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대체 이게 뭐하는 건데?!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요약하자면, 가장 먼저 선우와 단둘이 집을 나서는 사람이 승자다?”
물음에 긍정하는 가벼운 끄덕임.
“……그래.”
“하. 무슨 말을 하냐 했더니… 겨우 그 정도 내기야?
너무 싱거운 걸.”
“……대신 선행조건이 있어.
술을 잔뜩 먹여서 취하게 만들어야 해.”
“응? 술?”
“……그래야 선우의 본심이 나오니까…♥”
사뭇 기대되는지 헤실헤실 웃는 미역줄기 언니.
선우 오빠의 가십이 메인디시로 올라오자 시종일관 웃는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떨 때, 구석에 홀로 술 홀짝이는 이끼같던 우울한 낯빛이 해맑게 바뀐다.
더구나 이중에서 당연히 자신이 선택될 거라는 묘한 자신감이 있다.
밝아진 이 모습이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오빠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게 아닌가 싶다.
‘뭐, 다들 기본적으로 목매달고 있으니….’
아무튼 방실방실 웃는 신난 미역 언니는 상상만으로 엔돌핀이 솟는지 도발까지 더한다.
“……당연히 내가 선택되겠지만 다들 발 빼진 않겠지?”
“뭐래. 이런 내기는 당연히─”
“당연히 나지!
내가 얼마나 주인님과 오래 알고 지냈는데! 아예 보쌈해서 들고 나가주실걸?”
“뿌뿌-!
틀렸어요 언니. 당연히 저죠! 오빠에 대해선 일일이 꿰뚫고 있다구요!”
가당찮아서 나도 참전하고 만다.
여태껏 오빠 뜻대로 많이 넘어가줬지만 사실 오빠의 행동은 살짝씩 조정하고 있다.
아마 오빤 좋아하는 가슴 내밀고 살랑살랑 흔들며 뒷걸음만 쳐도 넋이 나갈 거다.
실제로 그래왔으니까.
“……다들 자신만만이네.”
나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자신감을 내비치자, 미역 언니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된다는 듯 뿌듯하게 머리를 주억거린다.
때는 이때다 싶은지 보조개 꾹 넣고 입꼬리를 올린다.
“……그럼 이 내기에 특별한 상품을 걸어도 되겠지?”
“뭘 걸 건데?”
“……선우랑 결혼식 올릴 사람 바꾸자.”
말이 나오자마자 일동 “오오!” 탄성을 질렀다.
사실 굉장히 민감했던 주제다.
여태껏 감추고 있던 욕망이자, 재앙이 닥칠 수 있는 역린이다.
결혼식이란 큰 이벤트,
사실 다들 쿨한 척 나왔어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그것을 선화 언니만 독점한다는 점이 조금… 아니, 많이 걸렸다.
결혼 새치기로 들어간 선화 언니가 괘씸하고 얄미웠다.
최악의 경우 우리들은 평생 못 올릴 수도 있으니 과장이 아니다.
술자리 종반, 뜨거운 화제로 후끈 달아오르자 우리들의 눈동자가 말똥말똥 뜨인다.
하지만 당연히 여기에는 반대하는 인물이 있다.
“잠깐잠깐잠깐!”
허둥지둥 교차하는 두 팔.
“니들,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지금 식장까지 알아보고 있고, 여행지까지 구상중이라고! 면사포로 얼굴 가리고 가면 신부가 막 바꿔도 되냐?!”
“……치, 자신 있다고 했으면서.”
“나한테 전혀 메리트가 없잖아 나. 한. 테!”
자신의 가슴을 두들기며 굳이 음절단위로 끊는 선화 언니.
상당히 깨진 창문이지만 내구성이 마냥 호락호락하진 않다.
새침하게 오리주둥이를 내밀던 미역 언니가 뜻대로 안 되는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좋아.
그러면 너가 이기면 우리 중에 누구라도 식장에 참석하지 않을게. 그 정도면 되겠지?”
