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149. 시즌 1호 (주)금사자 대주주총회
“와… 역시 크네.”
앞서 한 번 방문했지만 변함없이 넓은 집이었다.
과장 보태면 거실은 테니스 칠 수 있을 넓이에 천장에는 무려 샹들리에가 걸려있다.
인구가 편향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대한민국에서 이곳만 미국 땅이다.
게다가 촬영용으로 뒀는지 중간에는 여전히 커다란 침대가 자리 잡고 있다.
가정부라도 따로 쓰는지 가지런히 정리된 시트와 베개가 거의 호텔 수준의 청결함을 자랑한다.
이게 만약 내 신혼집이라면 평생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다.
채선우♥신사랑의 러브하우스라면 딱 좋을 느낌?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만….
“먼저 도착한 사람은 너야?”
“앗!”
현관에서 운동화도 안 벗고 멀뚱멀뚱 집구경하고 있자 다가오는 여성.
“아, 안녕하세요! 이거,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좀 사왔어요.”
말 끝맺음과 동시에 근처 슈퍼에 들러 산 박스형 자양강장제를 내민다.
어쩐지 압도적인 첫인상에 저자세로 허리까지 살짝 굽혔다.
백금발.
여기에 영화제 레드카펫을 워킹할 화려한 원피스 차림새였다.
집에서 왜 저런 불편한 옷을 입나 싶은데 이 여성의 차림새는 그러했다.
‘…실물이 더 미쳤네.’
대면한 경험은 오늘이 처음이나 사실 아예 초면은 아니다.
앞서 오빠에게서 카톡 사진으로 첨부됐었고, 일방적으로 통보문자를 보내온 프사에 ‘이선화’라고 적혀있었기에 이쪽에선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겠다.
“흐응.”
“어,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아니라고 하지만 이선화는 독기 가득 나를 노려본다.
마치 MRI기계가 스캔하듯, 꼼꼼히 분석하다가 가슴부근에서 긴 속눈썹을 지그시 감는다.
“개새끼… 역시 가슴이네.”
느닷없는 육두문자.
이어서 오리 주둥이를 쭉 내밀고 툴툴대면서 등을 돌려 자기 볼일 보러 간다.
그대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응…?”
따라서 덩그러니 현관문에 서있는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되지 않아서 집에 들어오란 소린지, 그대로 있으라는 의민지 파악이 되질 않는다.
집은 좋은데 손님맞이가 영 꽝이다.
그야… 상호간 관계를 따졌을 때 껄끄러운 사이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녀가 시사하는 바는 이거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고.
“이 시간에 누구?”
“앗?!”
주먹 불끈 쥐고 호랑이굴에 들어왔다는 각오를 다지니 측면 기둥에서 다른 여성이 나온다.
여기는 무난한 흑발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듯이 미인에 머릿결은 찰랑이고, 옷가지는 다른 의미로 더 획기적이다.
검은 속옷에 검은 스타킹.
여기에 하얀색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다.
남자들 혼을 쏙 빼놓을 뇌쇄적인 차림새다.
…반대로 동성의 입장에선 뇌세포가 파괴돼 수치심이 존재하지 않나 의심되는 복장이다.
벌건 대낮에 하물며 택배직원이라도 찾아오면 어쩌려고 이런 무방비한 옷을 입나 싶다.
“아, 혹시 선화 연락받고 온 애야?”
“예? ……예에.”
눈동자를 어디다 둘지 민망해하는 와중에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한쪽은 불친절했는데 이쪽은 딱히 친절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일방적 바람일 뿐이었다.
“참나… 만사에 불만만 많은 년 같으니. 되게 웃기는 짬뽕 아니야?”
“……예? 짬뽕? 방금 방에 들어간 백금발 말인가요?”
“그래! 오늘 찾아왔다면 문자 봤을 거 아니야?[출석하지 않으면 권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라니, 지가 진짜 지가 뭐라도 된다고 뽕에 취해 있다니까. 결혼한 뒤로 사람 깔아뭉개고 어깨에 힘이 장난 아니야.”
“예에….”
