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144. 앞으로 나를 ○○라 불러줘
‘오늘은 늦네 오빠.’
대학교 주차장에서 덩그러니 놓인 돌멩이를 차면서 기다린다.
신학기에 맞춘 봄 날씨에 날이 풀리나 싶더니 다시 쌀쌀해졌다.
오늘은 오빠가 좋아하는 핫팬츠에 내의는 짧은 셔츠 같이 노출이 많은 옷을 받쳐 입어 융풍 들어온다.
살갗이 시리지만 그나마 얇게나마 챙겨둔 가디건이 위안된다.
‘후… 그나저나 그 사진은 진짜겠지?’
간만에 연락이 와서 만나는 날인데도 오늘은 들뜨기보단 조금 착잡하다.
오빠가 결혼했다.
사흘 전에 들은 따끈따끈한 소식이다.
처음 들었을 땐 때 아닌 만우절 농담인가 넘겼는데, 나중에 뜬금없이 카톡에 사진까지 보내왔다.
백금발에 파티용 원피스로 동화 속 공주님처럼 화려하게 꾸민 예쁘장한 여자.
그 여성과 팔짱을 끼고, 밑에는 대문짝만한 폰트로 <우리 결혼했습니다♥>가 박혀있었다.
메시지를 꼭 숙지하라는 듯이 사람보다 굵은 글씨로 강조됐다.
이건 현재 오빠의 카톡 프사까지 박제가 돼있는 상태다.
처음 봤을 땐 어안이 벙벙했다.
놀라움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합성이 아닐까 살펴봤지만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선우 오빠는 성인용 방송 채널을 운영 중인 음지의 방송인이다.
최근에는 아예 자신만의 플랫폼까지 열어 사장님이 됐고, 과감하고 수위 높은 방송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다.
오빠가 그런 쪽으로 능력이 출중해 연전연승 중이다.
그런 오빠니까 자연스레 주변에 여자가 넘쳐난다는 사실은 진작 인지하고 있었다.
나도 오빠의 방송에서 엄청난 이윤을 남겼으니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금사자 주변에는 금사자와 몸을 섞고 금사자를 노리는 다른 경쟁자들이 한 트럭 있다는 것 쯤, 파악하기 쉬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선우 오빠와는 사적으로 왕래를 했고, 같이 데이트를 즐기고, 오붓하게 밤까지 보냈다.
그렇다.
다 알면서 동의한 거다.
그래도 좋았으니까…♥
듬직하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오빠가 좋았으니까, 상관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지나치잖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 한탄.
그런데 아무리 백 번 양보해도 결혼은 하늘이 공노할 일이 아닌가 한다.
경쟁자가 많다는 건 알았어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
누가 보더라도 비겁한 새치기다.
“저기요, 어디 누군지 몰라도 룰은 지켜줘야잖아요…!”
원망스레 프로필 사진 속 눈초리 사나운 백금발 여자를 검지 끝으로 톡톡 친다.
이윽고 액정이 부서질 듯 꾸욱 눌러보다 손가락을 뗀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
또 한 번 돌아오는 현타감에 맥이 빠져 어깨를 내린다.
사실 오빠를 엄마에게 소개시켜준 미친 시도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차적으론 남자와 벽을 쌓고 사는 엄마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였지만, 부차적으로 엄마를 이용하려는 얌체 같은 마음 또한 약간이나마 있었다.
이 결혼소식만 없었다면 아마 내 계획대로 지금쯤─
“여어, 사랑아.”
목소리에 화들짝 휴대폰을 향한 시선을 올린다.
드디어 왔나, 반색하나 실망은 그 찰나의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다가왔다.
“……태준이 오빠.”
선우 오빠가 아니었다.
끈질기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한 거머리의 등장이었다.
강태준.
신사랑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껌딱지 같은 존재였던 그는 저번 만남에서 완전히 끝장이 났다.
열렬히 사모하던 신사랑에게 앞에서 그야말로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였고, 모든 방면에서 패배했다.
근력, 부력, 인간의 됨됨이.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그가 채선우에 비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왕창 깨져버린 그 날 이후, 강태준은 더는 찝쩍거리지 않았다.
패배의식에 찌들어 강의를 들을 때도 구석자리에 얌전히 찌그러졌다.