“식장…?”
“응. 우리 전부 코빼기도 비치지 않을게. 이 정도면 될까?”
나름대로 교환책으로 내건 식장출입금지.
멋대로 우리까지 싸잡는 것이 썩 기분 좋진 않지만 나름 해볼만한 조건이다.
헌데 듣는 선화 언니는 사뭇 황당한지 눈꺼풀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더니,
“야…… 난 너희따윈 결혼식에 초대할 생각 코빼기도 없었는데?”
“엑?!”
“뭐?!”
“유나 잔뜩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선화 언니 너무해요!”
“진심… 입니까?”
“너무해….”
무척 담담하게 폭언을 내뱉자 모두가 반발한다.
하지만 선화 언니는 도리어 청자들의 애티튜드가 이상하다고 여기는지 파르르 눈 밑을 진동시킨다.
“안 그래도 우리 가족에겐 이런 미친 관계를 숨기고 있단 말이야…! 해도 너무한 건 너희들이 아니야?!
이러단 아예 신혼여행까지 따라오겠다!?”
“? 당연히 따라가야죠.”
“맞아. 당연히 가야지. 이제 단체가 됐으니까.”
“음~ 나는 요새 크루즈 여행이 땡기더라♥”
“와아… 가능하다면 그대로 세계일주도 재밌겠네요.”
“기다리세요.
세계여행이라면 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단체여행이란 부분과 시간배분을 생각했을 땐 한 지역을 진득하게 탐색하는 편이 좋습니다. 제 추천코스로는 조지아 쪽이나─”
우리끼리 재잘재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급격히 돈독해진 연합이 신혼코스를 일사천리로 정한다.
주변에 꽃이라도 피어날 듯이 듯이 화기애애해진다.
“안 돼… 안돼안돼안돼안돼……… 이건 말도 안 돼잖아….”
반대로 철저히 배제돼서 듣는 선화 언니에겐 악몽이 따로 없는지 머리를 맥없이 흔든다.
탕!
결코 용납할 수 없는지 주먹으로 바닥을 치고 외치는 선화 언니.
“어딜 멋대로 따라와?!
내기는 받아들이겠어! 대신, 내가 이기면 결혼식도 신혼도 절대 따라오지 마!”
“……진짜? 결혼식 포기할 거야?”
“웃기지 마! 어차피 내가 질 가능성은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서열을 다져놓자고!”
선화 언니의 자신감 넘치는 샤우팅과 함께 시작된다.
이렇게 주사위가 던져진 거다.
술김에 흘러나온 꽤나 흥미로운 내기─ 아니, 역대 최대의 빅딜이.
함께 취하면서 간신히 찾아온 불가침조약 평화가 손바닥 뒤집는 불화로 이어질 수 있으나 픽업된다면 만루역전홈런이 나올 찬스다.
이건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제각각 본인만의 자신감까지 있다.
그랬는데……
“제발 살려줘!!! 누구라도 맘마 만지게 해줘!”
“에잇! 오빠, 유나 젖가슴 만지려면 밖에 나가서 만져요!”
“야, 젖소! 너 대놓고 말하는 게 어딨어. 각자 유혹하는 형태라 했잖아!”
“너도 팔 하나 잡고 당기고 있으면서 무슨… 이미 물은 다 엎어졌다고.
자, 주인님 어서 저랑 나가요! 그럼 원하는 거 다 해드릴게요!”
“아뇨, 사장님 저랑!”
“……나랑!”
“저, 저도…!”
“살려줘! 팔다리모가지가 당겨지는데 바지 속이 괴로워…!”
낭만으로 시작했지만 개판으로 치닫는 종극.
내기가 걸렸으니 다들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든다.
이제 폭주를 넘어서 광분상태다.
하기야 서로 질 생각이 없으니 당연하겠다.
머리 위에 왕관 같은 면사포를 올리게 될 기회니까 욕심이 날 수밖에 없겠다.