불평불만이 많은지 초면에 손짓발짓 동원해 한탄을 늘어놓는 흑발녀.
…이선화가 결혼한 배후자라면 같이 사는 이 여자는 뭐지? 세컨드인가? 다른 내연녀로 보는 게 옳겠지?
오빠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왔다면 관계를 추측조차 하지 못할 비범한 집안이다.
“……그랬다니까! 하, 진짜 주인님 때문에 참고 살긴 하는데 진심으로 한 대만 쥐어박으면 소원이 없겠다.”
“예에.”
일단 건성으로 맞장구를 쳐준다.
그러다 이내 머리를 45도로 기울인다.
“잠깐만요.”
“왜?”
“…주인님이라면?”
“아아… 선우 말이야 선우♥ 채선우 주인님♥”
손바닥을 뺨에 찰싹 붙인다.
오빠의 이름만 불러도 힘이 나는지 발그레 뺨을 붉힌다.
순식간에 몹시 야릇한 눈빛으로 바뀐다.
…이성이 볼 땐 어떨지 모르겠으나, 동성의 시선으로썬 참으로 못 볼 꼴이다.
모든 걸 내려놓은 굴욕적인 호칭과 차림새가 선우 오빠의 다채로운 취향 중에 하나가 아닐까 추측된다.
“어쨌든 이만 들어와. 커피 내리는 중인데 마실래?”
“그럼 염치불구하고….”
앞서 백금발과 달리 싹싹한 손님마중.
슬슬 서있는 것에 지쳐서 덥석 물었지만 옷깃 하나 안 스치려고 노력한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니 이름은 윤미나, 역시 연상이라고 한다.
함께 무드 있는 부엌의 식탁에서 티타임을 보내고 있으니 이 뒤로 등장하는 인물들도 범상치 않았다.
“저 왔어요 언니♥”
분홍머리에 소유나라는 이름의 공성용 거인과,
“후우… 나는 바쁜데 말이지.”
하연수라는 이름에 하반신 피라미드 괴물이 찾아왔다.
한쪽은 비주얼 덩어리였고, 다른 한 쪽은 비주얼 폭력이었다.
육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부분이 오빠의 마음에 들었는지 알게 되는 인물들이었다.
나와 달리 몇몇은 서로를 어느 수준 아는 눈치였으나 딱히 소개시간도 없이 무작정 회의에 들어갔다.
그렇게 가장 넓은 거실에서 방석 깔고 원으로 빙 둘러앉은 게 현재다.
“이 이상 더 피보기 싫으면 내 남편에게 치근덕대지 마.”
“싫다면?”
“초면에 죄송하지만… 싫은데요.”
“싫거든.”
“웅…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시작부터 기를 누르려고 그만 선우 오빠를 포기하라는 안건이 나오자 각자의 의견을 낸다.
마치 단합이라도 된 것처럼 이구동성 각자 목소리를 올린다.
이번 회의를 이끌어낸 장본인이자 의장을 자처한 이선화는 시민들의 저항에 한 번 더 목청을 올렸으나, 우리가 듣는 척도 안 하자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아 진짜……”
열 오르는 이마를 짚다가 화려한 백금발을 까올리곤,
“잘 들어. 이해를 잘 못하는 모양인데, 니들이랑 떡치면서 논 이놈은 결혼까지 한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여기 모인 사람 숫자를 보고서 모르겠어?!”
“이미 그쪽 때문에 다 아는 사실이라고.”
“결혼 소식까지 들은 시점에서 새삼 놀랍지는….”
“너도 참 포기를 모른다.”
“웅… 오빠랑은 이미 쓰리썸까지 해봤는걸요?”
“아 정말! 알면 왜 헤어지기 싫다는 건데!”
답답한 듯이 외치는 의장.
하지만 더는 무소용하다.
“당연하잖아? 우리 자기만한 남자가 또 없거든♥”
“……좋아하니까♥”
“굳이 말을 해야 하나.”
“유나는 오빠랑 꼬추 써서 노는 게 좋아요♥”
진실을 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로, 다들 뇌가 살짝 망가져 있었다.