그렇기에 신사랑은 더는 의식하지 않았다.강태준이란 인간과 안 좋은 기억들을 몽땅 포장해 기억의 바다에 가라앉혔다.
더는 마주치지 않겠거니 하며 저 심해 아래에 봉인시켰다.
그랬는데─ 반갑지 않은 면상을 들이밀자 다시 과거가 부상해버린다.
떠올리기 싫은 불쾌한 과거가 스친다.
“또 뭔가요…?”
신사랑은 본능적으로 눈가를 찡그리며 받아쳤다.
“목소리가 왜 그래? 같은 수업 듣는 사람끼리 지나가다가 보여서 불러봤는데, 섭섭하네.”
“그런가요. 그럼 이제 인사 나눴으니 가주시겠어요?”
더는 틈을 주지 않는다.
사실상 강간미수까지 저지른 인간쓰레기라 단답형으로 말수를 줄인다.
하지만 강태준은 가볍게 불러본 것도, 딱히 물러날 태도 또한 아니었다.
“이봐, 최근에 우리 사이에 감정의 골이 있었던 건 맞지만 너무 띠겁게 굴지 마.”
“그쪽이랑 더 할 말 없어요.”
“왜 그렇게 바쁘게 굴어. 무슨 약속 있어?”
“정말 뻔뻔하고 끈질기네요…”
기가 차서 신경질적으로 뱉은 후, 아이디어 전구가 반짝인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마치 누군가를 암시하듯이 덧붙인다.
“아~ 맞아요. 여기서 누굴 만나기로 했거든요. 누가 와서 맞기 전에 얼른 꼬리 말고 가시는 게 좋을 걸요?”
간접적인 도발.
전에 선우 오빠에게 배를 차인 기억이 나도록 상기시켜준다.
거기에 강태준은 실실 쪼개던 웃음이 멈춘다.
곧바로 안면 싹 바꿔 정색해 본심을 내세운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을까? 오늘은 좀 큰 건을 좀 물어왔거든.”
“큰 건…?”
어깨가 뻣뻣하다.
오늘따라 묘한 자신감.
혹시나 싶은 마음에 신사랑은 눈동자를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야외주차장은 스산했으나 입구에 경비원이 있었고, 비명을 지르면 돌아볼 행인 정도는 있었다.
저번에 인기척 없는 곳에서 한 번 덮쳐질 뻔했기 때문에 경계를 해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강태준은 뻔뻔스럽게 지껄인다.
“음~ 되도록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서 이야기했으면 하네. 잠깐만 시간 돼?”
“…제가 바보로 보이시나요. 강간범을 뭘 믿고 따라가요.”
“섭섭하네. 그거 다 지난 일이잖아.”
“가해자 주제에 반성도 없는 뻔뻔한 말이네요.”
“이봐, 따져보면 이건 내가 아니라 사랑이를 배려해서 한 말이라고. 싫다면 여기서 말할까?”
“네. 얼른 하고 꺼져주셨으면 해요.”
거칠게 밀어낸다.
손가락 하나 스치기 싫어서 숨결도 안 닿을 정도로 떨어진다.
“좋아, 니가 꺼낸 말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강태준은 시종일관 여유있게 실실 쪼갠다.
그 열 받는 상판대기에서 불길한 예감이 피어난다.
그는 핸드폰을 꺼냈다.
뭐가 나올지 몰라 더욱 철벽가드를 펼칠 준비를 하는데… 그는 단지 얌전히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으응…! 이제 괜찮, 괜찮아요 오빠…♥』
“이거 봐봐. 누구 닮지 않았어?”
“이, 이건…?!”
허튼 짓을 벌이면 신사랑은 언제든 비명을 지를 준비가 됐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영상을 보고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다.
그건 음란 동영상이었다.
벌건 대낮에 낯부끄러운 영상을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노골적인 살색이 화면에 꽉 찬다.
무엇보다 나오는 배우가 너무나 익숙했다.
익숙한 거울 속의 자신이다.
전기가 찌릿! 오르는 것처럼 떠오른다.
무려 한참 예전에 학비를 위해 선우 오빠와 찍은, 이제는 긴장감 결여로 기억의 저편까지 넘어간 자신의 처녀를 파는 영상이었다.
