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7 제 2차 금사자 긴급 대주주총회
넓은 거실이다.
처음에는 이 넓은 거실에 원탁처럼 둥글게 모인 구도였다.
정갈하게 깔끔하게 꾸민 미국식 주택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나름 예술적으로 꾸며진 장소였다.
‘으… 술냄새가 진동해.’
허나 이젠 집안 곳곳에 안주들이 까져있고 냄새만으로 취할 수준의 강한 술냄새가 진동한다.
각자 자신들의 흐트러진 옷차림새처럼 겉치레 따윈 개나 줘버렸다.
딱 막판에 술로 망친 MT현장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이 망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유별난 인물이 한 명 있다.
“야~ 술! 술 더 가져와 멍멍아!”
“아이씨… 누가 저년한테 술병 쥐어줬어.
기껏 치워뒀는데 개판났네.”
“수울! 술 더 가져오라고!”
“아 기다려!
안 그래도 너 술 처먹고 죽이려고 더 가져올 거니까.”
“히힛, 술이다아~♥”
‘저 언니, 망가질 땐 제대로 망가지네….’
짜증내며 부엌으로 빠져나가는 미나 언니 뒤로 보이는 선화 언니.
일단 무릎 꿇던 다소곳하던 자세는 버렸다.
양반다리를 넘어 한쪽 무릎까지 세우고 옥탑방 실거주민처럼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시작부터 숨 쉬는 것도 거르며 달리더니 저 지경에 이르렀다.
술자리 매너가 최악이면서 더 사악한 점은,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보이며 주정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야, 너! 이리와 봐!”
“우웅… 유나는 조용히 마시고 싶은데요….”
“시끄럽고 와 봐!”
“으……”
얌전히 마시는 우리들을 한 명씩 돌아가며 괴롭히는 선화 언니.
“……딸꾹!
너 말이야… 나 예쁘다고 좋다고 했지?”
“지금 언니는 좀 싫은데요….”
“어딜 슬금슬금 빠져나가? 평소에는 나 좋다고 졸졸 따라와 놓고.
……시발. 가까이서 보니 젖탱이 존나 크네. 이거냐? 이걸로 남자들 유혹하고 다닌 거냐? 앙?!”
찰싹! 찰싹!
“아얏! 으으으…”
출렁♥ 출렁♥
목에 팔을 건다.
그리곤 마치 아저씨가 추행하듯이 거침없는 터치를 가한다.
소련이 미국의 흉물스런 무기 취급하듯이 가슴을 찰싹찰싹 때려서 물결치게 만든다.
“꿀꺽꿀꺽…… 푸하!
크~ 좋다! 왜들 그래? 다들 마셔♥
옛날에도 첩실이 있었는데 현대라고 안 될 건 없지! 마셔! 앞으로 자주 술자리 갖자고!”
“놔주셔야 마시는데요오….”
“그 자랑인 가슴에 담가서 마셔!”
“말도 안 돼….”
과음, 주정, 고성방가 트리플 크라운으로 일삼는 폭정.
여왕의 폭주를 막을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샌드백처럼 붙들린 유나 언니만 불쌍할 뿐이다.
나는 이 사단의 원인이 되는 인물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곁눈질로 살짝 째려본다.
“저기요, 그쪽은 술도 못 마시면서 왜 꺼내온 건데요?”
“응?”
내 질문에 꽉 찬 글라스에서 입술을 떼는 여성.
옆에는 연수 아줌마가 앉아있다.
이 모임에 술을 끼얹은 장본인이면서 본인 잔에는 탄산이 가득하다.
고묘하게 맥주색에 맞춘 환타다.
아까 잔을 권하니 뺨에 손바닥 찰싹 붙이고 “나는 임신을 해서 안 되겠네♥”하는 도발성 멘트까지 더했다.
사실 오늘 선화 언니가 모임을 갖고 열 받은 건 이 인물 탓이 크다.
내 말에 열 받으라는 퍼포먼스인지 바에서 술잔 다루듯 무드있게 찰랑찰랑 돌리다가 나지막이 한마디 붙인다.
“재밌잖아.”
갈매기 눈썹모양으로 웃음.
“뭐, 솔직히 말하면 저쪽 마님께서 앵무새마냥 같은 소리 반복하는 게 지겨웠거든.”
“앙?!”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마셔♥”
노려보는 선화 언니를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무마시킨다.
이 뻔뻔한 여우는 정말 사람을 황당하게 만든다.
“참나… 그게 이유에요?”
“음~ 게다가 나는 이런 파워풀한 에너지가 좋거든.”
“에너지?”
“젊음이 느껴지지 않아? 결혼이니 뭐니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을 바엔 이렇게 확 깨지면서 놀면 즐겁잖아.
역시 사람은 젊게 살아야해♥”
참으로 찰딱서니 없는 발언들이다.
한숨이 연달아 나온다.
“그런 한가한 소리할 시간에 제물로 바쳐진 유나 언니나 도와주라구요.
아줌마.”
