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50. 시즌 1호 (주)금사자 대주주총회
“……애당초.”
한고비 넘긴 이선화가 실바늘보다 가느다란 눈빛을 뿌린다.
방금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달아오른 안면을 싹 감춘다.
“니들이 부추기는 거 모를 거 같아? 살살 자극시키면서 하이에나처럼 자리만 노리고 있을 거 다 알거든?”
“하하, 그럴리가요~♥”
“글쎄? 나는 결혼 관심 없어서.”
“너만 없었으면 원래 내 자리였다고… 오기 전까지 둘이서 알콩달콩 정말 좋았는데.”
“우웅… 유나는 결혼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흥. 가식적인 것들.”
팔짱을 낀다.
화려한 드레스 탓인지 틱틱대는 유치한 태도마저 귀부인 같은 기품이 느껴지는 묘한 여자다.
“이런 식으로 발악해봤자 이 시점에서 너희들은 노리개일 뿐이라고. 나는 정신 차리라고 좋게 말해줬는데, 그 발정난 새끼 성욕해소용으로 소비될 뿐이지 뭐.”
“그거 고스란히 자기 얼굴 때리는 소린데요….”
어이가 없어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찌릿 레이저를 쏜다.
현재 이선화 정면의 대각선에 자리 잡았는데, 대화에 참가하자마자 모두의 이목이 나한테 쏠린다.
순간 털이 삐죽 섰다.
“나는 다르거든?!”
“어… 어디가요…?”
“흥, 굳이 언급하자면 현재 내 배우자에다가 니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기 훨씬 전부터 만났다고.”
굳이 언급한다면서 중간중간 악센트를 준다….
“그래… 따져보면 벌써 작년 여름에서 가을 넘어갈 쯤이겠네.”
기간을 언급하며 잔뜩 어깨에 들어가는 힘.
왠지 로열 블러드를 주장하는 낡은 귀족이 겹쳐 보인다.
“흐응.”
이때, 얌전히 듣다가 비음을 깔며 끼어드는 하연수.
“그거 진짜야?”
“…내가 거짓말해서 좋을 게 뭔데?”
“내가 알던 거랑 조금 달라서. 과거에 우리 자기가 마냥 신사적이지만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윽.
볼을 씹을 각오로 입술을 앙 다물었으나 분명 들었다.
여왕의 정곡 찔렸다는 감탄사를.
“막 나가던 시절을 감안하면, 연애를 시작한 기간이 그 시점은 아니지 않아?”
“……아, 아무튼 첫만남은 그때였다고! 요점은 너희들보다 훨씬 빨리 만났다는 거야! 알겠어?!”
하연수가 노려보자 목청을 올리면서 급하게 발언을 마무리한다.
탐탁지 않은 점이 곳곳에 보이나 마침표를 찍는다.
아무튼 그렇다고 박박 우기며 끝내버린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나는 뒷전이겠지.’
안타깝지만 오빠의 이전 히스토리에 대해선 모르기에 여기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언니.”
그 외에 할 말이 있는지 발언권을 얻기 위해 손을 번쩍 드는 분홍머리 소유나.
지긋이 노려보던 이선화가 턱짓을 하자, 딸기우유 향기가 풍길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퍼진다.
“딱히 만난 순서나 중요하지 않잖아요?”
“왜 안 중요해.”
“그야 오빠와의 만남에 대해서 논의한다면, 오빠한테 얼마나 사랑 많이 받는지가 중요하지 않나요?”
“……그 두루뭉술한 사랑이란 걸 어떻게 측정할 건데?”
“웅~ 일단 유나는 오빠랑 러브러브하면서 사랑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
순진무구한 답변에 코웃음으로 회답하는 이선화.
“여기서 채선우랑 떡치는 중에 사랑한다는 속삭임 못 들어본 년 손 들어봐.”
말이 끝맺자마자 고요함이 퍼진다.
오빠의 정렬적인 세레나데를 안 받아본 여성은 없었다.