그나마 오빠 몸이 튼튼해서 다행이겠다.
“다들 기운도 넘쳐……”
나는 이 개판 싸움에 끼었다가 지쳐서 좀 쉬는 중이다.
숨이 가빠 내기고 결혼식이고 뭐고 녹초가 되어 방석에 앉는다.
더구나 전장을 이탈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으음~♥”
‘……이 아줌마는 또 무슨 꿍꿍이래.’
이 난장판 중에 방석 위의 정좌로 홀로 차를 음미하는 한 사람.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백전연승의 명장처럼 차분하게 어디서 구해다온 작은 패트병에 담긴 보리차를 음미한다.
정수리에 나뭇잎이라도 살포시 앉을 듯 홀로 풍유를 즐긴다.
이윽고 연수 아줌마가 때가 됐다는 듯, 긴 손눈썹을 게슴츠레 뜨면서 입술을 연다.
차분하게 패트병을 내려두고, 첫수를 둔다.
“후우, 다들 허접해서 못 봐주겠네.”
“?”
이 목소리는 바로 곁에 있던 나밖에 못 들었을 거다.
다들 목에 핏대를 세우기 바빴기에 도떼기시장 호객소리에 묻혔을 것이 뻔하다.
허나 이어지는 큰 리액션만큼은 알기 쉬웠다.
“윽…!? 으윽!”
“……응?”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는 연수 아줌마.
배를 부여잡고 엎어진다.
등줄기를 오르내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방금까지 차나 홀짝이던 멀쩡한 사람이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제일 먼저 뛰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선우 오빠.
구급대원처럼 빠른 스피드로, 모두의 손길을 뿌리치고 연수 아줌마 앞으로 나선다.
“자, 자기……
배가, 배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뭐!?
잠깐만… 연수는 지금 임신 중이잖아. 혹시 술 마셨어?”
“아니, 술은 입가에도 안 댔는데─
으윽! 배가 아팟! 아무래도 나오려나봐!”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참신한 개소린가 속으로 외쳤다.
아기가 생겼더라도 이제 막 세포분열 시작했을 텐데 도대체 뭐가 나온단 말인가.
더구나 배도 안 불렀는데 나오더라도 결코 아플 리가 없다.
이건 명백한 연기… 사기다.
어처구니 없어서 코웃음을 쳤는데 막상 오빠의 반응은,
“저, 정말?! 아직 엄지손톱만 할 텐데 그럴 수가 있나?! 출산경험은 처음이라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해보면 그럴 수도……
아무튼 기다려! 당장 119에 전화 걸게!”
진심으로 긴급하게 핸드폰을 꺼낸다.
지진 난 동공으로 긴급다이얼을 진심으로 누르려고 한다.
그렇게 커다란 엄지손가락이 통화버튼까지 가려고 하자, 아프다던 아줌마가 손을 쭉 뻗어 제지한다.
“아니……
아무래도 안전한 곳에서 쉬면 나을 것 같아…. 괜찮다면 자기가 집에 바래다줄래…?”
“내, 내가?
근데 진짜 나 취한 상태라 자칫하다 연수가 다치기라도 하면─”
“으윽!
운전은 내가 어떻게든 가능하니까 제발…”
“괜찮겠어…?”
“응.”
“그럼 가자!”
“…….”
어째 둘이서 삼류 로맨틱 드라마 한편 쓰고 있다.
술에 취해서인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 펼쳐진다.
아줌마의 싸구려 촌극에 놀아나 진심으로 이탈하려하자 나대신 황당해서 말리는 선화 언니.
“야… 잠깐. 나랑 산책은?”
“다음에! 지금은 긴급상황이니까!”
“괜찮아 자기… 급하면 차까지만 바래다줘 운전만 하면 되니까…….”
“그럴 수가 있나! 나올 수가 있다는데 아빠가 같이 나가야지!”
절대 아무것도 안 나와요 오빠.
이 부분에서 태클을 꼭 걸어야하는 점이 있다.