씁쓸한 눈빛으로 여전히 헤드락에 걸린 유나 언니를 의의동망 바라본다.
“…….”
그런데 내 발언 중에 무언가 걸렸는지 아줌마는 잠깐 표정이 싹 식는다.
살짝 무섭도록 정색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사랑아.”
“…예?”
“이제 아줌마처럼 딱딱한 호칭으로 부를 사이가 아니잖아.
귀엽게 언니♥라고 부르렴.”
“예에…?”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는지 정면에서 권하는 ‘언니’.
그 발언을 오만상과 함께 시니컬하게 받아친다.
“싫은데요.”
“응? 어째서?”
“그쪽, 따지자면 우리 엄마랑 나이가 비슷하니까요.”
씰룩!
살짝 미끄러지는 웃는 갈매기 눈썹.
내 착각이 아니라면 저 살 속에 타고 흐르는 혈압은 무척 높아졌다고 보인다.
겉으론 젊어 보이지만 내심 나이에는 신경 쓰고 있나보다.
반대편 내 옆에서 마시던 엄마가 묘한 기류를 느끼고 안절부절한지 막아세운다.
“저… 사랑아. 상대에게 너무 무례한 말은 하지 마렴.”
“아니… 엄마가 생각을 해봐.
앞으로 계속 볼 사이고, 저쪽이랑 엄마 나이차가 5살인데 언니라고 부르면 엄청 꼬이지 않겠어? 차라리 이모가 더 맞겠지.”
“그, 그렇게 많으셔?! 워낙 젊어 보이는데…”
“하하, 과찬이에요♥ 그쪽도 아직 고등학생 같으세요.”
“아하하….”
스마일을 주고받는 엄마와 연수 이모님.
“아, 아무튼! 묘한 인연이지만 예의는 지켜드리렴.”
“아니… 이건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괜찮아요. 저도 억지로 언니라 불리긴 싫으니까요.”
어른스럽게 말리는 연수 아줌마.
마치 자신은 아무런 데미지가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흐음….”
허나 저 유려하게 웃는 눈매는 당장이라도 복수를 준비한다.
감히 자신에게 고무신을 던진 꼬마에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한다.
왠지 저쪽에선 나와 비슷한 향이 풍겨서 알 것 같다.
“아! 가만 따져보면 사랑이 말이 맞긴 하네요.”
“네?”
내 직감이 틀리지 않은지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아줌마.
슥슥♥
자연스레 배에 손을 가져다대고, 쓰다듬는다.
애정 어린 손길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반복한다.
“이제 아줌마가 된다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어쩔 수가 없네요.”
“아~ 아하하….”
‘…………얄미워.’
이 대목에서 생명의 탄생 신비나 어머니의 모성애에 감동한다면 그건 멍청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아줌마는 그저 자랑할 뿐이다.
언제나 프리덤을 추구하는 비둘기처럼 굴지만 은근히… 아니, 완전히 자부심을 부린다.
내가 미지의 대륙에 먼저 일착으로 도달했다며 떠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다.
“응? 무슨 할 말이라도?”
“흥, 아니에요.”
“후훗♥”
“쳇.”
“으음… 딸꾹!”
불쾌해서 보기 싫을 때 마침 여봐라 들으라는 듯이 끼어드는 딸꾹질.
우리끼리 떠드는 사이, 선화 언니의 술주정이 다르게 변질된 모양이다.
병나발을 불다가 스타일을 바꿔 정상적인 글라스에 따라 마시기 시작한다.
여전히 홀로 술 마시는 아저씨 자세로 자기 유리잔을 쫄쫄 채운다.
…자세가 너무 망가져 이젠 고급스런 짧은 금색 드레스 안의 까만 속옷까지 대놓고 보인다.
품위 따윈 다 벗어던진 벌거벗은 여왕님이다.
“난 말이야…… 딸꾹!”
더구나 아저씨 같은 자세로 아저씨 같은 발언을 이어간다.
“지금 이 미친 상황이 좆같은 건 사실이지만 사실 다~ 너희를 생각해다는 일이었단 말이야.”
“네에? 이렇게 깽판이나 치면서요?”
찰싹!
“아얏!”
목을 붙잡힌 유나 언니가 리액션을 해줬으나, 술냄새가 심한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인상을 찡그린다.
“야, 그 바람둥이를 잘 생각해 보라고.”
“생각?”
“지금이야 가물치마냥 팔팔하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지만 어차피 시간 지나면 그놈이 떠들고 다니는 사랑이 식을 게 분명하잖아.
……딸꾹! 만약 그 자식의 변심이나 나중에 다른 젊은 여자들 꽁무니 따라잡는 니들이 감당 가능하겠냐고.”
……
그 말에 일동 침묵.
허나 아주 짧은 텀이 지난 후에, 유나 언니가 빠르게 반박한다.
“아니에요! 오빠는 정말 유나 좋아한다구요!”
“그게 변할 게 뻔하다고. 게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야─”
“사랑사랑 노래 부르고 다니는 건 제외다.”