처음으로 만장일치 의견이 통합된다.
…아무래도 사랑한다는 고백은 오빠가 스팸문자마냥 아무 곳에서나 뿌린 말인가 보다. 이렇게 싸구려일 줄이야.
“봤지? ‘사랑한다’는 그 바람둥이 기준으론 아무 도움 안 되거든.”
“힝… 오빠 바람둥이….”
”역시 이런 건 순서로 따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다들 잘 처신하라고.”
“기다려.”
멋대로 결론을 지으려하자 하연수가 가위처럼 자르면서 끼어든다.
“후우… 왠지 유치한 순위 싸움이 됐지만 말 나온 김에 따지자면, 순서보단 자기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가졌는지에 대해 따져야하는 거 아니겠어?”
자신만만하게 의장을 바라보자, 이선화는 특유의 불쾌한 눈초리로 받아친다.
“특별한 경험…? 니년이 언급하는 경험은 끽 해봤자 원숭이처럼 떡친 경험담이겠지.”
“음~ 반은 맞지만 조금은 달라.”
“뭐가 다른데?”
“나는 우리 자기랑 야외에서도 잔뜩 해봤거든♥”
물을 마시고 있었으면 뿜으면 되는 대목이었다.
뜬금없이 알고 싶지도 않은 커밍아웃을 한다.
“세세하게 언급하면 자동차, 공원… 아! 연예인 분장실에서도 해봤어”
나는 넋을 놨고, 이선화는 눈가를 바르르 떤다.
분홍머리는 “와아…”소리를 흘렸고, 유일하게 미나 언니가 담담하게 바라본다.
“니 막돼먹은 취향은 알릴 필요 없다고….”
“유치하게 시시비비를 따지고 있으니까 덧붙여봤어. 게다가 나는 자기랑 해외여행까지 가서 놀았는걸. 최근에♥”
“…….”
구태여 최근이라는 단어까지 붙이자 이선화는 울컥 차오르는 화를 다스린다.
이 소식만큼은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주먹을 떤다.
“음, 이번 여행으로 무려 3박 4일 동안 끈덕지게 함께 붙어있었으니까 최장기로 자기랑 함께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
“나를 보고 말하지 마라….”
“후훗♥”
하연수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인다.
꼭 쓸데없는 도발을 더한다.
골리는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러다가 진짜 머리채 잡고 싸우지 않나 걱정된다.
‘음… 서로 싸우면 나한테 이득이려나?’
“잠깐.”
이때, 이파전이 된 싸움에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는 도전자.
“응? 무슨 할 말이라도?”
“경험이랑 섹스한 기간으로 치자면 내가 최다야. 지금 뒤에 놓인 침대에서 일주일 내내 주인님이랑 떡쳐봤다고.”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어깨 펴서 떳떳하게 선언하는… 미나 언니.
점점 이상한 자체 폭로전으로 치닫고 있다.
의장인 이선화의 얼굴이 어떨지는 상상하는 그대로다.
“구역질 올라오는 개소리 할래 멍멍이년아…?”
“흥, 니들이 먼저 했잖아. 거기에 세세한 관계까지 따지자면 나는 주인님이랑 대학 동기에 오랜 친구라고.”
“구라치지 마. 듣기로는 나중에 알았다고 하던데.”
“친구였거든? 그… 그리고 이런 고백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첫만남에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까지 했다고…♥”
“진짜 개소리 안 끊으면 죽는다…?”
자신이 엄포한 명분을 위협하자 이선화는 톤을 내리깐다.
이 회의를 연 건 저 백금발인데…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코너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나 언니는 사실이 그러하다며 자기만의 추억 젖은 향취에 취해있다.
“흐응… 그쪽 자기도 꽤 제법이네. 그 짐승 같은 힘을 일주일이나 견뎠다고?”
“세세하게 따지자면 섹스뿐만 아니라 일주일동안 같이 지낸 거라, 신혼부부 같다라고 할까…♥
“지금 누구 앞에서 신혼 운운이야…?”