연수 아줌마가 사양하는 척하면서 대놓고 아기가 업어달라는 자세로 팔을 내밀고 있다.
연기가 아닐 수 없다.
“웃샤!”
“왓♥”
헌데 오빠는 나오지도 않은 배에 지장이 갈까 더 과장해서 공주님 안기로 아줌마를 들었다.
그대로 현관문에서 슬리퍼를 끼워 맞추고 함께 허겁지겁 나갈 채비를 한다.
이 과정을 우리는 바라보고만 있다.
‘다들 안녕♥’
공주님 자세로 안겨서 나가던 연수 아줌마는 초승달 미소와 함께 입을 뻥긋댄다.
마지막에는 메롱♥ 얄밉게 핑크빛 혀까지 내밀고 도발한 뒤,
덜컹!
현관문을 나서 단둘이 집을 빠져나갔다.
가증스런 웃음을 남긴 채, 귀신이 코 베고 간 것처럼 날로 먹어버렸다.
“““……”””
여기에 우리들끼리의 어색한 적막은 덤으로 남겨줬다.
위이이이잉……
한동안 한랭이 감도는 집안.
실제로 에어컨이 가동 중이고, 너도 나도 어이가 없어서 동태눈을 하고 있다.
오래 응고돼 있다가 먼저 깨어나 감상을 내비친 인물은 미나 언니다.
“저래도 되나…?”
“저 여우년이… 저건 반칙이잖아!”
“애초에 임신 1개월 차인 아줌마 발연기에 깜빡 속은 오빠의 지능이 의심되는데요….”
“……분명 술에 취해서 그럴 거야. 응.”
불평을 늘어놓는 우리들.
말도 안 되는 수에 당했으니 그렇다.
그렇게 공감하는 분위기로 흐른다.
저런 수로 인정할 수 없다고,
흥미진진하게 시작된 내기가 황당하게 커튼콜이 내린다.
“아 그런데!”
그런데 이대로 끝내려니 정산할 부분이 남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선화 언니 결혼식은 연수 아줌마한테 뺏기겠네요?”
“아… 그렇게 되네.”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렇네. 아쉽지만.”
“저런….”
“…….”
내기 한방으로 프랑스 대혁명마냥 옥좌에서 물러나는 위기에 처한 여왕님,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었는지 내가 꼬집자 눈을 째렸다.
굳이 그걸 지적하냐는 눈치였으나, 주사위가 던져졌으니 어쩔 수 없었다.
“준비하던 결혼식, 취소하실 건가요?”
“…….”
본드 붙인 것처럼 입술을 꽉 접착하고 고뇌한다.
오랜 장고 끝에 나온 여왕님의 품격 높은 대처는,
“아니, 이건 무효! 절대 무효!
너희도 방금 봤잖아? 말도 안 된다고 동조했잖아? 그러니 무효. 무효무효 무-효!”
일방적 주장을 펼친다.
주장보단 떼쟁이 어린애처럼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귀를 때린다.
“언니…”
“안 들려! 무효무효무효!”
쾅!
그대로 무효를 연호하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무효를 기정사실화시키는지 팅! 안에서 문 걸어 잠그는 소리가 난다.
‘우리한테 따져봤자 의미가 없는데…’
무효처리는 연수 아줌마한테 따내야할 허락이나 딱히 우리들에게 득이 되지 않기에 내버려뒀다.
아무튼 그렇게, 2차적으로 이루어진 금사자 대주주 모임은 종결된다.
집에 남은 그녀들 모두 인정하지 않겠지만 함께 집을 박차고 나간 최종 승리자가 연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승자인 하연수는 결혼 이야기에 대해 딱히 거론하지 않았기에 큰 분열로 번지지 않았다.
“나왔어~♥”
참고로 채선우는 다음 날 아침이 지나서 돌아왔다.
무척 쌩쌩하고 개운한 얼굴로.
볼에는 키스마크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