‘이게 대체 왜 이 인간 손에…?!’
주마등처럼 신사랑의 뇌리에는 수많은 의문은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의문을 풀이할 시간은 없었다.
“야, 왜 내빼?”
“다… 다가오지 마세요.”
강태준이 휴대폰을 흔들면서 다가오자 땀이 흥건한 주먹과 발을 뒤로 빼기 바쁘다.
“나한테 할 말 없어?”
“오지 마….”
“왜? 무슨 찔리는 점이 있나? 무서우면 또 꺅꺅 비명질러. 왕자님이 와줄지 모르잖아.”
“…….”
“아~ 못하네? 혹시 화면에 나오는 몸 파는 여자가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래? 푸훗.”
능글맞게 다가오는 강태준.
이윽고 감질난다는 듯이 단숨에 간격을 좁힌다.
그대로 저항하는 신사랑의 어깨를 감는다.
“오늘 내 차 가져왔으니까 얌전히 타. 당장 과 단톡에 퍼뜨리기 전에.”
저열한 협박과 동시에 정면에 자신이 끌고 온 경차를 가리킨다.
자그맣고 귀여운 차가 지금은 납치범 봉고차처럼 보인다.
저 차에 탔다간 끌고 갈 장소가 어딜지 뻔히 의도가 보인다.
“협박…인가요?”
“글쎄. 난 차에 타라고만 했으니 나머지는 마음에 드는 대로 생각해.”
“정말… 끝까지 비열한 인간이네요.”
“그러기에 좀 적당히 넘어왔어야지.”
옆에서 강제로 어깨를 걸고 돌아본다.
그림자 음영에 가려지도록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때까지 그 덩치 끼고 아주 ㅈ병신으로 봤지? 오늘 이 막돼먹은 몸뚱어리 단단히 교육시켜줄게♡”
“쓰레기…!”
“그래, 계속 그렇게 저항해봐. 그래야 더 재밌을 테니까.”
신사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감정적 분노보다는 위기를 타개할 해답이 우선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뇌를 파헤친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답이 옳은지 도출해낸다.
어느 때처럼 오빠가 와서 개입하면 좋겠으나 차도 안 보이는 마당에 기대하기 힘들다.
아니, 오빠가 오더라도 애초에 저 자료가 저 놈 손에 들려있다는 부분이 문제다.
저 영상을 어떻게 해서든 놈의 손에서 지워야 끝이 난다.
“자, 갈까? 허튼 짓하면 바로 전송할 거니까 각오해라.”
“…….”
그렇기에 일단은 순순히 발걸음을 옮긴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두 걸음 보폭을 맞춰 따라가면서 머리를 쉬지 않는다.
하지만 차가 코앞에 올 때까지 뾰족한 수가 퍼지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갈까 싶었는데, 그랬다간 정말 음란물이 교내에 퍼질지도 모른다.
앞서 쓸데없이 도발까지 감행했기에 강태준은 무척 까칠한 상태니 그 선택지는 멍청하기 그지없다.
“야, 왜 멈춰? 타 어서.”
부름 경차 코앞에서 우뚝 멈춘 신사랑의 두 발.
‘……가만, 저건 그냥 단순한 영상이 아니랬잖아.’
완전 절벽 끝까지 도달한 현재, 뒤늦게나마 영상을 찍기 전에 채선우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NFT와 저작권 보호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
그걸 떠올리니 두통 싸매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돌파구는 가까이 있었다.
“야, 어서 움직여.”
운전자석을 젖힌 강태준이 꿈쩍하지 않은 신사랑을 보고 다시 문을 닫는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온다.
“타라니까? 내숭 떨면서 몸이나 팔고 다니는 씹년 교육시킬 시간 줄어든다고.”
“…….”
“쫄아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 됐냐? 얼른 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당장 동영상 과톡에 퍼뜨리겠─”
“…하세요.”
“……뭐?”
“퍼뜨리라구요. 그까짓 거 하려면 하시라구요.”
고개를 든 신사랑은… 웃었다.
어딘가 작위적이고 어색했지만 웃어버린다.
평소 청조하고 옥구슬처럼 예쁘던 눈은 어딘가 나사가 풀린 듯, 미쳐있었다.