“어머나, 이쪽은 화가 잔뜩 났네.”
“넌 그만 집으로 가라…!”
“부른 건 그쪽인데?”
“그러니까 더는 필요 없다고.”
“저기요!”
물이 끓는점을 향해가자, 곰곰이 생각하던 소유나가 벌떡 일어선다.
아까 자기 발언이 묵살당한 이후로, 내 옆에서 끙끙대더니 밝아진 톤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유나는! 떠올려보니 유나는 오빠랑 섹스할 때 기저귀까지 차봤어요!”
“지금 무슨 미친 소리야 너는!?
뜬금 고백하는… 정신 잃을 것 같은 폭탄발언.
카오스이론이 첨가됨으로 서로의 옥타브가 한 층 더 올라 결국 난장판이 된다.
“다 떠나서 결혼한 시점에서 끝이라고! 그만 포기하라고 이년들아!”
“포기해야하는 건 너야! 잘 지내는 중에 왜 갑자기 결혼을 하고 지랄이야!”
“자자, 다들 진정해.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엄청난 희소식이 있을 텐데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구♥”
“넌 아까부터 열 받는 말투 쓸래?”
“그리고! 기저귀 찬 저 방송에서도 다 퍼졌어요! 굿즈랑 인터넷상품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구요!”
“아까부터 너는 대체 뭔 얘기를 하는 건데!?”
도떼기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서로 자기가 더 인연이 깊다고 외치가 바쁘다.
유치원생들도 아니고 서로의 주장만 있는 힘껏 외친다.
‘어쩐지 자랑대회가 됐네….’
난투에 굳이 끼어들지 않자 결국 다들 지쳐서 다시 방석에 앉는다.
이선화와 미나 언니는 목 쓰느라 가슴을 오르내렸고, 하연수는 언제나처럼 여유가 넘치며 분홍머리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뿌듯해한다.
다들 비주얼이 엄청나서 겁 먹고 들어갔는데… 사실 별 거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쪽 자기는 조용하네.”
“예?”
그런 생각을 하자, 이쪽으로 돌아가는 타겟.
하연수가 얌전히 생수를 마시던 나를 지적한다.
“다들 목소리 높이기 바쁜데, 그쪽은 얌전해서 말이야.”
“아… 저는 내세울게 많지 않아서요.”
“그래? 그럼 이 무대에서 빠지겠다는 소리겠네?”
요염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그러자 이번에 척출할 대상은 너라는 듯이 일동 노려본다.
함께 진흙탕 싸움하는데 혼자만 깨끗해서 참을 수 없다는 마인드인지 팔을 잡아당긴다.
‘너무하네….’
어쩔 수 없이 기어나가는 목소리로 재차 답변한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정말 별로 없는데요.”
“어머, 하나도?”
“따져보면 그냥 평범해서….”
“그럼 빠지면 되겠다♥”
“사랑이에게 미안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면….”
“특별한 경험이 없다는 건 슬프다고 생각해요!”
“흥, 너 아직 대학생이지? 너한테는 연락할 필요도 없었겠네.”
운을 띄우자, 기회다 싶어 달려드는 연합군.
모조리 미끼를 문다.
그물에 걸려들어 펄떡대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내심 미소를 짓는다.
“그럼 하나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목을 푼 다음에 갈기는 필살기.
“다들 그렇겠지만… 당연히 오빠가 첫경험이죠?”
“…….”
“…….”
“…….”
싹 사그라드는 공격신호.
“응? 첫경험?”
상황파악 못하는 분홍머리를 제외하고 다들 눈빛을 피한다.
싱글싱글 웃어보이자, 감히 누구도 대적하지 못한다.
‘오빠가 처녀 경험이 처음이란 건 거짓말이 아닌가보네♪’
유치한 싸움이지만 막상 모두의 콧대를 누르자 미소를 감출 수 없다.
프리스타일 랩배틀에서 승리한 래퍼의 뿌듯한 심정을 알겠다.
이 회의, 조금 재밌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