동안의 얼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며 대화의 맥을 차단했으나, 유나 언니는 불굴의 의지로 이어나간다.
“이번에는 달라요! 오빤 더 정열적으로 변했다구요!”
“…변해?”
“얼마 전에 섹스할 때 제 가슴 꽉 쥐면서 ‘유나 젖가슴! 이것만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어어어!’라고 하셨는걸요?”
“…….”
찰싹!
“아얏!”
선화 언니는 한심한 듯이 내려다보더니 내민 손바닥으로 냉정하게 가슴을 한 대 더 친다.
여름철의 얇은 홈웨어라 이젠 정말 아파 보인다.
이 모든 대화를, 홀로 정좌하며 듣던 한정아가 한마디 붙인다.
“확실히 일리가 있네요.”
“그렇지?!
역시 넌 머리가 좀 굴러가게 보였─”
“네? 아… 아니요,
선화 씨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방금 유나가 한 발언이에요.”
“……앙?”
“그쵸?!
역시 오빠는 유나 좋아한다니까요♥”
드디어 누군가 맞장구를 쳐주나 싶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좋다 말았던 선화 언니에게 한정아는 혀 한 번 안 꼬이고 또박또박 나열한다.
“까놓고 다들 경험하셨겠지만 사장님과 매번 플레이를 다르게 할 때마다 행위가 더 격렬해지지 않잖습니까?
선화 씨의 염려가 그렇더라도 사장님과의 애정행위를 더욱 늘리고, 저희와의 만남만 잦게 이어지면 그건 어디까지나 기우였을 뿐일 겁니다. 게다가 저희들의 관계는 이제 더는 가볍지만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축약하자면 저희가 계속 매력적이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이죠.”
선화 언니의 턱이 떡 벌어진다.
맥주가 입가로 조금 새서 더럽다.
반대로 한정아는 남의 턱에서 술이 질질 새는 동안 깔끔하게 소주 마시듯 맥주를 살짝만 머금는다.
“진짜 미쳤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겁니다.
더구나 저는 꽤 자신이 있어서요. 최근에 사장님이 좋아하는 플레이가 뭔지도 알았고…♥”
“어지럽다. 어지럽네 너……
더 어지러운 건 저 망언에 공감하는 인간들이고.”
사실 취한 선화 언니의 주정은 다들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한정아가 끼어들자 자신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듯이 편해진다.
심지어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서 쭈그려져 홀로 홀짝이던 미역 언니마저.
“……너는 쫄려?”
“뭐?”
“불안한 것 같아서. ……버려질까봐.”
“야 너.”
취기 싹 지우고 정색하는 선화 언니.
감히 잠자는 사자 콧털 건들이냐는 듯 안면을 싹 식히고 도발에 응한다.
“나는 이미 결혼까지 했다고.
이제 제대로 식까지 올린다는 거 못 들었어?”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선우가 속으로 누굴 제일 좋아하냐는 가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자신 있으면 확인해보자고.
선우가 여기서 누굴 가장 좋아하는지.”
곰팡이 언니가 음침하게 웃더니 한 가지 제안한다.
여태껏 선화 언니의 지긋지긋한 쇼만 보다가 드디어 술자리답게 흥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모두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이쯤이면 됐으려나?”
오늘은 성실하게 일했다.
내 일은 어느덧 방송에서 여자랑 처박고 붕가붕가하면서 노는 행위가 됐으나 오늘은 진짜 일만 했다.
세무정리.
어덜트상품 광고 세세한 협의.
다음 달 스케줄 정리.
이런 귀찮은 부분들은 왜 해킹툴로 안 되는지 의문이다.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정아 없이 스스로 처리하려니 너무 귀찮다.
“하암… 그래도 시간은 떼웠으니까.”
지금 시간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
집에 돌아가면 마누라 자는 얼굴이나 앞치마를 입은 미나가 반겨줄 거다.
모두가 모이는 모임 장소에 내가 끼면 십중팔구 선화가 째려볼 것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
“어이, 나왔─”
“아~ 어서오셨어요. 서. 방. 님?”
“앗…?!”
현관문을 열자마자 선화가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어서와 자기♥”
“오빠 얼른 들어와요!”
“와, 왔어요 선우 씨…♥”
“오빠아아♥”
“어서오세요, 선우님♥”
“……어서와.”
아니.
아는 친근한 얼굴이 전부 마중나온다.
“아하하, 다들 아직 안…… 갔네?”
“너 없는 사이에 어느덧 다들 친해졌거든.
…그리고 이 새벽 늦게까지 재밌는 놀이 중이여서 말이야. 너도 당연히 낄 거지?”
“하하하… 재밌는 놀이?
근데, 나는 일하고 오느라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야겠는데”
“아니. 너가 꼭 있어야 하거든.”
“………내가?”
질투심 많은 선화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웃는다.
입에서 풍기는 알코올의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객기인지 억지로 입꼬리를 당긴다.
그게 몹시 불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