭐?!
……야, 그딴 건 주례 다 보고─ 읍!?!”
질문은 무의미했다.
입을 벌리는 타이밍에 맞춰서 일방적으로 입술을 포갰다.
“““오오오오오…!”””
『이야… 긴장하던 새신랑은 어디가고, 벌써부터 뜨거운데요?』
길고 딥한, 진득한 키스.
허나 침대에서 즐기는 추잡한 느낌보단 깔끔하게 진행한다.
턱을 틀어서 혀를 넣고 깔끔하게 입술만 취한다.
새신부의 가는 허리를 받치고, 늠름하게 에스코트해서 하나로 포갠다.
“으응…♥”
선화는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내게 적응해 본인도 될 대로 되라인지 눈꺼풀을 지그시 감았다.
드레스에 감춰진 힐에 발끝을 살짝 들어서 로맨틱한 높낮이를 맞췄다.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행복을 과시한다.
“……여기까지만 봐준다.”
어째 객석에서 소원이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으나 멈추지 않았다.
끈적하게 이어진 우리 둘은, 지금만큼은 누구라도 떼어낼 수 없다.
아내와 남편으로서 맺어지는 이 순간만큼은.
“저… 시간 따로 드릴 테니, 순서 좀 지켜주시겠어요?”
“♥”
“♥”
“……으흠! 나도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정면에서 직관하다가 민망한지 헛기침하는 연로한 주례 선생님.
이후, 키스가 지나치게 오래 이어져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다시 신랑입장부터 진행하게 됐다.
이번에는 훨씬 능숙하고 부드러워진 흐름으로 늠름하게 식장에 들어섰다.
***
화려한 식이 끝났으나 사실 결혼식 진행은 딱히 드라마틱하지 않다.
본격적으로 식을 올리면 포토타임과 식사시간이 준비돼 있다.
이 시간에 신랑신부는 여기저기 감사인사를 전하느라 엉덩이 붙일 틈이 없다.
본래라면 그랬다.
“그럼 아빠, 뒤는 부탁할게.”
장인과 함께 있는 도중에 선화가 뜬금없이 한마디 보탠다.
장모님이 화장실 문제로 자리를 비운 타이밍인데, 의미심장하게 툭 던진다.
“어?
…어어! 그래, 잘 다녀오려무나.”
“예? 다녀와요? 어딜? 화장실 가게?”
장인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캐치한 모양이고, 나는 뜬금 나온 주제에 물음표 연속 네 개를 남발했으나 선화는 그저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가자!”
달린다.
부우욱!
탈부착 가능한 웨딩드레스의 긴 자락을 과감하게 떼어내고, 스커트처럼 짧아진 치마를 휘날리며 달린다.
스커트 팔랑거리도록 냅다 달린다.
“이제 승선시간이 오니 다들 천천히 준비─ 어?”
“응?”
“? 뭐야?”
그렇게 한정아, 연수, 사랑이가 모여 있던 테이블을 스쳐지나간다.
마치 도망치듯 그들을 피해서 달아난다.
맥락 없이 선화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와중.
시선을 내리니 하이힐이 운동화로 바뀐 상태다.
용의주도하게 이미 뭔가를 준비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도대체 어디 가는 거야?”
“어디 가긴 신혼여행이지!”
“자, 잠깐.
우리 신혼여행은 함께 크루즈 여행이었던─”
“미쳤냐?!한번 뿐인 신혼여행을 내가 곱게 걔들이랑 보낼 것 같아?! 절대 그렇겐 못해!”
“……이럴 작정이었던 거야?”
“당연하지!
정문에 무지개택시 대기시켜 놨으니까 입 닫고, 달려!”
하하하… 따라가며 헛웃음을 보내는 사이, 뒤에서 웅성웅성 목소리가 들린다.
대부분 우리 둘의 돌발행동에 놀란 하객들의 웅성거림이나, 그 중에 너무나 친근한 측근이 끼어 있다.
“어, 어디 가세요?! 아직 시간은─”
“지금 보면 몰라요?! 도망치는 거예요! 야, 선화년 도망친다! 잡아!”
“……선 넘네.”
고함치면서 따라오는 그들이 들린다.
호텔 출구를 향해 달리는 우리를, 우당탕탕 추격대가 따라붙은 것이 느껴진다.
…이를 어쩐다?
재밌는 깜짝 이벤트에 웃음이 나오지만 달리면서 고민한다.
선화가 운동화까지 신으면서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약속대로라면 크루즈 여행을 택해야한다.
더구나 선화는 본래 집순이라 체력적으로 버거워 보인다.
도의적으론 모두와 크루즈여행을 함께 가는 것이 맞으나 본래 결혼식은 신부를 위한 날이니……
여기까지 도달하니 답은 나온다.
“자, 도망치려면 이래야지!”
“와앗?!”
달리던 선화를 안아들었다.
스커트 밑이 안 보이도록 보쌈해서 그대로 입구의 회전문까지 달려서 나간다.
“기다려요, 오빠! 유나 두고 어디가요!?”
“기다리세요 사장님!”
“……기다려!”
“음… 나는 배가 나와서 움직이기가 싫네.
포기하자♥”
“멋대로 뭘 포기해요 아줌마! 얼른 달려요!”
그렇게 멀어진다.
우리 둘은 추격대를 뿌리치고 택시를 탔다.
+++
“나 왔어요.
…응? 그런데 애들은?”
“어어, 도망쳤어.”
“? 도망을 쳐요?
어디로? 왜요?”
“신혼여행 간다네.”
“……? 신혼여행을 지금…?
뭐가 급해서 좀 쉬엄쉬엄 가지.”
아쉽다는 듯이 한숨 쉬는 장모.
이어서 드는 질문,
“그런데 누가 쫓아온다고 도망까지 친데요?”
“모르지.
살짝 귀띔할 땐, 그냥 해보고 싶었다고 하던데.
왜, 옛날에 많이 했잖아. 도망치듯 신혼여행 떠나는 젊은 사람들”
“……왜 그런 게 하고 싶다는 거죠?
내 딸이지만 어릴 때부터 속내를 알 수가 없네요.”
“애들이 그렇지 뭐.
보기에는 사위한테 아주 푹 빠진 것 같더라고. 허허허.”
장인은 접시에 음식을 덜며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으나, 자기 딸이 정말 도망쳐서 신혼여행갔다는 건 평생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