여기에 참여한 나도 할 말이 없지만… 다들 어지간히 코가 꿰인 모양이다.
‘쳇, 이래서야 경쟁자들이 줄지 않겠네.’
경쟁자들의 항전의지가 꽤 결연하다.
하지만 각자의 자세한 러브스토리보다 문득 다른 호기심이 스쳐 팔을 올렸다.
“흥, 뭐야?”
“저기… 그 말 들으니 궁금해졌는데요. 그럼 이걸로 오빠의 애인들은 여기 모인 사람이 단가요?”
애인이란 표현이 영 탐탁지 않은지 인상을 쓰는 이선화.
옆머리를 배배꼬며 첫인상 때처럼 시니컬하게 답한다.
“원래 총 3명이 더 있었어. 그런데 1명은 오늘 바쁜 일이 있다고 빠졌고, 다른 1명은 내 말투에 나오기가 무섭다고 겁냈고, 마지막 년은 사진 합성하지 말라고 아예 차단 박았어.”
“그럼 이 외에도 셋이나 더 있다구요…?”
“그렇다고! 이 쓰레기새끼!”
스치듯 만나는 썸도 아니고 애인이 총 8명.
여러모로 감탄하는 와중에 하연수가 리액션을 더한다.
“후훗, 우리 자기 힘도 좋네. 매일이 청춘이야♥”
“지금 웃음이 나오냐 이 여우야!”
“그쪽 자기는 이만 포기하라니까. 자기랑 단둘이 여행 갔는데 그 넘치는 정력, 혼자 감당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역시 너랑 놀러나갔구나! 어쩐지 쥐어터지는 내내 끝까지 숨기더라 이 발정난 짐승새끼!”
잘 아는 것처럼 투닥대는 두 사람.
곱씹어보니 왠지 호명한 셋 중 한 명은 알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안 와서 다행이지만… 왔다면 다소 민망했을 것 같다.
“저기.”
다음 타자로 번쩍 손을 드는 윤미나.
티타임을 가지다보니 그다지 이사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미나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뭐야.”
이선화가 도끼눈으로 맞이한다.
미나 언니는 이선화와 같은 동거인이면서도 사이가 많이 좋지 않은지 앙숙처럼 서로 날카로운 발톱을 내밀었다.
“늘 하는 얘긴데 말이야. 주인님 주변이 거슬리면 니가 헤어지면 되잖아?”
“……헤어지라니?”
“그렇잖아. 주인님이 천하의 바람둥이라면서 왜 새치기로 결혼까지 한 건데? 정 싫으면 입으로 불평불만 그만 하고 이혼을 하라고.”
“…….”
“호오.”
“웅… 따지고 보면 그렇긴 그러네요?”
미나 언니가 의견을 내자 감탄사를 더해주는 하연수와 소유나.
일반적으론 정신 나간 의견이겠으나 우리 입장에선 다들 공감하는 눈치였다.
지긋지긋한 눈치인데도 꿋꿋이 버티는 왕좌에 대해 따진다.
“아, 그러면 되겠네요♥”
나도 뒤늦게 박수를 치며 그 여론에 탑승한다.
이대로 부추기면 티오가 빌 예감에 방실방실 웃으면서 몰아세운다.
“…그딴 건 딱히 상관없잖아.”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가고 다소곳하게 앉아 괜히 방석을 주무르는 이선화.
사방에 깔린 눈길을 피하며 샐쭉하게 대꾸한다.
“상관있다고. 매일 그 불평불만 들으니 얼마나 지겨운지 알아?”
“……싫으면 나가던지.”
“여긴 니 집도 아니잖아.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거기에 나는 어엿한 배우라는 신분이 있다고.”
“윽….”
가슴을 펴고 따박따박 논리정연한 반박에 이선화는 백금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린다.
호통쳤다가 역으로 몰아세워지자 눈동자를 빠르게 굴린다.
“이, 이혼! …그래, 이혼절차가 복잡해서 안 하는 거라고!”
그저 임기응변하기 급급한 의견이라는 게 보였다.
너무나 허술한 의견에 은둔하던 전문가가 나선다.
“글쎄. 그쪽 자기는 혼인신고한지 얼마 안 됐잖아.”
“뭐?”
은둔한 이혼전문가 이름은 하연수.
“결혼한지 얼마 안 됐다면 무효까진 힘들더라도 혼인취소는 할 수 있어. 사유는 그쪽 말대로… 남편이 알고 봤더니 악질적인 바람둥이라고 하면 되겠네.”
“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미 해봐서 잘 알지♥ 나 같은 경우에는 결국 이혼줄이 그였지만 말이야.”
“…….”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초승달처럼 들어올린다.
나긋나긋 말투로 쓰러져가는 젠가처럼 부실한 주장을 묵살시킨다.
‘제법이네?’
비주얼도 엄청나지만 이혼까지 했다니 의외로 나이가 꽤 있나보다.
어쩐지 관록이 느껴지는 포스에 경계를 해둔다.
“그럼 끝이네요♥”
어쨌든 이 땅에 떨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든다.
박수를 치면서 한 건 해결이라는 의미로 손등을 뺨에 붙인다.
“이선화 씨라고 했죠?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그쪽이 헤어지면 만사형통 아닌가요?”
“맞네. 우린 딱히 불만 없으니 사랑이 말대로 너만 헤어지면 모두가 해피엔딩이라고.”
“웅…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언니가 불행하다면 헤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후훗, 다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래 자기♥”
“…….”
실수로 쏟은 기름에 튕겨진 불씨처럼 순식간에 번져가는 반란의 물결.
보여준 첫인상과 달리 의외로 큰 허점을 보였다.
난공불락의 성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르게 함락시킬 수 있는 기대감에 부푼다.
그러나 이선화가 입술을 달싹여 확 타오르는 기세를 꺾는다.
“……싫어.”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한마디.
여태껏 기세 좋게 떨쳐놓곤 비겁하게 떼를 쓰자 미나 언니가 불만스럽게 지적한다.
“야, 방금까진 지긋지긋한데다 이혼이 귀찮아서 안 했다며.”
“흥, 뭘 하고 안 하고는 내 자유잖아. 그리고 나는 그 새끼 사생활이 지저분한 게 불만이지 딱히 증오하진 않는다고.”
“증오하지 않으면 어떤데?”
“하! 그야 당연한 거잖아. 조─”
발음하기 위해 바짝 오므렸다가 그대로 얼어붙는 입술.
주변에 자석처럼 꽂힌 시선을 의식을 하는지 황급히 눈을 내리깐다.
“조? 뭐.”
“그… 그러니까 조……”
“조 다음에 뭐. 또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러니까아……”
이번에도 모르쇠로 넘어가길 원하는 것 같았으나 우리들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사방에 깔린 감시망이 그녀의 목구멍을 옥죈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못 지나간다.
무릎을 꿇고 주먹을 무릎에 올려 강한 압박감에 짓눌리던 이선화는 이윽고 실토한다.
“아 증말! 그 바람둥이 새끼가 좋아해서 그렇다고! 좋아해서 결혼했으니 그런 건 당연한 거잖아! 사람 부끄럽게 만들래!?”
이번에는 살을 도려내더라도 굽히지 않는 주장.
자신이 만든 오류들을 그저 솔직하게 포장해서 돌파해버린다.
여태껏 보여준 시니컬한 모습과 달리 뺨을 붉히며 감정적인 모습을 비춘다.
수치심을 불사하고 보여준 소녀 같은 고백에 다들 각자의 의견을 중얼거린다.
“후훗, 안쪽 자기는 역시 재미있단 말이야.”
“치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뭐….”
“사실 저도 좋아해요! 우리 공통점이 많네요 언니♥”
왜 저러는지도 내심 공감이 가기에 우리는 이 이상 추긍하지 않는다.
미나 언니에게 듣기론 이선화에겐 여왕님이란 타이틀이 있던데, 아무래도 옥좌를 더럽게 물들여도 쉽사리 내려올 의향은 없나보다.
“쳇.”
조금만 더 잘 몰아세웠으면 자멸했을 텐데, 아쉬워서 혀를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